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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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바게트/황진숙

에세이향기 2023. 10. 29. 20:50

         

 

 바게트/황진숙

 

 

 

터질 대로 터져라. 쿠프가 벌어지고 속살이 차오른다. 칼금을 그은 껍질 사이로 속결이 뚫고 나올 기세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맘껏 팽창한다. 노릇하게 제 색을 갖추자 오븐 밖으로 나온다. 안과 밖의 온도 차로 바삭거리는 소리가 생동한다. 저다움을 구현하는 소리가 거침없다.

반으로 잘라 베어 문다. 한입에 느껴지는 맛이 아니다. 바삭한 껍질과 폭신한 속결은 씹어야 배어든다. 씹을수록 바삭한 껍질의 ‘바게트다움’이 전해져 온다.

바게트는 세상 한가운데서 저만의 호흡을 이어간다. 여타 반죽처럼 치대는 레시피를 따르지 않는다. 억지로 주무르지도 않는다. 반죽에 힘을 가하지 않고 오랜 시간 발효한다. 반죽틀에 갇힌 정형을 거부하며 스스로 모양을 찾아간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깊은 맛을 끌어낸다.

이보다 더 솔직할 수 있을까. 들쑥날쑥한 기포가 주는 자유는 거칠다. 뭇사람들의 감흥을 불러 일으킬만한 조밀한 결도 풍성한 모양새도 아니다. 이것저것 넣어 미각을 홀리거나 본연의 맛을 가리는 부재료를 첨가하지 않는다. 밀가루, 물, 소금, 이스트로만 만들어 검약하다. 충전물로 속을 채우고 달달하게 치장하는 빵들 속에서 무덤덤하기까지 하다.

수프에 찍어 애피타이저로, 밋밋한 주식빵으로, 샐러드에 더해져 후식으로, 와인에 곁들여진 안주로 바게트는 어디에나 어우러진다.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은 사람처럼 과하지 않아 질리는 법이 없다. 별맛이 없는데 자꾸 생각나는 맛이다.

어쩌면 지금껏 빵의 담백한 맛을 가리는 단맛이나 풍성한 맛에 호도됐는지 모른다. 먹자마자 단박에 느껴지는 맛이어야 제대로 먹었다는 조급증에 시달려온 탓이다.

어느 빵보다 힘을 주지 않는 바게트는 만들기가 어려웠다. 빵이란 부드러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얽매여 무조건 힘을 줘서 찰기를 더했기 때문이다. 불혹의 끄트머리에 섰으니 누구보다 세상살이의 공식에 익숙하다. 몸에 배어 있다 보니, 일상 또한 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괄호 속의 답을 찾아 계산기를 두드렸다. 마음을 써주지 않는 부모님에게 효도는 아니더라도 으레 자식으로서 의무를 다했다. 좋고 싫은 일에 마음을 나누기보다 받은 만큼만 하겠다며 거리를 뒀다. 직장에서 만난 동료들과는 어느 정도 선을 그었다. 가까이 지내다가 뒤돌아서는 관계가 되기 싫다는 이유였다. 당장은 그게 편할지 몰라도 갈등과 화해, 이해와 포용이 빠진 관계는 건조하고 윤기가 없다. 끝내는 몸과 마음에 탈이 나기 일쑤였다. 어찌 살아가는 일이 딱 떨어지는 정답만 있으랴.

바게트에서 최고의 난이도는 필요 이상의 가스와 압력을 빼는 칼집 내기다. 발효된 반죽의 거죽이 적당히 말랐을 때 칼금을 그어 일침을 가한다. 끝없이 부풀어 오르려는 오만과 헛바람으로 되바라지려는 무언가를 터트려 주는 것이다. 반죽을 마냥 팽창시키는 게 아닌, 일정하게 부풀려 속결을 좋게 하기 위함이다.

인간관계가 주고받음의 관계만은 아닐진대, 셈법에만 골몰해 온 지난날은 명백한 나의 자만이다. 감정 소모를 피한답시고 되도록 침묵으로 일관하는 대처법은 불통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손을 내미는 상대의 호의를 애써 무시하다가 콧대가 높다는 뒷말을 듣기도 했다. 마음을 내주지 않는 아집에 발등을 찍힌 꼴이다. 정해 놓은 틀에 욱여넣으려다 스스로 굴레에 갇혔다.

이제껏 취미로 해오던 베이킹에서 주력 품목은 식빵이었다. 사각 틀에서 부풀고, 정해진 모양으로 구워져야 만족스러웠다. 살아가는 일조차 도식화한 내겐 당연한 일이었다. 칼금을 긋지 않은 바게트 반죽이 급격하게 부풀어 오르듯이 머리로만 생각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감정들이 차고 넘친다. 옆구리 터져야 쿠프 사이로 부들부들한 속살이 차오르는 것처럼 오만으로 가득한 내 삶의 덩어리에도 일침을 가할 일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먹던 바게트가 주는 여운이 길다. 누룽지처럼 바삭거리는 겉과 쌀밥처럼 촉촉한 속이 어우러지는 이중주가 모든 감각을 관통한다. 주어진 레시피에서 벗어나 고유의 힘으로 식감을 살려야 가능한 일이다. 만드는 이에 따라 특유의 모양으로 볼륨을 형성하는 쿠프가 바게트의 묘미인 것처럼 진정한 나를 찾아 성형할 일이다.

바게트를 한 입 베어 문다. 입안으로 살포시 녹아들며 내 안으로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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