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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에세이향기 2024. 3. 26. 09:21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익은 집들이 서 있던 자리에       

새로운 길이 뚫리고, 누군가 가꾸어 둔       

열무밭의 어린 풋것들만       

까치발을 들고 봄볕을 쬐고 있다       

지붕은 두터운 먼지를 눌러 쓰고       

지붕아래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떠난 자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있는       

오래된 우물만 스스로 제 수위를 줄여 나갔다       

붉은 페인트로 철거 날짜가 적힌       

금간 담벼락으로 메마른 슬픔이 타고 오르면       

기억의 일부가 빠져 나가버린 이 골목에는       

먼지 앉은 저녁 햇살이 낮게 지나간다       

넓혀진 길의 폭만큼       

삶의 자리를 양보해 주었지만       

포크레인은 무르익기 시작한 봄을       

 몇 시간만에 잘게 부수어 버렸다       

지붕 위에 혼자 남아있던 검은 얼굴의 폐타이어가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공연히 헛 돌리고       

타워 크레인에 걸려있던 햇살이       

누구의 집이었던       

쓸쓸한 마당 한 귀퉁이에 툭 떨어지면       

윗채가 뜯긴 자리에       

무성한 푸성귀처럼 어둠이 자라나고       

등뒤에서는 해가 지는지       

신도시에 서있는       

건물 유리창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2002년 경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새벽 강구항 / 이영옥

 

 

강구항에는 그날 따라 해가 뜨지 않았다
골목 안에 숨어 있던 겨울 바람만이
받침 떨어진 여인숙 간판을 할퀴며 지나갔고
그때마다 낡은 간판 불은 정신을 놓아버렸다
강구항의 불빛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것은 내가 먼 곳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항구에는
장기 숙박하고 있는 눅눅한 바람만이
여인숙 창문을 들락거렸고
털실 뭉치같은 안개에서도 비린내가 났다
커다란 전구를 매단 통발선 한 척이
색색의 깃발을 꽂고 항구로 들어왔다
잠을 못 잔 선주의 눈알만 붉어져 있었고
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내 삶을 건져보기 위해
먼 바다에 나가 통발 한번 힘껏 던져두지 못했다
이곳에 와서도, 강해지거나 무디어지지 않고
몸을 녹이려고 낯선 방에 들어섰다
형광등 불빛이 빤히 내 감정을 들여다본다
접혀 있던 군용 담요를 펼치자
젊음을 탕진해버린 노름꾼 같은 야윈 화투짝들이
아직 냉기 돌고 있는 내 삶의 웃목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밖으로 나가자 어둠이 물러선 자리에 늙은 선주가 서있고
주름이 깊게 패인 그가 빈배로 돌아왔다며
묻지도 않은 말에 스스로 대답했다
나는 침묵에 길들여진 넙치처럼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멀찌감치 쭈그리고 앉아 아침해를 기다렸다

 

 

 

 

 

삼나무 떼 / 이영옥

 

 

한때 모든 길들은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삼나무 떼들이 떠나려는 길의 양켠을 붙들고 있었다
뜬금없이 머리채 잡힌 삼나무 사이로
바람의 일행들이 절뚝거리며 지나갔다
술 취한 아버지가 삼나무 옆구리에 자전거를 박았다
큰언니가 가방을 꾸려 객지로 떠나던 날
내 안에서 우는 마른 바람소리를 들었다
흔들고 있던 손바닥이 삼나무 잎처럼 버석거렸다
떼를 지어 막아도 잡을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것은 모두 한때라고
나는 우두커니 서서 흘러가는 것들을 지켜보았다
삼나무들은 그림자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키를 줄였다 늘이면서 제 외로움을 견디고 있었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소식 없던 작은언니 꿈을 꾸었다
삼나무는 밤새 한 뼘이나 키를 더 키웠다
세상의 바람이 다 불어간 다음에는
곤두세우고 있던 검은 머리채를
삼나무는 어디로 둘 건지 궁금했다
하루에 두 번 완행버스가 지나가면
변함없이 온몸을 일으켜 달려가는 것은 흙먼지뿐이었다
흘러간 것들은 망가져 돌아오거나 아예 오지 않았다
늘 떠나기만 하던 길들도 가끔 다리쉼을 했다
그때마다 삼나무 떼들은
평생을 키워온 짙은 그늘을 말없이 내려주었다

 

 

 

 

 

 

빈집 / 이영옥

 

 

바람벽의 광대뼈가 불거져 있는 빈 농가
감나무 야윈 품안에 시린 낮달이 얼굴을 묻는다
허리를 비틀던 흙담은 기어이 주저앉아 버렸다
간신히 서있는 세탁기 속으로
후줄근한 바람이 몸을 구겨 넣자
겨울 해의 마지막 동력이 녹슨 플러그에 접속된다
일시 정지된 동작들이 기억을 짜 맞추고
숫자가 희미해진 타이머는 오래된 예약시간을 깨닫는다
이삿짐에도 따라가지 못한
한쪽 다리가 부러진 빨래집게가
눅눅한 어스름을 물고 늘어진다
이불 홑청 같은 저녁이 까슬까슬 말라간다
탈수가 끝난 세탁기가 빗물을 찔끔 내보낸다
탈탈 털어 낸 달빛이 삶은 기저귀같이 새하얗다
달려온 바람의 눈동자가 창호지를 뚫자
놀란 문풍지들이 소스라치게 울어댄다
이빨 나간 독 안에 채워진 달빛이 넘친다
적막한 마음들이 흘러내린다
빈집은 조용조용 젖어 가는데
방문은 늘 해오던 일이라는 듯이
고단한 뼈들을 가지런히 윗목에 뉜다

 

 

빈 곳에서 오는 / 이영옥

 

 

목욕탕에 들어온 늙은 나부(裸婦)

몸이 어찌나 얇은지 젖은 종이 짝 같다

생시가 아닌 듯 한 발 한 발 걸어 와

동네 목욕탕의 소음을 일시정지시킨다

함께 온 젊은 여자가

비누칠을 하고 머리를 감긴다

말 잘 듣는 순한 아이처럼 몸을 맡겼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는 적막한 시선이다

바가지를 던지며 물장난을 치는 꼬마들도

노파의 시선에 붙들리지 못한다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애착하다

스스로 놓아 줘 버린

떠난 길 돌아 올 생각이 없는 형형한 눈빛이다

먼 여정의 마지막 구간을 걷는 수행자처럼

욕탕에 이는 물이랑을 고요히 받아 줄 뿐

움푹 꺼져있는 눈 속을 따라 들어가면

세상에 오기 전인 고요에 닿을 것 같다

반쯤은 후생에 가 있는 듯하고

반쯤은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는

저 무심한 눈길마저 거두고 나면

까닭모를 슬픔은 어디에서 물결쳐 오는지

다시 골똘하게 생각해 볼 일이지만

 

 

 

 

 

다음 정류장은 주식회사 기린 / 이영옥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이 식은 식빵처럼 웅크리고 앉은
그 정류장 뒤쪽 배경은 늘 맛이 바뀌지 않는 단팥빵 같았네

 

낮게 엎드린 지붕 위로 따뜻한 연기가 몽글몽글
뜯어먹기 좋도록 몸을 부풀리고 붉은 굴뚝들은 하나같이 작달막했네

 

공장 담벼락 밑으로 숨죽여 지나가던 늙은 완행열차가
황급히 기적을 올리며 달아나던
적색 식용색소가 첨가된 석양이 가끔 묽어져 있던 곳

 

잔업시간이 길어졌거나 퇴근 버스를 놓친 사내들이
군데군데 곰팡이 핀 얼굴을 가슴에 묻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눅눅한 시간
산다는 게 갓 구워낸 비스킷처럼 바삭거리지는 않았네

 

구수한 바게트를 대형오븐에 수천 번을 구워냈을 숙련공도
제 생의 온도조절에 실패해 속을 까맣게 태우던
그때를 떠올리며 빈 빵 봉지처럼 웃고 있었네

 

옛날의 그 맛이 아닌 건빵처럼 쓸쓸한 저녁이
어김없이 정차했다가 출발하는 다음 정류장은 주식회사 기린이었네

 

 

 

 

 

 

왕버들 상회/ 이영옥

 

 

왕버들의 깊은 그늘에

발을 담그고 늙어가는 구멍가게

예전부터 주인이던 여자는 이제 노파가 되었다

선반을 비추는 형광등의 눈은 침침해졌고

가는귀가 먹어 버린 이 집은 웬만한 기척에는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바람이 왕버들의 어깨를 주무르는 걸 보면

가게의 실제 주인은 나무인지 모른다

내가 어쩌다 가겟집 앞으로 지나갈 때면

노파는 산도과자가 기다린 헝클어진 시간을

정돈하거나 빨랫비누 위에 내려앉은 사각의 고요를 털어내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노파는 소리 없이 움직여

연탄가스로 매캐해진 어두컴컴한 가겟방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푸른빛으로 물갈이를 했다

동네 사람들은 노파가 끓여주는 라면과 신김치조각에

몇 백 년도 더 된 그림자처럼 붙들려 있었다

가끔 유리창에 찍힌 실루엣들은

산소가 부족한 금붕어처럼 입을 쩍쩍 벌렸다

왕버들의 그늘은 몇 십 년을 팔아내도 줄어들지 않았고

그 집은 더 이상 시간 밖으로 걸어나오지 않았다

누구든 왕버들 상회에 붙들리기 좋은 달밤

세상을 건너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자리에 있는 것들이다

 

 

  

 

 

돛배 제작소 / 이영옥

 

 

그의 좁고 어두운 창고는

바다를 낀 비탈길에 매달려 있다

작업대 위에는 선풍기 한 대가

성능 떨어진 스큐르처럼 꺽꺽 거리고

가끔 죽은 생선을 입에 문 갈매기들이 힐끔거렸다

저녁이면 그는 절벅거리는 석양에 전신을 담그고

초판 인쇄본인 낡은 해부학 책을 탐독한다

그가 읽은 해부학 책의 대부분은

휘어진 척추와 절망에 눌린 늑골을

잘라내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었다

노련한 마도로스가 되고 싶었던 그는

통나무를 파낼 때마다 깊어지는 허공을 밟고 내려갔다

설계도면에는 오래된 고뇌까지 꼼꼼히 그려져 있었고

돛배가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그의 환멸은 정교해져 갔다

번번히 출항이 연기되었던 이유는

자로 잴 수 없었던 용기의 오차 때문이었고

환기통을 찾지못한 공기들은 녹슨 바람 소리를 냈다 

그는 드라이버로 세상의 귀퉁이에

임시로 꽂혀있던 자신을 풀어낸다

완전한 조립은 언제나 해체를 의미하는 걸까

톱밥같은 날들을 훌훌 날려보내고

그의 돛배는 오늘밤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통마무에서 밀려나온 나무껍질은

시멘트 바닥에서 알몸을 검개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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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옥 시인

 

1960년 경북 상주출생
200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사라진 입들>   

 

시인의 말

 

바람을 무던히도 되받아치며
너는 그렇게 견디고 있었다.
단련된 맷집으로도 견딜 수 없는 것은
추억이 사라지는 일,
마른 아가미 속에 감추어둔 언약
바람 속에 뱉어내고
내장까지 훑어낸 뱃가죽에
행여 한 점 애간장이 묻어있다 해도
이젠 덮어두자
온 몸에 하얗게 소금 꽃 핀다
붙잡아도 갈 걸 뻔히 알면서도
하얀 손가락 흘리던 파도
아픈 듯 뒤돌아보면
가늘게 떨며 따라오던 구룡포 눈썹 달
줄에 묶인 과메기처럼 매운 바람을 헤엄쳐
스스로 깊은 맛을 품을 때까지
혹한의 중심부로 나를 밀어넣어야 했던 그해 겨울
진눈깨비 뿌려대는 국도를 따라오며
나는 뜻하지 않게 너와의 약속을 깨던 적이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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