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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항 근황 / 고창환

에세이향기 2024. 4. 29. 14:43

대포항 근황 / 고창환

 

 

청봉보다 높은 파도가 허리를 편다

발이 묶인 목선이 목을 빼고 바라보는

설악은 가을비에 맨몸으로 잠겨 있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 정박중인 갈매기들이

저녁 하늘에 부리를 꽂고

끼룩끼룩 부푼 모험담을 풀어놓는데

횟집 좌판에서 비린 바람이 뼈째 썰린다

여기 퍼질러 앉아 쥐치나 씹으며

막소주 한 사발에 취해볼거나

할말이 많은 듯 입술을 들썩이는

불빛 몇 개가 바다로 떨어진다

막무가내 파도는 삼킬 것을 찾아

빗발에 젖은 목젖을 세우지만

오늘은 횟감처럼 가련한 삶에 지친

사람들이 모여드는 대포항 저물 무렵

청봉은 말없이 뿌리까지 젖는다

빗발은 미시령에서 폭설로 차오르고

희뿌연 늦가을 설악이 지워질 듯

어둠이 바다에서 느리게 걸어온다

이제 산길 뱃길 모든 소식이 끊기고 나면

모두가 한 마리 갈매기를 꿈꾸며

얼큰해진 날개라도 구깃구깃 펼 것인가

청봉이 취하고 바다가 취하고 만취한 대포항이

건들건들 파도에 흔들릴 때까지

퍼질러 앉아 길 뚫릴 날이나 기다릴거나

설악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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