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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장독대가 있던 집/권대웅

에세이향기 2024. 3. 31. 11:36

 

장독대가 있던 집

                                  권대웅

햇빛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다
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죽어서도 할머니를 사랑했던 할아버지
지붕 위에 쑥부쟁이로 피어 피어
적막한 정오의 마당을 내려다보곤 했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떠나가던 집
빨랫줄에 걸려 있던 구름들이
저의 옷들을 걷어 입고 떠나가고
오후 세 시를 지나
저녁 여섯 시의 골목을 지나
태양이 담벼락에 걸려 있던 햇빛들마저
모두 거두어 가버린 어스름 저녁
그 집은 어디로 갔을까
지붕은, 굴뚝은, 다락방에 모여 쑥덕거리던 별들과
어머니의 슬픔이 묻은 부엌은
흘러 어느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을까
뒷짐 지고 할머니가 걸어간 달 속에도
장독대가 있었다
달빛에 그리움들이 발효되어 내려올 때마다
장맛 모두 퍼가고 남은 빈 장독처럼
웅웅 내 몸의 적막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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