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발표작 48

반죽/황진숙

반죽/황 진 숙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희망에 부풀고 절망에 주저앉으면서도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한다. 인연의 고리 만들기가 어디 쉽더냐. 뭉치고 치대고 끊어지며 나름의 결을 만들어 가는 것, 하나의 숨구멍으로 호흡하는 살갗을 만들어가는 것. 이해관계를 셈하지 않고 온 가슴으로 서로를 받아들여야 함이다. 풀어질 수 없는 끈끈함과 퍼질 수 없는 찰기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일 테다. 온전히 하나 됨만이 농익은 맛을 낼 수 있다. 웃자란 풀이 풋내를 풍기듯 미숙함은 풋맛을 주고 지나침은 신맛을 낸다. 수백 겹의 인내심으로 이루어진 파이의 결들이 내뱉는 향에 환호하고 촉촉한 식빵이 주는 담백함에 젖어 들지니.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겹겹의 밀푀유를 만들듯이 치열하게 치댄 시간만이 우리가 지닌 오묘한 매력을 발산..

발표작 2021.05.02

종이컵/황진숙

종이컵/황 진 숙 내 입술과 네 입술이 맞닿는다. 딱딱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보드라운 감촉이 좋다. 네 입술을 타고 넘어오는 촉촉함에 가슴 속이 차오르고, 주저리주저리 말하지 않아도 전해오는 온기에 따스해진다. 네 도톰한 입술과 밍밍한 몸이 너와 나를 잇대어준다. 스며드는 커피의 향긋함과 달달함은 세상사에 부딪친 모난 마음을 위로해 준다. 손끝을 감도는 가벼움은 버거운 일상의 무거움을 어루만진다. 시간의 무게를 견디는 밀도는 성찰의 결과인가. 원형의 심상인가. 알량한 자존심으로 움켜쥐고 패대기치려 할 때 여리지만 탄탄함으로 버티는 너. 습기에 휘둘려 눅눅해지고 구겨질지언정 감내하는 깜냥은 우직하다. 손안에 밀착되는 찬기와 온기의 생생함에 무기력한 순간들은 환기되고 격정의 소용돌이는 가라앉는다. 무수한 사고..

발표작 2021.05.02

낙죽장도(烙竹長刀)/황진숙

낙죽장도(烙竹長刀) 황 진 숙 적열의 무게를 견딘다. 인두 끝의 불꽃이 마디의 몸피를 뚫는다. 한 자 한 자 새겨지는 날카로움이 온 몸을 관통한다. 그을리며 타들어가는 고통을 그 누가 알랴. 숨이라도 쉴 수 있을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대나무는 미동도 없이 제 몸을 내어준다. 낙죽장도는 손잡이와 칼집이 대나무로 만들어졌다. 불에 달군 인두로 대나무 거죽 위에 사상이나 신념을 새겨 넣은 칼이다. 보석으로 장식하거나 도금을 입힌 칼처럼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바이킹의 울프베르흐트검, 사무라이들의 대도, 징기스칸의 만도 등 세상의 칼들이 밖을 향해 날을 세웠다면 두 뼘 남짓한 길이의 장도는 나를 향해 날을 벼린다. 책을 가까이 한 옛 선비들이 몸을 지키기 위해 마음결을 다스리기 위해 만든 자기성찰의 칼이다..

발표작 2021.05.01

식빵/황진숙

식빵/황 진 숙 “타닥, 타다닥” 크러스트가 터진다. 파열음이 경쾌하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충분히 부풀어 올라서일까. 오븐에서 나와 세상을 만나는 소리가 선선하다. 노릇하게 구워진 껍질과 결대로 찢어지는 속결이 부드럽다. 단련된 시간에서 나오는 유연함으로 말랑거린다. 온몸으로 받아낸 소용돌이 끝에 찾아온 구수함이 사방으로 풀어진다. 그 내음에 들뜬 마음이 가라앉는다. 한 덩이의 빵이 머금은 평온에 푸근해진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지만 모든 게 담긴 빵이 식빵이다. 앙금을 들이거나 토핑을 두르지 않아 담백하다. 무명옷을 걸친 듯 수수하다. 가장자리는 떼어지고 토스트나 샌드위치로 개명당해도 속없이 하얗기만 하다. 빵가루가 되어 형체 없이 날려도 매인 데 없이 맑다. 달달하거나 농밀하지도 않다. 맹물같이 ..

발표작 2021.05.01

열애 중/황진숙

열애 중/황진숙 엊저녁에는 새벽 3시까지 같이 있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나로서는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이불 속까지 따라 들어오려는 그를 말리느라 진이 다 빠졌다. 필시 내일 다크서클이 턱 밑에까지 내려와 몰골이 말이 아닐 것이다. 요즘 들어 그의 앙탈이 늘었다. 당신 체면이 있지, 왜 이리 야단이냐고 짜증을 부려도 나밖에 없다며 속닥거린다. 한 옥타브 올려 다그쳐도 끔벅끔벅 앉아 있기만 하니 되레 미안해진다. 누군가는 말한다. 행복에 겨운 소리라고. 물론, 일 년에 한 번 은하수 강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견우와 직녀에 비하면 어느 때고 볼 수 있는 우리는 행복일 수 있다. 번잡스러운 하루에 지쳤거나 관계가 주는 피로에 우울이 바닥을 치면 슬며시 그가 내 옆으로 온다. 모과 향기 그득한 ..

발표작 2021.05.01

숯2/황진숙

숯2/황 진 숙 운명의 짐을 졌다. 시커멓게 과거를 지우고 뉘 집에 유배되었다. 나무에서 숯으로 바뀐 신세를 항변할 새도 없이 잿불에 파묻힌다. 가문을 지키며 불씨를 잇는 계율은 지엄하다. 그을음과 연기로 미적대지 않는다. 불티를 날리며 요란을 떨지 않는다. 그저 소리 없이 뭉근하게 타오른다. 살풀이하듯 발갛게 일렁인다. 밤새 가물거리며 화로의 불씨를 품느라 어둠살이 밝아오는 줄도 모른다. 몸 안의 길을 따라 저장해 놓은 한 톨의 비, 한 가닥의 바람, 한 점의 햇살마저 날려 버렸으니 한가로이 풍화에 들면 그만이다. 텅 비어 구멍투성이인 몸뚱이로 무얼 어쩌랴. 난데없이 어두운 구석에 처박혀 묵은내를 들이마신다. 장독에 들어앉아 불순물을 흡착하느라 뒤척일 수 없다. 잡귀를 물리치는 문지기로 내몰려 문간의 ..

발표작 2021.05.01

숯/황진숙

숯/황진숙 짙은 녹음의 싱그러움도 없다. 타는 듯 붉은 낙엽의 열정도 없다. 꽃숭어리의 향기로움은 더더욱 아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묵직함이 있다. 운명을 절감한 생생함이 있다. 온 세상을 품은 담대함이다. 질박한 옹기 수반 위에 우뚝 서 있는 숯. 그의 자태는 현란한 언어보다 내재돼 있는 언어의 표현으로 완성된다. 제 살이 잘려 나간 아픔이여서일까. 절단된 단면 위로 내비치는 깜장의 숨결이 아릿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태고시절 나무들의 어우러지는 소리가 벌어진 결 사이로 들려온다.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산천초목의 화음을 들으며 나날이 무르익어가는 미래를 꿈꿨을 참나무의 소망. 평범한 나이테를 가지고 무탈한 생의 소원을 빌었을 나무들의 노래. 불시에 가마에 들어가 숯의 운명이 된 그는 앵돌아진 맘을 자신의 ..

발표작 2021.05.01

풀무/황진숙

풀무/황 진 숙 풀무를 돌린다. 쇠바퀴가 삐걱대며 돌기 시작한다. 지나온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는가 보다. 푸르죽죽한 이끼로 뒤덮인 기억들이 바퀴를 타고 돈다. 프레임으로 돌아가는 흑백영화가 되어 과거의 소리를 들려준다. 봉창을 통해 흐르는 별빛과 달빛 소리, 타오르는 장작불 소리, 김을 올리는 가마솥의 하품소리, 부지깽이로 장단 맞추는 소리가 설핏 풀무에게서 들린다. 별스러울 것 없이 빙그르르 이는 소리에 마음이 하뭇해진다. 가슴에서 내놓는 한줄기 바람으로 한 때는 호시절을 누렸을 풀무. 무쇠로 만들어졌으니 몸태의 질감은 무겁고 거칠다. 허나 속은 텅 빈 채, 가슴에 바람개비 하나 달고 바삐 돌아간다. 바람을 보내기 위해 얼마나 아파해야 했을까. 터져 나오는 한숨마저 어둠으로 가려..

발표작 2021.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