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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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헌책 경전

에세이향기 2023. 3. 7. 21:52

헌책 경전/황진숙

책들이 누워있다. 서가에 꽂혀있는 호사는 고사하고 노끈에 묶여 옴짝할 수 없다. 켜켜이 쌓인 무게로 압사할 지경이다. 분리수거장의 잡동사니와 뒤섞여 여기저기 널브러진 책은 숨도 쉴 수 없다.

펼쳐지고 뒤집힌 책더미를 들춰본다. 사서삼경이 나직이 한숨을 내뱉는다. 진리는 시간에 지배되지 않건만 먼지에 파묻혀 허송세월했다. 어록 한 구절 설파하지 못하고 폐기처분 되나 싶어 초조하기만 하다. 스티로폼을 깔고 앉은 백과사전이 지루한 듯 연신 하품이다. 방대한 지식으로 목마른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기는커녕 인테리어 소품으로 진열되기 바빴다. 육중한 몸피로 책꽂이가 흔들리지 않도록 맨 밑의 칸에 꽂혀 무게중심을 잡아야 했던 나날이 하릴없다.

표지가 벗겨진 채 넉장거리로 드러누운 요리책은 초점을 잃었다. 지난날, 스푼 그람 등 정량된 레시피로 밥때를 책임졌다. 페이지마다 설탕인지 소금인지 정체 모를 가루가 묻어나도 개의치 않았다. 세월 따라 등때기가 무너져 흐느적거리는데 정작 찾아주는 이 없어 초라하다. 덤으로 살아온 별책부록, 제 소임을 다해 갈 곳 잃은 시험서, 알몸으로 내던져진 교양서는 마지막을 예감하며 몸을 사린다.

한때는 두부모처럼 네모반듯했다. 잉크 냄새만으로도 존재를 증명했다. 인쇄소에서 쏟아져 나올 때는 황홀경 자체였다. 낱장에 빼곡히 들어찬 활자로 세상을 주름잡았다. 사라진 제국과 머나먼 우주의 연결고리로, 문명의 수레바퀴로, 뭇사람들의 길잡이로 시공을 넘나들었다. 제 한 몸 펼쳐 심연을 유영하며 미지의 세계를 개척했다. 쇠공이 밑줄을 그어대고 형광펜이 쐐기를 박아도 몸이 닳도록 지적 바다를 항해했다. 손때로 얼룩지고 보풀이 일어 너덜거리는 종잇장으로 숱한 손길에 감응해왔다. 어두컴컴한 밤을 지새우며 지혜의 불을 밝혔다.

언제부터인가 형체도 부피도 없는 전자책이 추앙받기 시작하자, 자리만 차지한다는 지청구가 날아들었다. 야박한 세상인심에 떠밀려 뒷방으로 물러나고 종내에는 짐짝처럼 한데로 내쳐졌다. 파장 무렵의 늘어진 이파리 신세지만 떨이로라도 헌책방에 팔려 가면 다행이지 싶었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금 뒤척일 테니. 코흘리개들의 놀잇감이면 어떠하랴. 딱지가 되어 하늘로 솟구치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저무는 생이라고 달콤하지 말란 법은 없다. 호떡의 단맛을 품은 온기로 이울어도 좋을 테지.

이도 저도 아닌, 낙오되다시피 버려진 처지가 황막하다. 아득히 먼 옛날의 환영이 겹쳐진다. 청빈한 선비의 오두막에 한 시렁의 서책으로 얹어져 밤낮없이 들춰졌다. 선비들은 책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책 동냥을 하고 어렵게 얻은 책에 비단을 입혀 애지중지 간직했다. 책을 읽고 싶지만 바쁜 정사로 읽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임금이 어좌 뒤에 책가도를 배치했을 정도이니 서책이라는 존재만으로도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제주도로 유배 간 어느 학자의 동고동락하는 벗으로, 성경 금강경같이 한 집안을 쥐락펴락하는 정신적 지주로 내내 번성해야 할 일이었다.

어찌 이리됐을까.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을 탓하며 구시렁거리는 순간, 예까지 바람이 불어닥친다. 무작스러운 바람이 사정없이 따귀를 갈긴다. 아직도 과거의 영광에 머물러 있느냐고 일침을 놓는다. 디지털로 진화한 세상을 따라잡았느냐고 묻는다. 차라리 이쯤에서 e-book에 투항해 납작 엎드리란다.

동사(凍死)라도 할 듯 얼어붙는 날씨에 한데로 내쳐진 것도 서러운데 조롱까지 당하고 보니 서늘하다. 저만치서 펄럭이는 서책이 눈에 들어온다. 방패막인 겉장이 어디론가 사라진 채, 죄다 뜯어져 끄트머리만 붙어있는 속지들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받아친다. 제대로 읽히지도 못하고 사라져야 하는 오기로 허공을 향해 시퍼렇게 응수한다.

제아무리 전자책이 문명의 편리성을 내세우지만, 서책이 지니는 무게와 물성의 감성은 대체 불가다. 숨 쉴 공간 없이 모니터에 갇힌 글자에선 어떤 교감도 나눌 수 없다. 빈 여백으로 숱한 상상력을 끌어내는 책들이 고서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던가. 요동치는 새 문물이 서책의 지형을 바꿀지언정 종이책은 뭇사람들의 온기로 공존할 터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유난하지 않은 존재 자체의 묵향으로 세상을 응시할 것이다.

가파른 날들로 인해 벼랑으로 내몰린 책들을 훑어본다. 이제 저들은 바람에 걷어차이거나 길냥이의 발톱에 찍혀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이다. 뻣뻣했던 질감이 나달거리도록 푸념 같은 시간을 견뎌온 건 스러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마지막 하나의 성냥을 불사르는 소녀처럼 이 밤이 지나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운명이 야속하지 않을까.

왠지 모르게 쓸쓸해진다. 오갈 데 없어 허름해진 영혼들을 감싸주고 싶다. 거둬서 거처를 마련해 맘껏 쉬라고 자리를 펴주고 싶다. 안온한 곳에서 다시금 생명력을 얻어 오래오래 살아남아 주기를 기도하고 싶다.

실밥이 터져 헐거워진 책을 품에 안는다. 내일이 없어 늘어진 책들도 집어 든다. 찢어진 페이지는 풀로 붙여 생을 이어주고 표지를 잃고 방황하는 책엔 제대로 된 겉옷을 입혀주리라. 빛을 보지 못한 시간은 접어두고 숱하게 읽히고 호명되어 그만의 서사로 간직되기를 소원한다. 무명의 글자들이 귀청을 열고 속닥거리기를, 묵은내가 들어차 캄캄했던 활자들이 환해지기를 열망한다.

어스름이 내려앉는다. 꿈꾸는 책들의 귀엣말이 듣고 싶어지는 저물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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