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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벽, 단단한 무늬/황진숙

에세이향기 2023. 3. 4. 10:38

벽, 단단한 무늬/황진숙

 

담벼락에 무늬가 걸렸다. 담쟁이가 그어놓은 초록줄기도 일필휘지된 붓칠도 아니다. 바위를 올라탄 바위 떡풀처럼 담장 모서리에서 이음쇠가 돋을새김 한다. 해진 옷에 덧댄 조각마냥 균열과 틈으로 쇠락해가는 벽을 지지하고 있다.

벽면에 부착해 놓은 철근에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옭아맨 쇳덩어리까지. 숨통을 찔러대는 것들로 담장은 숨이나 쉴 수 있을까. 조여드는 이음쇠의 볼트와 너트에 맥을 놓지는 않을까. 이쪽저쪽 틈새로 파고드는 이끼에 따끔거리지는 않았는지, 흠집으로 얼룩진 울담이 살풍경하다.

한때는 철옹성이었을 테다. 함부로 담 안을 넘보지 못하도록 완강하게 가로막았을 것이다. 바람 한 점 드나들지 못하게 장막을 쳤다. 천근만근의 무게로 단단히 에워쌌다. 안과 밖을 경계 지으며 보초를 섰다. 날아오는 공을 맞받아치고 행인의 발길질에 굴러온 깡통을 되받아치며 막아섰다. 세월의 파편으로 파이고 바스러진들 단호히 여몄다. 이름 없는 담장으로 무너질지라도 끝끝내 지키리라. 지나는 바람에 풀어놓지 않은 한숨은 벽의 독백이 되었다.

수은등이 켜지는 적막한 시간이면 가물거렸다. 등 굽은 이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비애에 젖어들었다. 취객의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따라 흔들리기도 했다. 땅의 울림과 진동으로 솟아나던 두려움이 되살아날라치면 바닥을 꽉 움켜쥐었다. 후려치는 천둥번개에 발부리를 타고 올라오던 통증이 겹쳐져 움찔하기도 했다.

성벽처럼 우뚝 솟거나 장성처럼 천리만리는 아니지만 마당을 품고 집을 들어앉혀 일가를 이뤘다. 빈틈없이 층층이 쌓아올린 우직함으로 북적이는 체온과 새어나오는 온기를 가둬둔다. 방안에서 벽으로 날아와 꽂히는 소리를 잠재우며 무성히 뻗어나가는 냄새를 삼킨다. 마당에서 피워 올리는 꽃물이나 날아들은 새소리에 휩싸여도 들썩이는 법이 없다. 비바람이 훑고 눈보라가 친들 요지부동이다. 내지를 수 없는 소리를 뉘이고 켜켜이 쌓인 무게로 침묵을 다진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편평한 벽체 속으로 고였다. 묵묵했던 담장은 금이 가고 틈이 생겼다. 견고했던 표면이 갈라져 골이 졌다. 치이고 받치느라 이골이 난 몸체 속으로 바람이 넘나들었다. 풀린 앞섶 마냥 풀썩거리며 부스러지는 조각들. 살아온 기억이 벗겨지고 품어온 사연들이 너덜거린다.

끄덕도 않을 것 같던 아버지에게 균열이 찾아온 건 서너 해 전부터다. 사고로 등뼈가 부러진 데 이어 또 다른 사고로 절름발이가 되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노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기세등등했던 혈기는 사라지고, 맥없이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이 옹색하기만 하다. 초점을 잃은 푹 꺼진 눈으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고 먼 산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부터였지 싶다. 평생 가족을 위해 담장을 둘러온 그가 홀로 자신만의 벽을 쌓기 시작한 때가.

들이켜기만 하고 뱉어내지 못해서일까. 잘디잘게 부서지는 순간들이 서걱거리며 가슴을 후빈다. 뿌리 내린 곳에서 낯선 곳으로 떠밀려가는 이즈음의 아버지가 저릿하다.

그 누구보다 억척으로 살아왔다. 물려받은 땅뙈기 하나 없는 소작농이었으니 산골짜기 자갈밭이면 어떠랴. 돌을 캐내기 위해 낮이나 밤이나 곡괭이로 땅을 팠다. 박혀 있던 돌덩이는 파열음을 내며 저항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마찰음이 산등성이를 울리며 격돌했다. 밀고 당기기를 수십 번, 땀범벅이 되어 맞부딪치는 농군의 몸짓에 돌덩이가 수그러들며 뽑혀 나갔다. 쇠스랑으로 굳은 흙덩이를 으깨고 부수며 그만의 터를 일궜다.

자갈밭에서 다랑밭으로, 다랑밭에서 넓은 들녘으로 탈바꿈하는 동안 그의 담장은 굳건해졌다. 철벽 방어를 위해 두둑을 올리고 철조망으로 에워쌌다. 멧돼지와 고라니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말뚝을 박고 그물망을 쳤다. 손과 발이 긁히고 찧을수록 울타리는 견고해졌다. 판판히 다진 자리에 들어앉은 과실수가 해를 더하며 풍요로워졌다.

매달리고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을 담장이건만, 발밑을 감아 오르는 넝쿨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해 여름, 아버지는 눈멀고 귀 먹은 듯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바닥에 붙박였다. 새어 나가지 않는 절망 더미에 넋을 잃었다. 비명횡사한 아들의 사고에 이어 수술을 받다가 저승길로 간 자식의 죽음까지. 숨이 떨어진 주검 앞에서 가슴을 칠 수도 울부짖을 수도 없었다.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무게에 눌려 슬픔은 제 소리를 잃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체온을 덥혀 줄 수 없었던 비통함이 그를 짓눌렀다.

설상가상 어머니는 죽은 자식을 살릴 수 있다는 이단종교의 꾐에 빠져 집을 나갔다. 달포 해포가 가도 소식이 없자 아버지는 실성한 사람처럼 산으로 강으로 나돌았다. 일생 흙내에 묻혔던 아버지의 체취가 알코올에 파묻혔다. 고통으로 짓이겨진 가슴은 너덜거렸다. 한 서린 육신으로 휘뚝대다가 사고까지 났다.

생의 풍파는 절망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지 온몸을 내 놓으라 밀어 붙였다. 육중한 힘으로 살을 찢고 뼈를 으스러트렸다. 부러진 다리에 철심을 박고 물크러진 살을 봉합하고 나서야 아버지는 어긋난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됐다. 차디찬 쇠붙이와 한 몸이 된 아버지. 데데한 몸집으로 세월을 헤치느라 사력을 다했다. 고스란히 자신을 바치고서도 뼛속 깊이 자리한 철심에 부대끼는 신세가 처연하다.

관절이 걷어차이고 뼈가 찍히는 수난으로 파이고 기울어진 벽에 아버지의 모습이 투영된다. 견디다 못해 생살이 떨어져나간 부위가 휑하다. 힘이 빠진 담벼락은 쇠잔해진 몸을 하나 둘 쇠붙이에 의탁한다. 스스로에게 단단한 벽이 되기 위해 누르고 재워둔 속내마저 풍화에 들 듯 아버지는 적막강산에 휩싸였다.

가둬둘 온기가 사라진 담에 어둠이 들어찬다. 용심을 쓰며 삐거덕거리던 대문은 벙어리가 되었다. 등을 붙이고 있던 등나무는 고사목이 되었다. 담벼락 아래 꽃들은 생기를 잃고 사위어갔다. 일생 세월을 부려온 담장은 머금을 냄새와 품어 낼 소리 없이, 그늘로 남아 비척거린다. 담장에 매달린 하루의 무게를 쓸어 담으며 기진했던 한 때가 기억에서 소멸된다.

세월은 상처의 흔적이 시간에 바라고 마모되게끔 시계바늘을 돌려놓았다. 지난날의 여정이 박제된 아버지의 육신은 느슨해졌다. 벌어진 틈으로 바람이 드나들며 덜컹거린다. 진이 빠진 듯 새어나가는 기억을 붙잡을 수 없다. 어두컴컴해진 눈길과 들리지 않는 소리로 물끄러미 서 있는 아버지가 웅얼댄다. 훔켜쥐었던 시간이 풀리며 스스로가 담장이었던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다.

굽어보는 담장에 그늘이 깊어진다. 담벼락에 걸쳐놓은 뜰채와 장대에 비스듬히 제 무게를 더하고 있는 벽이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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