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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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포구에서/황진숙

에세이향기 2024. 3. 12. 04:45

 

포구에서/황진숙

 

 

 

 

 

저문 해는 진즉 바다에 잠겼다. 등으로 치고받으며 이랑을 만드는 바닷물의 사위도 잠잠해졌다. 집어등 켜고 물살을 가로질렀을 어선들은 닻줄을 내리고 숨을 고르고 있다. 바닥에 널린 자잘한 어구와 낡은 그물에 고여 있는 허름한 하루가 느껍기만 하다.

붉은빛을 사르고 어둠이 내리자, 저 멀리 붙박이 등대에 불빛이 내걸린다. 길 잃은 숨결들 무사 귀환할 수 있도록, 하루의 끝점에 내몰린 이들이 떠돌지 않도록 좌표가 되어 주는 등대가 묵묵하다. 뒤이어 방파제를 따라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살아난다. 물빛이 바뀐 해조음이 낮아지고 부산함이 잦아든 포구가 아늑해진다.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포구를 지나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둔 수산시장으로 파고든다. 고즈넉한 포구와는 달리 왁자한 소리가 안겨 온다. 흥정 붙이는 아지매의 걸걸한 목소리, 주거니 받거니 참견하는 객의 목소리, 쉴 새 없이 철벅거리는 물소리로 생기가 넘친다.

분주한 소음과 비릿한 갯내음이 뒤섞인 채 좌판을 훑는다. 그럴듯한 어항이나 환한 불빛도 없다. 화려한 진열대도 없다. 크기가 제각각인 고무함지가 전부다. 낡고 수더분한 풍경 속엔 해풍에 내몰린 비린 생들로 술렁거린다.

벌어진 아가미로 숨 쉬고 있는 넙치, 주둥이를 내민 우럭, 꿈틀거리는 낙지, 첩첩이 쌓여있는 꽃게들이 한데 모여 복작댄다. 생의 마지막 종착지인 이곳에서 저들은 소멸의 시간을 유예 중이다. 조금 있으면 도마 위에 오르거나 스티로폼 상자에 담겨 또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는지 납작 엎드린 넙치가 침묵을 횡단하고 있다. 미늘에 걸려 여기까지 왔지만, 어차피 바닷속 밑바닥의 삶이었으니 궁색한 좌판인들 억울할 것도 없다. 컴컴한 바다 밑에서 옆줄에 의지한 채 물범을 피해 다닌 날들이 얼마이던가. 그에 비하면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쏠린 눈 위치로 가자미와 구별하려는 구경꾼들의 눈초리는 견딜만하다. 뭍사람들의 궁금증이야 침묵으로 일갈하면 그만이다.

조개와 멍게는 주인장의 속내를 아는 듯 미동도 없다. 돔을 사려는 이가 망설이자, 조개와 멍게를 덤으로 내준다. 이내 지갑이 열리고 흥정이 이루어진다.

선택된 것에 딸려가는 곁다리, 주류 아닌 비주류. 단순히 덤으로만 한 생애가 끝나면 밋밋하지 않은가. 들러리라고 맛까지 없을쏘냐. 조개는 곁다리의 설움을 끓는 물에 풀어낸다. 해장하려고 조개 국물을 들이켜다가 다시 취해도 모를 정도로 시원하게 끓어오른다. 우러나는 국물로, 쫄깃한 속살로 기어이 식탁을 평정한다. 껍데기는 가라. 멍게는 어느 시인의 시구를 외치며 우둘투둘한 껍데기를 벗어던진다. 껍데기는 껍데기일 뿐이다. 매끈한 속살로 비릿하고 알싸한 맛으로 애주가의 미각을 점령한다.

넙치 위로 지느러미 흔들며 지나던 우럭이 저울에 오른다. 무게를 달고 몸값이 결정된다. 아가미에서 피를 뽑은 다음, 목과 꼬리를 치고 살점을 저민다. 금세 상에 오른다. 방금까지 펄떡거리며 바닥을 치던 지느러미의 잔상이 뇌리에 남는다. 생이 다할 때까지 퍼덕거리다가 잠잠해지는 몸짓, 세상 한 귀퉁이가 고요해졌다. 적을 피해 암초 뒤에 몸을 숨기거나, 등지느러미에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던 나날이 도톰한 육질로 전해질 뿐. 살아온 흔적이 맹렬히 지워진다.

거친 시간을 돌고 돌아 고뇌를 달래주는 안주로, 허기 채워 주는 한 끼로 기꺼이 남은 생을 보시하는 비린 것들. 검불처럼 스러질지언정 침묵으로 몸짓으로 맛으로 치열하게 존재를 발화한다.

바닷속에서 유영하다 뭍으로 밀려온 이들이나 육지의 세찬 물살에 떠밀려 포구로 흘러든 나나 이 밤의 끝을 잡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그간 세상살이에 길들어져 적당히 살아왔다. 중량과 부피로 포장된 상품처럼 크기와 가격으로 칸칸이 나눠진 집에서 일상에 매달렸다. 하루 치를 지령받아 사는 거처럼 영혼을 박제시킨 채 그저 그런 나날로 쫓기듯 허덕였다. 한낮의 소요도 새벽의 고요도 아우르지 못하는 한 밤의 불면으로 무기력하기만 했다. 몸의 감각들과 불화하는 내면의 침묵으로 어떤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

비린 목숨붙이들이 일깨우는 생의 기척이 묵직하게 들러붙는다. 외딴섬에 유폐시킨 감각들을 뒤흔든다. 얽히고설킨 속 뜨끈하게 달래주는 조개처럼 누군가의 혀끝을 맴돌며 속내를 헤아려 본 적이 있었던가. 밥벌이에 치여 밀려나고 뒤처지는 설움 뱉어내며 온몸으로 끓어오른 적이 있었느냔 말이다. 바위나 해초에 붙어 거친 물살을 헤치느라 우둘투둘한 외피로 중무장한 멍게와 허기진 속내를 감추려 겉치레로 뒤덮인 나. 언제쯤이면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부드러운 속살처럼 순정한 자아로 거듭날 수 있으려나. 명이 다할 때까지 거친 야성으로 몸부림치는 조피볼락처럼 넓디넓은 세상에 잊히지 않는 한 장면 남길 수 있으려나.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공중으로 솟구쳐올라 바닥을 칠 수 있으려나.

가슴 속에 모여든 풍경들이 쏟아지는 달빛만큼 깊어진다. 흘러가는 시간 따라 파도 소리만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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