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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벚나무를 읽는 저녁 / 최재영

에세이향기 2024. 4. 25. 09:55

 

산벚나무를 읽는 저녁  /  최재영


 
   
물에 젖기 위해
백 년을 걸어가는 나무가 있지요
퉁퉁 부르튼 맨발 사이로
세상의 저녁은 소리 없이 스며들고
다가오는 천년을 가만 응시하느라
나는 바싹 가물어 있었지요
간절함은 어디에도 기록할 수 없어
한 획씩 혈관을 파고 들어갈 때마다
산벚의 흰 그늘까지 움찔거렸겠지요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제 근원의 몸부림으로 뜨거웠을 시간들
그때의 다급한 호흡은
어떤 이의 애달픈 기록이었을까요
산벚이 거느린 골짜기들이
일제히 먹빛의 힘으로 일어서는 저녁
경판에 서려 있는 푸른 맥박 소리
온 산 가득 울려 퍼지는데
먹물보다 진한 핏빛 눈물 하얗게 쏟아지네요
오래전 생의 바깥에 등불을 밝힌 이들은
지금도 구국의 화엄을 새기고 있을까요
봄이면 경판 속의 활자들 환하게 피고 지고
짜디짠 소금기 허옇게 일어서는지
골짜기마다 산벚나무는 절뚝이며 피어나요
팔만의 꽃잎들이 봄의 한복판을 걷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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