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발표작 48

쳇다리/황진숙

쳇다리/황진숙 정지문을 연다. 볕살 몇 조각이 고개를 들이민다. 어두컴컴한 시야에 들어오는 부뚜막이 휑뎅그렁하다. 터줏대감인 가마솥이 퇴물 취급을 받으며 고물상에 팔려 간 지 오래다. 이빨 빠진 잇몸처럼 돌아오지 못할 짝을 기다리는 아궁이가 스산하다. 종지를 놓아두던 살강이며 찬장이 사라진 곳에 쌓인 먼지와 처진 거미줄로 이미 부엌은 풍화에 들었다. 그을음이 까맣게 내려앉은 흙벽마저 기울고 있어 한때는 이곳이 부엌이었다는 기억조차 사라지려나 보다. 밥물이 끓어 넘치는 소리, 타닥거리는 장작불 소리, 도마질 소리를 떠올리기가 왠지 객쩍어진다. 서늘한 기운에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낯익은 기물이 눈에 들어온다. 기력이 다한 듯 한쪽 귀퉁이에 기대어 있는 쳇다리다. 사시랑이 몸으로 천장에서 떨어지는 흙 부스러기..

발표작 2021.08.04

트랙을 돌며/황진숙

트랙을 돌며/황진숙 트랙을 돈다. 어슴푸레한 빛이 발등에 내려앉는다. 하루를 완성하기엔 아직 몇 시간의 여유가 남아 있다. 한낮의 소요를 다독이며 뒤덮는 땅거미가 아늑하다. 새벽녘이 돋쳐 오르며 부산하다면 잦아드는 저물녘은 느슨하다. 등을 떠밀며 채근하는 대신, 소리 없이 깃들어 탕진한 하루를 쓸어준다. 땅이 풀리는 춘삼월이어서일까. 코끝에 흘러드는 냇내가 삽상하다. 조금 있으면 당도할 봄기운이 만연체로 파고든다. 쇠락하는 겨울과 솟아나는 봄이 걸쳐 놓은 적요 속으로 걷는다. 들릴 듯 말 듯 한 발걸음 소리가 뒤따른다. 앞으로 옆으로 뒤로 걸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은 무중력 상태다. 혼자 걸어도 둘이 걸어도 좋을,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는 평지가 가뿐하다. 어스름이 깊어지자 경기장을 둘러싼 조명에 불이 ..

발표작 2021.06.10

호위무사 / 황진숙

호위무사/황진숙 낮달이 이울자 그림자가 물러갔다. 호위하던 무사들이 하나둘 처소에 든다. 내걸린 문패도 알전구도 없는 칸막이 거처에 발걸음을 부린다. 길 위를 점령한 된바람이 따라 들어와 무사들을 사열한다. 양털에 뒤덮인 어그 부츠가 회상에 젖어 있다. 폭설이 내린 지난겨울, 눈 속을 뒹굴며 만끽했던 환희의 순간을 되새김질 중이다. 동면에 들었던 샌들이 슬며시 눈을 뜬다. 서늘한 기운이 달려들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라는 듯 몸을 웅크린다. 하루를 견뎌온 흔적들은 어둠을 타고 밀려온다. 접힌 시간으로 뒤축이 무너진 운동화는 뻣뻣한 힘을 놓아버린 지 오래다. 끈까지 풀어 헤친 채 맥을 못 춘다. 쉰내 나도록 길을 누빈 구두는 연신 잠꼬대다. 돌부리에 걷어차인 비애로 꿈속을 헤매나 보다...

발표작 2021.06.05

홍조/황진숙

홍조/황진숙 반란이다. 소리소문 없이 출몰한다. 가끔 기별은 있었지만 설마 별일이야 있을까. 예고도 없이 야밤에 들이닥쳤다. 붉어지는 얼굴을 보며 자고 나면 괜찮겠지. 며칠 있으면 가라앉으려니 했다. 날이 갈수록 기세를 더한다. 얼굴에서 가슴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벌겋게 데운다. 따갑고 화끈거린다. 내 숨통을 틀어쥐고 숨 쉴 적마다 콧구멍으로 입으로 뜨거운 김을 쏟아낸다. 작정하고 열을 내며 달려드니 속수무책이다. 물기란 물기는 모조리 빨아들이며 사막화시킨다. 가뭄의 논바닥처럼 균열을 일으킨다. 내 천(川) 자 주름, 팔자주름, 삼 주름 등 고인 주름은 모두 저리 가라며 새로운 골을 긋는다. 턱에 볼에 이마에 뾰루지를 올리며 철퍼덕 자리 깔고 누워 버린다. 오만 성깔을 부리는 홍조를 달래기 위해 진정팩으로..

발표작 2021.05.06

아버지와 자전거/황진숙

아버지와 자전거/황진숙 “아버지, 내일 제가 모시러 갈게요.” “됐다. 번거롭다. 오지 마라.” 입원 중이던 아버지가 퇴원한다.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와 부딪쳐 다리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었다. 다리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었다. 긴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를 모셔다 드리기 위해 전화했다. 통화는 늘 단답형이다. 짧게 끝난다. 자식들이 걱정할까 싶어 당신 말씀만 하고 끊는다. 다음날, 직장에 휴가를 내고 병원에 갔다. 차를 주차하고 병원 로비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이미 짐을 꾸려 휠체어를 타고 나와 있었다. 이제 일흔인데 아흔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굽은 등이 눈에 띄었다. 고된 농사일과 삶의 이런저런 굴곡으로 꼿꼿하던 허리는 구부정해졌다. 백발의 머리가 수척..

발표작 2021.05.06

나무 도마/황진숙

나무 도마/황진숙 동토의 찬기로 단단하게 자랐을까. 산비탈의 바람으로 광활하게 커 나갔을까. 직선으로 흐르다가 곡선으로 물결치는 나뭇결이 옹골지다. 쇄골만 남은 노거수의 심지마냥 공고하다. 세상을 돌아 나온 듯 붉은 빛깔이 묵직하다. 한 생을 그어놓은 목리 위에 또 다른 생을 써 내려가는 도마. 솔수펑이에서 건너왔을 터이다. 운명선처럼 뻗은 결 따라가면 흙속에 파묻힌 홀씨 하나 만날 것만 같다. 수없이 오가는 계절 속에서 어딘가에 박혀 있었을 씨앗이 눈을 뜬다. 봄볕 한줄기에 깨금발 들고 꽃바람에 고개를 내민다. 파고드는 바람의 귀엣말에 움싹을 틔운다. 소쩍새 우는 소리로 허공이 낭창거리면 흥에 겨워 키를 늘린다. 초록길을 따라 이파리를 달고 꽃을 피우며 도란거린다. 세월이 가고 덩치를 키우며 흔들리기 ..

발표작 2021.05.06

밭/황진숙

밭/황진숙 밭에 섰다.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밭들. 다랑이 밭 같다. 산기슭 제법 깊숙이 위치한 밭이지만 어김없이 봄은 여기에도 찾아오고 있다. 굳었던 땅들은 부드러워지면서 숨구멍을 연다. 숨구멍 사이를 스치는 흙 내음이 진하다. 그 내음에 대지의 감각들은 자리를 털며 기지개를 켠다. 밭고랑에서 움튼 풀씨들의 얼굴이 해맑다. 척박했던 땅 속에서 시린 계절을 보내고 수런수런 올라온 그들의 생명력에 감탄한다. 봄바람이 휘감아 전해준 청명함에 묵묵했던 밭도 한결 온화해진다. 밭의 품이 넉넉함으로 푸근하다. 그 모습이 아버지의 품과 같이 따사롭다. 모아 놓은 고춧대 옆으로 희멀건 돌멩이 하나가 보인다. 나직이 소리가 난다. 소리를 따라 밭둑을 걷는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저만치 모로 움푹 팬 발자국 하나가 있..

발표작 2021.05.04

등/황진숙

등/황진숙 소리 한 톨 심을 수 없다. 손짓 발짓 한 번 내두를 수 없는 불모지다. 발화하지 못하는 언어가 쌓이고 살아온 동선이 퇴적된 음지다. 등줄기의 음영이 드리워진 적막한 그곳. 궁굴리지 못한 이력이 박히지만 핏줄과 힘줄처럼 도드라지지 않는다. 휘젓고 내저을 수 있는 손과 발의 자유에 비해 등은 직립의 운명에 포박되어 있다. 기둥 노릇을 하는 척추가 있어 일생을 곧추세운다. 휘어지고 틀어져서라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바로 선다. 떠밀리고 나동그라져도 충격을 흡수하며 소명을 다한다. 떠받들어야 하는 천형으로 몸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 목이 지탱하지 못해 넘어오는 머리의 무게는 온전히 등의 몫이다. 기우는 어깨를 지지하는 것도 등이다. 들거나 안을 수 없는 짐은 등이 짊어지고 걸머진다. 해가 이울 때까지..

발표작 2021.05.03

초록에 들다/황진숙

초록에 들다/황 진 숙 더는 갈 수 없고 더 이상 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목을 끌어 압도하지도 뒤쳐져 순종하지도 않는다. 황과 청의 따스함과 차가움을 동등하게 품어 온화하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미완을 완성시키고 충만에 도달하는 색, 초록이다. 바닥을 기는 이끼에서부터 치솟은 나무의 잎사귀까지 초록은 어디에나 있다. 햇볕이 내리쬐는 해변에서 숲이 되고 편안한 보법을 위해 잔디가 되어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비상구의 불빛이 되어준다. 사람의 몸에도 초록이 들어 있다. 푸른 혈액이라 불리는 엽록소는 인체에 들어와 혈색소를 만든다. 엽록소의 마그네슘이 철분으로 바뀌어 혈액이 된다. 온몸을 돌고 돌게 만드는 귀한 색이 초록이다. 초록을 거닐다 보면 고요해져 마음이 열린다. 수피를 뚫고 나오는 새순의 연..

발표작 2021.05.02

조피볼락/황진숙

조피볼락/황진숙 고동치는 심장으로 튀어 올라 허공을 후려칠 기세다. 날카롭게 세워진 등지느러미에 찔린 듯 아려온다. 부릅뜬 눈은 소멸한 시간을 타고 되돌아온 듯 생동감이 흘러넘친다. 육신은 사라졌지만 어탁이 되어 쏟아내는 어기찬 기운이 액자가 걸린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두꺼운 입술과 부리부리한 눈망울의 우직한 영혼이 내 안을 들이민다. 조피볼락은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았다. 갈치의 은빛처럼 화려하거나 눈에 띄지도 않는다. 아귀나 물메기처럼 못생김의 끝판왕은 아니고 쑤기미와 삼세기보단 준수하다. 우럭 똥새기 우레기라 불리는 촌스러운 별칭이 생김새를 낮잡아 보이게까지 한다. 수박 향이 감도는 은어의 귀티나 가슴지느러미를 펼치고 날아오르는 날치의 영민함에 비해 내세울 게 없다. 닮은꼴로 통하는 꺽지가 수시..

발표작 2021.05.02

그것은 바람이었다/황진숙

그것은 바람이었다/황진숙 천만년을 돌고 돌아 불어오는, 그것은 바람이었다. 하늘빛 달빛 별빛에 부비고 구름을 덮으며 바람이 온다. 숲을 나는 새들의 날갯죽지에 붙어 산등성이를 에돌아 바위 위의 이끼를 훑는다. 개울가를 따라 찰방거리는 조약돌과 뒹굴고 나무구멍을 드나들며 저 너머 세상사를 실어 나른다. 물빛 젖은 몽돌에 스치고 갯벌에 엎드려 사는 식물을 들추며 파도를 넘나든다. 옹달샘의 탱자나무 가시에도, 넝쿨에 꿰어져 처마 밑에 매달린 곶감에도, 축담 한 켠의 청둥호박에도 바람이 파고든다. 기다리는 이에게 다가서고 흘러드는, 그것은 바람이었다. 들판에 핀 억새가 기대어 울 바람을 기다리듯, 바람꽃이 흔들리며 맞서기 위해 바람을 기다리듯. 거미에게 거미줄을 날려줄 실바람이, 염부에게 소금꽃을 피워줄 갯바람..

발표작 2021.05.02

감/황진숙

감/황 진 숙 어둠을 드리운 장막을 들춘다. 음습한 기운이 끼쳐온다. 가지에 매달려 익어가지 못한 억울함에 신열로 들끓고 있는 걸까. 떫은 맛 뱉어낼 때까지 아무도 건져주지 않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걸까. 좌정한 독 안에 들어앉아 밑바닥의 시간을 세고 있는 감이 있다. 누가 오는지도 모른 채 잎사귀 뒤집어쓰고 요지부동이다. 낮달과 밤달 아래 한 줌의 볕살 들이고 한 모숨의 바람 모아둔 몸이다. 시푸르뎅뎅할 때부터 주황빛 물들 때까지 온몸으로 껴안고 있던 탄닌이었다. 다녀간 천둥과 번개로 속에서 불길이 일고 후려치는 소낙비에 두들겨 맞을 때도 놓지 않고 붙잡고 있던 억센 기운이었다. 떫은맛 빼자고 소금물에 몸을 담근 절박함이 까슬하다. 하루 분의 삶을 감당하기 위해 침몰했지만 해가 지는지 동이 트는지 알 ..

발표작 2021.05.02

케이크/황진숙

케이크/황진숙 초콜릿처럼 단단하게 코팅된 달콤함이 아니다. 흑당처럼 질척거리며 흘러내리는 달달함도 아니다. 미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차가운 아이스크림의 단맛도 아니다. 한 스푼 한 조각으로도 겹겹이 쌓아 놓은 다디단 맛을 전한다. 바람을 타듯 폭신하게 넘어오는 감촉은 순하다. 보드라운 식감이 마음을 달뜨게 한다. 단조롭고 느슨한 일상을 감미롭게 끌어들인다. 크래커처럼 물기 없이 바삭거리는 날, 파이처럼 결 따라 부서지는 날엔 혀끝에서 녹는 생크림이 제격이다. 살포시 밀려드는 첫입이 마음을 달래준다. 행복에 감응하기 위해 고요한 섬 하나를 쌓기로 한다. 케이크는 켜를 쌓는 일이다. 시트와 생크림이 허물없이 층을 이루고 토핑이 얹어지는 앙상블이다. 아다지오의 선율로 부드럽게 어우러지지만 만드는 과정은 까다롭다..

발표작 2021.05.02

칼날/황진숙

칼날/황진숙 칼날은 자신의 날카로움을 알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오직 날을 쥐고 있는 자이다. 날은 자신의 호흡을 따르지 않는 휘두름에 가차 없이 생채기를 낸다. 어눌한 손놀림에 베인 상처를 붙잡고 쓰린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날의 냉정함을 깨닫곤 한다. 차가운 감촉, 부러지지 않는 냉철함, 섬뜩하리만치 내리쳐대는 휘두름. 칼날로 말할 것 같으면 비정함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날은 늘 서 있어야만 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갈고 닦아 날을 세워놔야 한다. 내비치는 은빛 아우라가 있어야 세상의 시선을 한눈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건 가면을 쓴 칼날의 모습이다. 숨겨진 모습은 온통 허점투성이다. 그리도 빛나는 날로 제 모습을 무장했지만 날은 홀로 설 수 없다는 치명적..

발표작 2021.05.02

돌절구/황진숙

돌절구/황진숙 달빛이 들어온다. 동그랗게 모아진 빛이 온 우주의 기운을 담은 듯 고아하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수천 년 전부터 사용해 온 기물의 자취가 시간을 물들인다. 달빛에 풍덩 빠진 집게벌레만이 고즈넉한 여운에 잠긴다. 장독대 옆에서 긴 세월을 이고 앉은 돌절구. 포효하며 요동치는 암장의 담금질로 얻은 돌의 단단함 때문인가. 땅속 깊은 어둠 속에서 고행을 통해 얻은 태초의 생명력이어서일까. 과거와 현재를 품고 미래를 이어가는 돌의 영속성이 절구의 침묵을 깨운다. 불어오는 명주바람에 노구의 심장소리가 실린다. 구슬땀을 흘리며 돌을 쪼아대던 이름 모를 석수장이의 숨소리도 들려온다. 억겁의 세월을 새긴 채 잠들어 있던 화강석은 석공의 발자국 소리에 눈을 뜬다. 땅 속에 파묻혀 세상을 떠받치고 있던 무한한 ..

발표작 2021.05.02

볍씨/황진숙

볍씨/황진숙 한 톨의 낟알이 숨을 고르고 있다. 수천 년이 응축된 깊고 고요한 숨이다. 숨 속에서 담지된 여러 겹의 시간이 허공을 감싸며 일렁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벗어난 탓일까. 묵연한 자태가 풀어놓은 절대고요에 사방이 말간 빛깔로 물들어간다. 저토록 작디작은 몸 안에 생명을 궁굴려 문명을 잉태했다니. 거친 수피를 몸에 두른 것도 아니고 질긴 뿌리도 없이 세상을 읽어낸 씨앗의 몸짓이 담담하다. 타원체에 깃든 볍씨의 생명살이가 웅숭깊기만 하다. 씨앗의 희망을 찾아 나선 길이다. 신석기 시대의 비밀을 간직한 고양가와지볍씨 박물관이다. 오천 년 전에 태동한 볍씨의 체온이 살아 있는 곳. 가녀린 껍질에 햇살과 바람의 숨을 들여 맥박을 일으킨 알곡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 영혼 가진 모든 이에게 충만함을 주..

발표작 2021.05.02

옷핀/황진숙

옷핀/황진숙 청빈한 빈자다. 덮개 하나 둘러쓰고 처처를 유랑한다. 바깥세상에서 득세하는 실과 바늘을 비껴나다 보니 거처라 부를 만한 곳이 없다. 잡동사니 가득한 서랍에 세 들어 살거나 토굴같이 캄캄한 곳에 칩거한다. 머지않아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들과 엉켜 굴러다니기도 한다. 곁방살이라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외따로이 있다 보니 겹겹이 쌓아놓은 클립이나 압정 무더기보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삼베 홑청처럼 가벼워 기억의 회로에서 곧잘 이탈한다. 세상사에 무심하게 돌아앉아 있는 옷핀이 초연하다. 실과 바늘처럼 이룰 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추와 단춧구멍처럼 정해진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색찬란하게 피워낼 꽃도 야무지게 잠가놓을 한 자락 꿈도 없다. 걸쇠에 눌러둔 침으로 흐트러진 세상을 평정한다. 엿..

발표작 2021.05.02

옹기시루/황진숙

옹기 시루/황 진 숙 저라고 그리 생긴 게 좋기나 할까. 편평한 바닥과 넓은 아가리로 마냥 품고 싶었겠지. 동이 안의 물이 탐이 나 빗물을 받아 보기도 하였다. 가둬 둘 새 없이 빠져 나가버리는 물이 허허로웠다. 가려주는 뚜껑 없이 구멍 난 바닥은 매나니의 삶이었다. 장독처럼 맛을 품는 건 언강생심이다. 술을 담아 논과 밭을 돌며 유유자적하는 자라병이 부럽기도 했을 터이다. 등에 업혀 다니는 허벅의 팔자는 단연 상팔자다. 여인네의 손길로 말간 얼굴을 되찾는 항아리를 바라만 봐야 했다. 함치르르 윤기 흐르는 단지들의 진열로 시루는 댕그라니 구석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장독대에 옹기 시루가 하나 있다. 땅을 향해 엎어져서 붙박이가 되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시루에는 가랑잎과 거미줄이 한가로이 바람을 타..

발표작 2021.05.02

감자/황진숙

감자 /황 진 숙 빗줄기가 긋고 간 뒤란은 흥성스럽다. 넝쿨에 매달린 호박에 살이 오르고 발밑에 달개비와 제비꽃의 수다가 왁자하다. 한나절 한가했던 감나무는 빗물을 한 움큼 떨구며 기지개를 켠다. 불어오는 바람은 작달비가 뿌리고 간 내음을 코끝에 묻혀 놓고 달아난다. 풀냄새, 이끼냄새, 흙냄새가 뒤뜰을 들썩거리며 생동한다. 삽상한 기운과 달리 어디선가 쿰쿰한 냄새가 흘러나온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물가 한 쪽 구석에 있는 항아리가 눈에 뜬다. 해마다 하지 끝에 어머니가 녹말을 길어 올리기 위해 감자들을 모아놓은 독이다. 수확한 감자들 중에 불량감자를 골라 썩히고 있는 중이다. 어머니는 무엇이든 버리는 법이 없다. 호미 날에 찍힌 감자, 굼벵이가 파먹은 감자, 빗물에 옆구리가 곯은 감자, 돌에 치여 찌그러진..

발표작 2021.05.02

무/황진숙

무/황 진 숙 보이지 않는 마음 한 자락을 꽃 피운다. 잡다함을 지우고 민낯으로 몰입되어 있는 진지함이다. 마음자리에서 길어 올린 사유가 단단한 몸을 뚫고 나오기까지 얼마나 몰두해 있었던 걸까. 결가부좌를 튼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무가 있다. 시골에서 올라온 무는 낯을 틀 새도 없이 베란다 구석에 방치됐다. 침묵이 살에 스며들고 적막이 몸피를 감싸자 무는 새순을 틔웠다. 한 모금의 햇볕도 없는 곳에서 무는 제 몸을 뿌리 삼아 싹을 밀어 올렸다. 관심 가져주는 이 없이 홀로 핀 싹은 여기가 제 집이라도 되는 양 낭창한 기운을 내비쳤다. 너른 밭의 배경이 됐던 지난날의 평화로움이나 계절의 기운을 새기며 열매 맺기를 기대했던 간절함이 연둣빛 줄기가 되어 한 잎 한 잎 잎사귀를 돋았다. 얼마 후 베란다에서 연보..

발표작 2021.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