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그리움의 총량/허향숙

에세이향기 2024. 3. 31. 01:12

명랑

그녀는 산간 마을에 부는 바람 같다

그녀 목소리에 손을 대면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그녀 목소리의 여울에 모여드는 명랑이라는 치어들

외출

먼지처럼 쌓이는 말들을 털어 내고 싶었다

시부모 때문에, 남편 때문에 불쑥불쑥, 시루 속 콩나물처럼 올라오는 말들을 거미줄 치듯 집 안 곳곳에 걸어 두곤 하였다 하고 싶은 말 혀 안쪽으로 밀어 넣고 이빨과 이빨 사이 틈을 야물게 단도리하곤 하였다

이말산 산자락 근방 카페 창가에 앉아 나만을 위하여 브런치 세트를 주문한다

해종일 하늘을 보다가 빽빽이 들어찬 허공의 고요를 보다가 인체 혈관 3D 사진 같은 한 그루 나무를 보다가 우듬지로 올라간 빈 둥지를 보다가 빈 둥지 같다는 생각을 들여다보다가

카페에 여자를 벗어놓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어머니로 갈아입는다

그냥

쓰고 나면 더욱 깊어지는 말

까닭 없이 믿음이 생겨

듣고 나면 괜스레 따뜻해지는 말

딱히 할 말 떠오르지 않을 때 변명처럼 쓰기도 하는

마음의 거리 1미터를 넘지 않는 사이나 쓸 수 있는 말

여고 적 일이다 늦은 밤, 자습을 마치고 돌아와 방 문을 여니 버름한 문틀 새하얀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왔다가 그냥 간다 내 부재를 알면서도 그냥 생각나 편도 시간 반의 밤길 왔다 간 그녀

 

불현듯 달음박질치는,

허공을 가로질러 맞닿은 마음

한 번을 써도 백 마디 말보다 긴 여운의

아무리 써도 물리지 않는

슴슴한 음식 같은

말, 그냥

습관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나를 끌고 다닌다

처음에는 내 집에 들어와 어색해하고

쭈뼛해하다가 자주 뛰쳐나가더니

하루 이틀 사흘……

내가 시키는 일 곧잘 하더니

이제는 상전처럼

어느새 나를 부리고 있다

엎지르다

봄이 비탈진 언덕에

한 무더기

개나리를 엎질렀다

개나리 꽃들 흘러넘쳐

어질머리 하늘이 샛노랗다

한 시절 나도

네게 나를 엎지르고

크게 운 적이 있다

그래, 엎지른 자리는

마르고야 말지

저 꽃들 지고 나면

녹음 우거질 게다

너를 꿈꾼다

너는 고치 안에서 무슨 꿈을 꾸었니?

터질 듯한 외로움과

치솟는 두려움

엄습해 오는 백일의 고통 속 무균실에서

너는 고치 속에서 무슨 꿈을 꾸었니?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가 되는 꿈

갈매기 조나단 되어

창공을 자유롭게 비상하는 꿈

너는 안에 누워서

나는 밖에 선 채로

서로의 꿈을 기원했는데

눈 부신 봄날

끝내 날개 달지 못하고

고치 속에서 너는 영면에 들고

너의 부재 이후 난

너를 입고 사는 삶이 되었다

너에 갇히다

겨울을 살아 낸 것들의 환희가

숲에서 들에서

냇가에서 파닥일 때

바람 허공 풀어 수분하고

나무 살거죽 찢어 싹 틔우고

햇살 나뭇가지 새로 피어날 때

햇솜 같았던 너만

시간의 혀에 유린당한 채

그해 봄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너 없이도 바깥은

세상의 모든 까닭을 들어

징글맞게 꽃 피운다

그리움의 총량

무언가를 간절히 생각하고

슬퍼하는 시간의 총량이

고작 한 시간 정도라는 어느 시인의 진술을

수정하고자 한다

내 그리움의 총량은

의식과 무의식의 총체다

잠잘 때도

밥 먹을 때도

책 볼 때도

페북질할 때도

걸을 때도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유행가를 부를 때도

온통 너이기 때문이다

해가 뜨는 이유도

새가 지저귀는 이유도

바람이 동으로 가는 이유도

비가 사선을 긋는 이유도

구름이 하늘을 흐르게 하는 이유도

별빛이 어둠 가르며 내리는 이유도

풀벌레 우는 이유도

꽃이 피고 지는 이유도

슬픔이 내 몸을 지나는 이유도

웃음 한 말 빌려 오는 이유도

숨을 고르는 이유도

온통 너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대기

낙엽처럼 깔려 있는 침울한 적요

흐느끼는 산길

널브러진 이끼들

어스름을 흔드는 개 짖는 소리

홀로 사그러지는 메꽃

매일 아침 나는 너로 태어나 너로 죽는다

너를 부른다

처음 너를 안았을 때도 마지막으로 너를 보냈을 때도 환한 봄날이었다 십 년 세월 너를 지켜 온 옷장 속 옷들을 꺼내 빨며 젖은 목소리로 너를 부른다

슬픔을 키우다

울음이 전염병처럼 창궐합니다

병을 병의 치료법으로 사용한 니체처럼

슬픔을 슬픔의 치료법으로 사용할 수 있을는지요

암사마귀 교미 후 수컷 씹어 먹듯

암 슬픔이 숫 슬픔 씹어 먹게 두어 볼까요?

당신이 남기고 간 그 아이

슬픔을 들여다봅니다

슬픔이 뒤집기를 합니다

슬픔이 눈을 맞춥니다

칭얼대는 슬픔

슬픔을 안아 젖을 물립니다

슬픔이 제 발로 나를 나서는 날까지

몇 년은 더 키워야겠습니다

떠나려, 떠나보내려

발버둥 치지 말아야겠습니다

고사리

아버지 묘에 핀 고사리 한 송이

뽑아낼까 하다가 어쩌면

일 년 만에 찾아온 고명딸을 반기는

아버지의 손가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만히 어루만져 주었어요

양지바른 산 중턱에 당신은

이승에서처럼 담도 쌓지 않고

문패도 달지 않은 집에 계시네요

한번은 물었어요

아빠! 왜 우리 집에는 담도 문패도 없어요?

환자들이 자기 집 들고 나듯 하면 좋잖니?

당신 가신 뒤로 당신이 남긴 외상값 장부를 보았어요

빼곡히 적혀 있는 이름 옆 칸을 비워 두셨더군요

붉은 함석지붕 탄 연분홍 꽃 분분한

살구나무 한 그루가 봄을 밝히고 있어요

갓 태어나 사람의 손 타지 않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훑으며 반겨 주네요

어쩌다 제 집에 오시면

출가한 딸네서는 잘 수 없다며 해 질 녘

바삐 나서시던 아버지

해 지기 전에 어여 가라며 바람을 시켜

등 떠미시네요

근황

몸 이곳저곳에서

삐꺽거리는 소리에

밤잠 설친다

학도암을 지나오다가

허물어져 가는 집 한 채를 본다

벽마다 깊은 주름지고

금 간 유리창에 낀 하늘 한 조각

바람 서성이는 우물가

깨어진 바가지 나뒹굴고

허물어진 돌담장 아래

칸나 한 송이

길게 목 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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