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발표작

하소연/황진숙

에세이향기 2023. 6. 5. 03:02

하소연/황진숙

 

 

 

 

 

저 영감탱이 때문에 못 살겠단다. 식당에서 엄마의 하소연을 듣다 보니 갈비탕 맛을 모르겠다. 밥 먹고 천천히 말씀하시라 권해도 막무가내다. 그간 묻어뒀던 사연이 끓어 넘친다.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엄마는 봄부터 복숭아 농사를 짓느라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깡마른 몸으로 종일 밭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칠순의 나이에 버거운 거다. 혈압이 있어서 무리는 금물인데, 성정이 급한 아버지는 빨리 끝내야 한다며 다그치고 채근한다.

이제는 농사일을 접고 편히 쉬시라 말해도 아버지는 귓등으로 흘린다. ‘쉬엄쉬엄 일손을 얻어 일량을 덜고 병원에 가서 영양제라도 맞아가며 하면 수월하지 않겠냐’라는 조언을 뭉개고 요지부동이다. 치매 진단까지 받고 우울증도 있는 아버지가 손에서 일을 놓지 않으니 애먼 엄마만 들볶인다. 고된 노동에 술이라도 들어갈라치면 예의 주사를 피워 엄마를 힘들게 한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못 살겠다며 집을 나왔다는 엄마의 전화에 부랴부랴 차를 끌고 왔다. 짐도 안 챙기고 홧김에 나온 엄마의 입성이 가관이다. 늘어진 몸빼바지에 목 늘어난 티셔츠다. 오늘은 한술 더 떠서 구멍 난 양말에 슬리퍼 차림이다. 얼굴마저 새까맣다면 거리의 부랑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추레하다. 보다 못한 남편이 장모님 옷 좀 사드리라고 거든다. 가방이며 옷이며 사준들 별수 없다. 어디다 쟁여 놓고 저리 너절한 것만 입는 걸까. 통장에 그득히 예금을 넣어두고 장롱 위엔 땅문서를 모시고 사는 분들이라면 어느 누가 믿을까. 아끼고 사는 게 미덕이지만 지나치면 궁상이란 걸 왜 모를까. 한숨이 나온다.

이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밥 생각이 없다며 먹다 남은 갈비탕의 고기를 싸가겠단다. 기어이 내 입에서는 궁상 좀 그만 떨라는 말이 나온다. 매몰찬 어조에 엄마가 멈칫한다. 아쉬운 듯 고깃덩이를 힐끔거리는 엄마를 집으로 모셨다. 아무 생각 말고 쉬시라 말씀드리는 순간,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숨이 안 쉬어진다며 네 엄마 당장 집에 보내라고 야단이다. 아버지가 연신 전화를 해대니 마음 약한 엄마는 안절부절못한다. 기관지가 약한 아버지가 걱정되는지 다시 시골집에 데려다 달라고 야단이다.

이런 일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당장 사달이라도 날 것처럼 난리를 피우다가 그예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기 일쑤다. 근거리도 아니고 없는 시간 쪼개서 왔다 갔다 시달리는 자식은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잦아지는 엄마의 호출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날 밤, 엄마에게 퍼부어댔다. 단호하게 결단을 못 내리니까 이리된 게 아니냐고, 엄마에게 날을 세웠다. 억지로라도 아버지에게 치료를 권하고 좀 편히 살았으면 이런 일은 없지 않냐며, 평생을 그리 끌려다니고 싶냐고 타박을 주었다. 죽어라 일만 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으시냐. 맘속에 눌러뒀던 이야기를 쏟아부었다.

한풀 꺾인 엄마가 군말 없이 방으로 들어간다. 구부정한 허리로 다리를 절룩이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마른 나뭇잎처럼 물기 없이 바스락거린다. 뒷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저릿해진다.

엄마도 무작정 나온 속내일 것이다. 누군가 다독여주고 보듬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겠지. 일생 고단하게 사셨으니 힘든 삶, 자식이라도 알아주길 바랐을 터이다.

어렸을 적 엄마의 하소연은 장독대에서부터 시작됐다. 정화수를 올려놓고 소지를 태우며 가족들의 안위를 비손했다.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게 빌고 나서야 하루를 시작했다. 증조할머니의 비손으로 가문이 무사 안녕했다는 가르침이 할머니에 이어 엄마한테까지 이어진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미신이라며 장독대의 돌을 치워 버렸다.

그 후 엄마는 아무도 없는 낮에 금강경을 읽기 시작했다. 식구들의 생시를 읊어가며 무탈하기를 기원했다. 질척거리는 본인의 속내를 꺼내놓으며 마음을 다잡기도 했을 터이다. 고지식한 아버지는 엄마의 불경 읽기를 터부시했다. 시간이 남아돌면 밭일이나 하라며 책을 내팽개쳤다.

한동안 마음의 의지처가 사라진 엄마가 허전해했다. 꾹꾹 눌러 담은 속내 풀어놓을 길 없어 답답했을 터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 속의 말을 전화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박박 갈아대는 절구 소리며 매질을 해대는 다듬이소리가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엄마의 가슴 속에는 긁어대는 호미가 뒤집어엎는 쇠스랑이 사는 것 같았다. 더러는 울분이며 더러는 통곡이었을 한이 배인 소리를 마냥 흘려듣기 일쑤였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무지렁이 아낙으로 끝내 삭이고야 말 한탄들을 말이다.

운명은 늘 엄마에게 인색했다. 두 자식을 앞세웠으니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허우룩한 속내를 그 누가 알까. 푸념 삼아 늘어놓던 신세타령마저 거부당했으니 허망했을 터이다. ‘이리 살아 뭐 하나’, 한숨도 못 주무시고 뒤척이지는 않을는지. 일생 농사를 짓는 것도 모자라 쪼그라든 삭신에 검버섯을 키우고 애지중지 등나무 한 그루 들여놓은 엄마의 신산한 세월이 아릿하다. 매번 고빗사위였을 삶의 순간들로 몸에 밴 궁상이 애처롭다.

가끔 찾아뵙고 용돈을 드리는 것으로 효를 다했다고 태무심했던 나를 돌아본다. 엄마의 속내를 헤아려주지 못한 얕은 속을 자책한다. 불혹의 끄트머리에 들어서고 나서야, 모진 세월에 벼려진 엄마의 하소연이 곡절 많은 스스로의 생을 위로하기 위한 방책이었음을 알겠다. 모지라질 때까지 뭉툭한 나무를 파고드는 끌처럼 가정을 건사하기 위한 그녀만의 몸부림이었을 터이다.

창 너머로 보름달이 걸렸다. 환하게 비쳐드는 빛이 서럽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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