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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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물끄러미 /황진숙

에세이향기 2023. 3. 4. 08:20

물끄러미 /황진숙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바라볼 누군가가 있어야 의미가 산다. 내 안으로 빠져들려는 이기를 벗고 너를 향해 마음을 돌리는 모양새다.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용서해 주고 싶다. 미움도 원망도 사라진다.

명사처럼 단호하지도 동사처럼 역동적이지도 않다. 더러는 연민을 더러는 염원을, 딱 떨어지진 않지만 ‘물끄러미’라는 단어에 뒤따라 붙을 수 있는 숱한 의미로 정이 간다. 못내 마음에 걸려 뒤돌아보는, 감춰진 속내를 읽어내는 몸짓이다. 설명할 수 없는 뭔가로 자꾸 가져다 쓰는 부사다.

밤 10시다. 넘실대는 세상의 물너울을 헤치고 귀환했다. 병원 장비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해 놓느라 피곤함을 무릅쓰고 야근했다. 불이 꺼진 집은 적막했다. 주방 싱크대엔 물을 부어놓은 냄비만 덜렁 있다. 널린 부스러기를 보아하니 찬을 꺼내기 귀찮아 라면으로 때웠나 보다.

텔레비전에서는 9박 10일 유럽 여행 특가라며 쇼호스트가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남편은 거실 한 가운데서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잠이 들었다.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늘 같은 하루지만 고됐겠지. 코 고는 남편을 바라본다. 무방비 상태로 잠든 그가 평온하다. 좋다 나쁘다 표 내지 않는 성정으로 그득 담고 있는 감정들. 내 천(川)자를 그리며 골을 이루는 미간의 주름이 새삼 낯설다. 반백 년의 시간을 돌고 돌아 새겨진 흔적이 짠하다.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린다.

진즉에 버리라고 했건만, 늘어진 내복이 출렁거리는 뱃살을 이기지 못해 위로 말려있다. 숨 쉴 적마다 살이 출렁거린다. ‘복부비만이다. 내장지방이다’ 잔소리로 밀어붙인 뱃살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가타부타 지청구에 기죽지 않고 잔소리에 반응 없는 그가 내심 안심이다. 나이 들었다고 풀이 죽고 의기소침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아낙의 마음이다. 제대로 자라고 이불을 덮어주는데 삐죽 돋아난 발톱이 눈에 들어온다. 깎을 시간조차 없었던 걸까. 거스러미처럼 마음이 아려온다.

얼마 전 별것 아닌 일로 투덕거렸다. 홧김에 집을 나가 버린 그를 기다리다가 부아가 치밀어 먼저 잠이 들었다. 새벽녘 집으로 돌아온 그도 지금의 나처럼 물끄러미 내려다봤을까. 속내는 시끄럽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침대에 기대어 책을 읽다가 옆으로 쓰러진 나를 부축하고 이불을 덮어줬을까. 사랑과 미움이 희석된 눈빛으로 지지고 볶고 싸워도 내 마누라뿐이라며, 코끝에 걸친 안경을 벗겨주고 등을 토닥여줬을까.

우연한 만남에서 남편이라고 아내라고 소개할 적마다 어쩜 두 분이 그리 닮았냐는 말에 서로를 쳐다보며 혹여 우리가 전생에 오누이었나 까마득한 샛길로 빠지기도 한다. 물끄러미 바라보며 인연이 다해 다음 생애에는 서로를 모른 채 살아갈지도 모른다며 남은 생 잘살아보자고 의기투합해 보기도 한다.

처음엔 서로의 상처에 덧내기 바빴다. 서늘해진 가슴으로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 역시 허공을 향해서 하고 싶은 말만 쏟아냈다. 바라볼 줄 모르는 우리는 평행선을 달렸다. 다듬어지지 못한 뾰족한 돌처럼 할퀴어댔다. 세상 물살은 그런 우리를 엎치락뒤치락 엉겨 붙게 했다. 낯선 타인에서 가슴 한구석을 내어주는 사이가 될 때까지 끓어 넘치고 흘러내려야 했다. 뒤섞여 달라붙고 눌어붙은 상흔을 남기고서야 서로를 응시할 수 있었다. 그의 모습에서 나를, 내 모습에서 그를 비추어보며 잠잠해졌다.

그의 곁에서 만들어온 몇십 년의 세월이 이제는 서로에게 겹쳐서 연민과 애틋함이라는 이음동의어로 갈무리된다. 침묵만으로도 눈빛만으로도 의미를 전달하는 사이가 됐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돌아온 저녁, 마주 보며 그 시간을 함께 나눈다. 유난하지 않고 별스럽지 않은 더러는 행복의 의미를 찾고 더러는 권태롭게 쳐다보며 늘 붙어있는 눈 코 입처럼 일심동체가 된다.

톡톡. 창 너머 보름달이 환하게 비쳐드는 밤에 아낙은 주저 없이 남편의 발톱을 깎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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