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4 62

못을 뽑다/권남희

못을 뽑다/권남희 벽이 갈라진다. 너무 큰 못을 벽에 겨누고 두드려 박은 것이다. 오래된 벽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새해 아침부터 못 박을 곳이 없나 벽을 바라보다 일을 냈다. 집안 곳곳에 못을 박고 뽑아낸 흔적과 새로 박은 못들이 있다. 벽은 이미 간격조정을 할 수 없을 만큼 박힌 못으로 가득 찬 느낌이지만 미처 비명 지를 틈도 주지않고 대못을 들어 박기 시작한다. 못 박히는 소리는 온 집안을 울리고 아래 위층까지 대못 치는 소리가 퍼져나간다. 망치소리는 내 팔을 따라 몸 안으로 돌아다니며 진동 하다가 머리까지 흔들기 시작한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밤 아홉시 이후에는 벽에 못을 박지 말아달라는 문구가 붙여있다. 아침이지만 잠시 숨을 고른다. 새집을 계약하고 이사했을 때 벽..

좋은 수필 2024.04.21

적과/이정경

​ 적과/이정경 사과 꽃봉오리 수줍게 올라오던 봄, 오랜만에 옛 친구들이 모였다. 모처럼 나들이라 꽃단장했지만, 어디 세월의 흔적을 얄팍한 분칠로 가릴 수 있을까. 파운데이션 위로 드러나는 주름살에서 그녀들의 지난 시간이 숨어있다. 백발이 성성하고 느슨해진 말투에서 삶의 연륜을 느낀다. 늘 동생을 업고 다녔던 친구의 등을 슬쩍 만져본다. 아직도 그녀의 빈 등에서 젖내가 묻어있는 듯하다. 세상 언저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친구들이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날이 저물도록 끝이 나지 않는다. 적과로 떨어진 과일처럼 숨을 죽이고 산 시간을 쏟아내려면 아마도 이 밤을 하얗게 새워야 할 것 같다. 엄동의 추위를 이겨낸 사과나무는 가지마다 꽃눈을 틔운다. 꽃은 액화를 제거하는 과정을 거치고 정화만 남긴다. 선택된 꽃은..

좋은 수필 2024.04.21

효목동 그 집 / 조경희

효목동 그 집 / 조경희 같은 꿈을 꾼다. 벌써 몇 번째다. 예전 효목동 쪽방에 살던 꿈이다. 단칸방에 부엌이 억지로 난 그 집, 연탄보일러 뚜껑에 온수가 돌아 나와 벽돌색 고무 통에 옮겨져 처음으로 뜨신 물을 흔전만전 쓰던 집이다. 골목어귀로 쪽문이 달렸던 그곳에서 아이 둘이랑 넷이서 누우면 딱 맞던 방 한 칸짜리 전세방이었다. 그 집에 살 때처럼 한 번만 딱 한 번만 다시 돌아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죽은 성우가 살아있었고, 지예가 아장아장 걷던 집, 사백만원짜리 단칸방 그 집이 나는 좋았다. 처음으로 우리가족만 살게도 된다는 신혼의 달콤함을 알게 해준 집이었다. 부업 한다고 밤 껍데기를 하루에 다섯 포씩 까다가 손가락이 마비되기도 했다. 밤 부업은 한철이라 봉투 접는 부업을 시작해서 매월 받던 돈은..

좋은 수필 2024.04.21

잠빚/안희옥

잠빚/안희옥 머릿속이 안개가 낀 듯 흐릿하다. 녹작지근한 의식의 끊김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썰물처럼 밀려든다. 사물의 정확한 거리나 명암도 제대로 가늠되지 않고 온몸이 몽롱해진다. 팔걸이의자 위에 올려 둔 손이 힘없이 툭 떨어진다. 중요한 사안을 의논하는 회의 중이었다. 기면증 환자처럼 나도 모르게 깜박깜박 조는 마이크로 슬립에 빠져버린 것이다. 회의록에 적혀있는 글자들이 이리저리 춤을 춘다. 정신을 차리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소용없다. 앞자리에 앉아 있다간 무슨 낭패를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잠빚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을 경우 그 시간만큼 벌충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잠을 참으면 그것이 빚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깨어있는 두 시간당..

좋은 수필 2024.04.21

그늘의 내력 / 서은영

그늘의 내력 / 서은영 그늘에 들어선다. 산책로를 덮고 펼쳐진 산그늘을 걷는다. 별스러울 것도 없지만 산이 생겨난 이래로 만들어진 깊이이니 태곳적 그늘이라 할 만하다. 등 뒤에서 언제나 나를 따르던 평생의 그림자도 어느새 산그늘이 품은 태고의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얼마나 더 걸어 들어가면 나도 저 거대한 원시의 깊이에 가닿을 수 있을까. 내게 흘러들어 나를 이룬 것 가운데 태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산기슭을 따라 둘레길이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 그늘을 품고 숲 사이로 길게 이어진다. 지난 계절도 그 이전의 세월도 쌓였는지 숲길이 짙다. 햇볕을 땅속까지 끌고 들어간 나무들이 빛을 삼킨 뒤 그 나머지를 다시 땅 위로 밀어낸 자국, 날마다 달아나는 햇살과 움켜쥐려 안달인 어둠의 중립지대, 하늘을 만..

좋은 수필 2024.04.20

조각보/피귀자

조각보/피귀자 '밀가루'로 만들면 국수이고 '밀가리'로 만들면 국시라고 운을 떼자 모두들 국수 보다는 국시가 훨씬 정겹고 구수하고 어쩐지 진국 같다고 입을 모은다. 분칠한 여인과 민낯의 수더분한 시골아낙의 조합 같다고나 할까. 뜨거운 여름날 얼갈이배추나 애호박을 숭숭 썰어 넣고 삶은 국시 한 그릇은 끝없이 줄줄 흘러내리는 땀과 함께 더위를 날리기에 충분했다. '이열치열' 더디 끓는 뚝배기 같은 그 맛은 어린 나이에는 도저히 가늠할 수도, 이해되지도 않은 맛이었다. 밀가루와 콩가루를 사대 일 정도릐 비율로 섞어 반죽을 한 동그란 덩어리가 그렇게 요술을 부릴 줄이야. 거칠어진 어머니의 두 손 밑에서 거슬하던 덩어리가 치대고 또 주무르는 경건한 시간의 의식 속에서 윤이 나고 물오른 새색시처럼 새치름해졌다. 홍..

좋은 수필 2024.04.20

개똥벌레 /고윤자

개똥벌레 /고윤자 온몸을 휘감으며 정욕의 불길이 타오른다. 그 불길에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툭툭 터지며 황홀경으로 눈을 뜬다. 일순간이나마 속내의 갈등과 고뇌까지도 연소해 버리는 불꽃이다. 숱한 남자에게 몸을 내맡겼던 그녀는 되돌아서며 말한다. 사내들이 돈벌이와 출세를 위해 땀 흘리고 인생의 가시덤불과 유혹이 쳐놓은 낚싯밥에 걸려 괴로워할 때, 자신의 인생은 그런 남정네들을 위한 삶이 아니었겠느냐고. 벌레처럼 살아 온 한세월이었지만, 어둠 속에 빛을 내는 구원의 개똥벌레이었을 순간은 행복했었노라고. 비록 손가락질 받을 인생이지만, 그 맛에 취해 자기에게 주어진 소중한 삶을 방기하고 모독했었다고 털어 놓는 그녀의 목소리에 굴곡이 인다. 그녀는 내가 약국을 하면서 알게 된 춘자라는 이름의 아가씨였다. 스무..

좋은 수필 2024.04.20

녹/이두래

녹/이두래 호미는 죽은 듯 보인다. 꼿꼿한 몸에 고개를 외로 꼬고 누워 온몸은 말라붙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다. 사람 손에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났을 호미자루는 잡으면 바스러질듯 거무죽죽하고 촘촘히 갈라졌다. 날이 부러져 버린 곡괭이 자루엔 이름 모를 버섯까지 뿌리를 내렸다. 버섯의 생장은 그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곡괭이의 야무졌던 이빨에는 여지없이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하고 그들의 죽음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였을 것이다. 낫이며 쇠스랑, 곡괭이, 호미 등 그것들은 소용되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아래채 처마 밑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맏형 격인 경운기는 아래채 소 마구간에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소출 많은 상답上沓을 갈고 추수한 곡식들 실어 나르느라 달달거리며 바빴을 경운기..

좋은 수필 2024.04.20

자장가 가수 / 이미영

자장가 가수 / 이미영 나의 자장가는 노동요였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려는지 뒤척이는 아기를 토닥여주며 부르는 사랑 겨운 노래가 아니었다. 늦은 밤 숨이 멎을 듯이 울어대는 아기를 들쳐업고 엉덩이를 두들겨 가며 부르던 억지 노래였다. 말이 통하기는커녕 목청만 돋우는 아기에게 짜증을 더해 불러주던 노래였다. 토막잠을 자다 깨다 하는 날이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기에 어떻게든 재워보겠다고 부르던 한숨 섞인 노래였다. 업었다가 다시 안았다가 팔이 저려서 더는 품에 둘 수 없을 때 작은 흔들의자에 태우고 발로 밀어 주었다. 새벽녘에도 잠 못 들고 빤히 쳐다볼 때면 멀미가 나도록 요동시켰다. 목소리는 갈라지고 더 이상 노래가 안 나올 무렵이면 아기는 버티지 못하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역정이 나서 흔들어 대는 통에..

좋은 수필 2024.04.20

정여송 수필 읽기

쉼 표 새까맣고 조그만 동그라미에 꼬리가 돋았다. 앙증맞고 분명하고 단정하면서도 꼬리 때문인지 한결 여유가 있어 보인다. 삶의 중심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었는데 처음 눈에 띄듯 경이롭다. 겉으로 보기에 초라하기만 한 작은 점 하나는 시선을 끌만한 어떤 것도 갖춘 것이 없다. 그저 화려하게 늘어선 언어들의 도우미로 분주하다. 때로는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된다. 더러는 미세하고 이슬처럼 영롱한 감성이 넘나들며 시간 속의 시간을, 시작 속의 시작을 만들어 내는 길이 된다. 본디 말이 없는 쉼표는 한 템포 늦춘 여운 속에 떨림과 보이지 않는 기운을 가지고 있다. 생각 할 수 있는 넉넉함과 쓰고도 남음이 있는 여분을 깔아 놓는다. 문장과 단어 사이 속에 몸을 숨긴 채 의미를 조절하는 주문도..

좋은 수필 2024.04.19

글 쏟아질라 / 이난호

글 쏟아질라 / 이난호 “글 쏟아질라….” 할머니는 내가 읽던 책을 펼친 채 방바닥에 엎어둔 걸 보면 살그머니 그것을 접으며 나무랐다. 나무람 끝에 으레 “책천(冊賤)이면 부천(父賤)이라던디.”라고 혼잣말을 했고 무슨 받침거리를 찾아 책을 올려놓는 손길이 공손했다. 일자무식, 평생 흙을 주무르던 그분은 낚시 바늘 모양으로 구부린 꼬챙이를 벽 귀퉁이에 걸어두고 글자가 찍힌 종이쪽을 보는 쪽쪽 거기 끼워 간직했다. 요즘 들어 자주 할머니가 생각난다. 엎어진 책에서 단박 학덕 쏟아짐을 끌어온 그 즉물적인 은유, 책을 천대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천대함이라 굳게 신앙하던 수더분한 언저리가 그립다. 필진이 도통 눈에 안 차지만 편자(編者)와 얽힌 인연이나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 월간지의 정기구독료를 낸다는 사람을 만..

좋은 수필 2024.04.19

글의 길/박 양 근

글의 길/박 양 근 사람을 만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상대가 나를 찾아오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찾아 나서는 경우다. 친구가 찾아오든, 내가 나서든 서로 만나는 기쁨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쁨의 정도가 다르다. 앉아서 기다리는 것보다 찾아 나설 때 훨씬 흐뭇한 여운을 맛본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다를 바 없다. 나는 글쓰기를 길을 나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굳이 먼 길이 아니라도 좋을 듯싶다.​ 바라기의 대상은 원근을 가리지 않으니까. 무엇을 찾느냐보다 가까이 있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더 중요하니까. 일상생활이 단조롭더라도 눈을 뜨고 찬찬히 살펴보면 경이로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그래서 길을 나서는 것이다. 간혹 바다를 찾아 나설 때가 있다. 먼 기억에서 맴..

좋은 수필 2024.04.19

보리 바람 / 김희숙

보리 바람 / 김희숙 지내들녘이 들썩이는구려. 축제를 연다기에 기다리고 있었소. 가만 보니 여인들이 며칠 전부터 분주히 오갑디다. 노란머리 콩나물은 길쭉한 몸통을 탱탱하게 삶고 갈색 금고사리는 들기름 듬뿍 부어 버무렸소. 채 썬 당근은 윤기 나는 주황빛 살려 볶아내더니 푸른 봄빛 머금은 취나물과 시금치를 무쳐 보리밥 위로 줄 세웁디다. 계란 지단까지 얹으니 고명들이 저마다의 빛깔을 뽐내는구려. 비빔 솥이 꽃수를 놓은 듯 참으로 곱소. 어른 열댓 명이 둘러서야 비벼질 양이니 오신 분들은 넉넉히 드시오. ​ 오월의 보리논이오. 초록 옷을 벗는 중이라 때깔이 썩 산뜻하진 않소. 까끄라기 수염은 더욱 뻣뻣해져 어린 아이 살갗이라도 스칠까 염려되오. 그래도 사진을 찍겠다는 사람들이 몰려오는구려. 고흐의 밀밭 그림..

좋은 수필 2024.04.17

꽃담 / 권혜민

꽃담 / 권혜민 쌍계사 경내를 거닐다가 나한전에서 선방까지 이어지는 담장 앞에 섰다. 서가에 책을 비스듬히 꽂아놓은 것 같은 담장의 기와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가운데는 깨진 백자찻잔 굽으로 장식하고 깨진 기와가 모여서 한 송이 꽃으로 피었다. 하잘것없이 깨어진 그릇이나 기와도 손잡고 어울리니 멋스러운 꽃이 된다. 찢어지고 부서져 버림받은 것들, 아프고 외로운 것들이 어울려 피워낸 꽃을 보니 가슴이 찡하다. 이 꽃은 세월이 가고 바람이 불어도 시들거나 지지도 않는다. 천천히 끼고 돌면서 내 삶을 되돌아본다. 어제 저녁 고등학교에 다니는 작은 아이 문제로 남편과 심하게 다투었다. 막내라고 오냐오냐했더니 버릇이 점점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러 번 아이에게 주의를 시키라..

좋은 수필 2024.04.16

꼭지마리 / 권혜민

꼭지마리 / 권혜민 시선이 얼어붙었다. 설렁설렁 구경하면서 가볍게 돌아다니던 걸음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동행했던 사람들은 이미 건너편 전시실로 사리지고 나 홀로 남았다. 명치에 묵직하게 통증이 얹히자 진땀이 비적거리고 배어 나온다. 대나무로 만든 생활용품을 전시해 좋은 박물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이곳 남도의 물레는 두 개의 바퀴와 둥근 테두리 사이를 대나무 쪽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몸을 이루도록 되어 있다. 어릴 때 기억을 떠올리며 지나치려는데 물레가 뽑아낸 실이 발길을 칭칭 동여매기라도 한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우리 너머로 보이는 물레의 꼭지마리에서 세상을 떠난 둘째 고모를 만났다. 둘째 고모는 자식을 낳지 못하셨다. 고모부가 장터 국밥집에서 일하던 여인을 들여, 이듬해 딸을 낳으면서 한 남자에..

좋은 수필 2024.04.16

길이 그린 지도/강수니

길이 그린 지도/강수니 내 발등엔 지도가 있다 걷기에만 바빠 못 보던 길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툭툭 불거져 발 거죽 밖으로 튀어나올 기세다 굽은 길도 펴가며 걸어 왔었는데 구비를 돌 때 마다 부풀며 휘어져있다 위기 때마다 불끈, 힘주어 일어섰던 불거진 마디들 저 아래 퍼런 시집살이 정맥이 희미하게 지나가고 자지러지는 아기 업고 숨 멎을 듯 뛰던 길 남편 상여 뒤로 발 굴리며 따라가던 깜깜한 길들이 거미줄처럼 엉켜있다 세월의 발목을 잡고 여기까지 그려진 지도는 세상의 지우개로는 지울 수도, 다시 쓸 수도 없다 그러나 길은 이어지는 것, 걸으면 또 길이 된다 여기가 종점, 발등 위는 다시 찾아 오르는 길 그래 가자! 이렇듯 걸어 왔는데 어딘들 못 가리! 다시 심장으로 되오르는 회전문 앞에..

좋은 시 2024.04.15

코다리 1 2 / 이 혜 경

코다리· 1 / 이 혜 경 단단히 코가 꿰였다. 지느러미를 바짝 붙인 코다리가 차렷 자세로 줄지어 매달렸다. 줄줄이 엮여 꾸덕꾸덕 말라가는 코다리들은 애초에 같은 운명으로 태어난 것일까? 지금은 저렇게 굳어버리고 묶인 몰골이지만 한 때는 바다향을 머금고 탱탱한 자태를 뽐내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얼음장 같은 바다를 마구 휘젓고 다니던 어린 노가리 시절에는 두려움을 몰랐을 터이다. 언제 그물에 걸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운명임을 알지 못했기에 거침없는 몸짓으로 더 낯선 곳, 더 깊은 곳을 찾아다니며 온몸으로 물살을 밀어냈을 것이다. 부쩍 덩치가 커지고 흑갈색 등에 번지르르한 기름이 돌 때는 스스로 바다의 중심이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으리라. 어느 날 어부의 그물에 걸려 처음으로 바다를 벗어난 순간, 금빛 햇..

좋은 수필 2024.04.15

내가 하나의 풍경이 되려면 / 김 애 자

내가 하나의 풍경이 되려면 / 김 애 자 지금은 봄이다. 대지는 신생하는 것들의 기운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럴 땐 강가로 나가는 것이 좋다. 이랑져 흐르는 물결 위로 굴절하는 빛의 눈부심, 볼에 와 닿는 상큼한 바람결이 다함없다. 강변에 깔린 마름 갈대들의 음률도 들을만하다. 그 어떤 악기가 겨우내 살을 깎아내고 육탈한 뼈들끼리 서로를 껴안고 부르는 조곡弔哭을 연주 할 수 있었던가. 강물이 뒤척이는 에로틱한 신음까지를. 청둥오리와 도요새들이 끼리끼리 모여 부리로 제 깃을 다듬는다. 더러는 머리를 날개 죽지에 파묻고 조는 놈도 있다. 이제 저 새들은 곧 남한강을 떠날 것이다. 나는 깍지 낀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눈을 감는다. 그러면 강변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있는 내가 보인다. 자신을 자연 속에 ..

좋은 수필 2024.04.15

성당 가는 길/ 이명지

성당 가는 길/ 이명지 "야는 그럴 아가 아이다! 성당에 다니는 아는 나쁜 짓을 안 한다" 그때 내게 족쇄 하나가 철커덕 채워졌다. '성당에 다니는 애, 그래서는 안 되는 애'가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성당이 두려워진 건 그때부터지 싶다. 엄마는 우리 마을에서 유일한 신자였다. 늘 일손이 부족한 농촌인데도 일요일이면 깨끗한 한복을 차려입고 성당엘 갔다. 그것은 파격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그런 엄마를 두고 겉멋이 들었다느니, 바람이 났다느니 말이 많았다. 심지어 그걸 허용하는 아버지를 대놓고 비난하기도 했다. 엄마는 사람들의 입방아가 신경 쓰였는지 막내인 나를 데리고 성당에 다녔다. 어린 내 눈에도 엄마는 참 고왔다. 평소에는 때 묻은 무명옷에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농사일을 하던 엄마가 성당에 가는 날이..

좋은 수필 2024.04.12

소리 풍경/허정진

소리 풍경 허정진 깊은 산속 농막에서 몇 년간 지내본 적 있었다. 산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여 전망은 그지없이 좋았지만 이웃도, TV도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사계절 내내 오직 자연의 소리밖에 없었다. 숲속 계곡물 흘러가는 소리, 바람이 여울져 휘감는 소리, 겨울 나뭇가지 뚝뚝 부러지는 소리, 지둥 치게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산장 주위를 배회하는 산짐승 소리, 멀리서 풀국새 울고 장꿩 퍼덕이는 날갯짓 소리까지 들렸다. 더 마음을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면 그들만의 낮은 주파수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꽃이 피고 지는 소리, 해토머리 나무줄기에 물오르는 소리, 겨울밤 함박눈 내리는 소리 같은 것들. 그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고요와 여유 덕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도시 소리가 그립고 궁금하..

좋은 수필 2024.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