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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화엄의 숲, 그 마음의 감옥에 갇혀 성찰하는 시간

에세이향기 2023. 5. 30. 13:22

화엄의 숲, 그 마음의 감옥에 갇혀 성찰하는 시간

- 오종문론

 

 

이 송 희(시인)

 

 

1. 현실 비판의 지상에서 자아성찰의 땅 속으로

 

  시인은 끊임없이 세상과 타자, 또한 스스로의 삶에 관여하는 존재다. 감각적으로 인지함으로써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최소의 언어로 함축하여 표현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공자의 말처럼 “시란 뜻(志)이 향해 가는 바라, 마음 안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되는 것”이다. 마음 안에 있는 사유를 문자언어로 표현하는 존재가 시인이 아니던가. 요즘처럼 빠른 속도와 경쟁의 시대에 현대의 시들은 할 말이 많아졌다. 시 한 편이 두 페이지를 넘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시집 한 권이 단 한 편의 시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의도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는 시에서조차도 말을 아끼지 못한 채 말이 난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미국의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Archibald MacLeish)의 말처럼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는 시를 여러 가지 이미지로 비유하고 있다. 시는 둥근 과일이고, 낡은 메달이며, 만져지는 묵묵한 것이고, 소리 없는 것이고, 움직임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즘 시는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모든 생각들을 다 말로 분출하고 있지 않는가.

현대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정형시는 유독 말을 많이 아끼는 편이다. 물론 정형성이라는 특성의 장점일 수도,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치열한 시대를 묘사하거나, 인간적 고뇌의 현장을 서정적으로 그려내거나,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섬세하게 이끌어 낼 때도 우리는 최대한 말을 아껴야 한다. 아끼고 걸러내면서도 ‘지금 여기’의 삶을 이야기하는 정형시의 매력이 바로 모든 고전문학의 장르가 사라진 지금 현대시조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1986년 시화집 󰡔지금 그리고 여기󰡕에 6편의 시조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오종문 시인은 󰡔오월은 섹스를 한다󰡕라는 과감한 제목의 시집으로 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에 68번째로 수록되었다. 2010년 「연필을 깎다」로 중앙시조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는, 30여년 가까운 시력을 보여주는 시조시단의 중견으로서 현실을 향해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을 보내왔다.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 걱정하며 비판의 날을 세우거나, 정치 현실을 과감하게 풍자하는 시선, 노동자의 삶을 비롯하여 가난한 소시민의 일상을 파헤쳤던 시풍이 그의 시에 대한 논의에 항상 자리매김 해왔다. 그러나 이렇게 외부적 현실 세계에 민감했던 시인은 이번 작품들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시선이 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종문 시인의 이번 시에는 살아가는 동안 얻는 깨달음과 성찰의 사유가 깊게 깔려 있다. 두꺼운 욕망에 뒤덮여 자신을 돌아볼 기회조차 갖지 않는 현대인에게 반성적 기회를 갖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편하게 읽힌다. 특정한 지침을 내걸지 않고도, 과다한 수식을 동반하지 않고도, 이미지를 과도하게 끌어 쓰지 않고도 그는 우리 삶의 불편하고 슬픈 이야기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들어앉힌다. 그가 이번 신작에서 보여 준 대부분의 작품들은 불교적 색채가 진하게 깔려 있다. 버림과 비움, 존재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의 사유, 소소한 것들에의 배려 등이 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운문사, 화엄사의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가 파고드는 내면의 세계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2. 황폐한 옛집에 세우는 화엄의 절집 한 채

 

 

몇 됫박 삶 동냥하고 이 절집 찾은 걸까

난 누구고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 걸까

 

몸 낮춰 발소리 죽여

 

이 길을 걷는 걸까

 

다복솔 개울물에 발 담근 채 경을 듣는

생각이 너무 많아 독이 되는 남루한 하루

 

안개로 풀어지느냐

 

설법으로 풀리느냐

 

나 이제 못 가느니 도반 그만 가게 하고

저문 산 땅을 닮고 그 마음 하늘 닮는

 

운문사 은행잎 한 장

 

내려놓는 이 가을

 

- 「운문사를 거닐다」 전문

 

  경북 청도군에 있는 사찰인 운문사를 거닐며 인간 삶의 근원과 존재의 실존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시인은 이 절집을 찾아오기 전 자신이 “몇 됫박 삶 동냥”했을까, 자문하며 스스로 반성하는 것으로 첫 수를 연다. “난 누구고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물음을 통해 시인은 전생과 현생, 과거와 현재의 삶으로 이어가는 실존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첫 수의 초․중․종장에서 이렇게 의문의 서술 형태를 반복적으로 취하고 있는 것은 진정한 삶의 가치에 대한 고뇌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죽음과 같은 소멸의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두 개의 물음이 더해진 이 시행에서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 라는 물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무수한 욕망에 뒤덮여 살아가고 있는 요즘,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쉽게 잊어버린다. 그저 누군가의 무엇으로만 존재하는 삶이 고작인 경우가 많다. 또한 막연하게 태어났으니까 마지못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기도 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사는 존재가 얼마나 치열하게 현재를 고민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자본주의의 욕망의 노예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지위와 명예를 막론하고 모두 태어나는 순간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살아간다. 그 사이에 우리는 사랑도 하고, 음식도 먹고, 운동도 하고, 갖가지 부와 명예를 쌓아가고 욕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시인이 묻고 있는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말은, 결국 그러한 욕망의 산물이 죽음 앞에서는 다 부질없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죽음이 단순한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말에는 인간이 소멸되지 않고 또 다른 세계를 향하여 간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윤회사상의 일면을 엿볼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릴케가 「에필로그」에서 ‘우리가 생명의 복판에 있다고 생각할 때/ 죽음은 우리의 복판에서/ 감히 울기를 한다.’고 말했듯이 죽음을 삶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시인은 운문사를 거닐며, “몸 낮춰 발소리 죽여// 이 길을” 걸을 자격이 과연 스스로에게 있는지 자꾸만 되묻고 싶은 것이다. “몇 됫박 삶을 동냥”했는지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는 현실, 그것이 현대인의 삶이 아니던가. 시인은 이 남루한 하루의 걸음을 그만 걷고, “저문 산 땅을 닮고 그 마음 하늘 닮는” 운문사에 은행잎 한 장 내려놓는 가을 풍경이 되기를 소망한다. 오종문 시인은 운문사를 거닐면서 이기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힌 채 타인은 물론 자신조차도 돌보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다. 그럼으로써 번잡한 세상사의 출구가 결국 자신의 마음속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자신의 내면을 가다듬는 과정은 다음 시편에서도 읽을 수 있다.

 

뚝! 하고 부러지는 것 어찌 너 하나뿐이리

살다보면 부러질 일 한두 번 아닌 것을

 

그 뭣도 힘으로 맞서면

 

무릎 꺾여 피 흘린다.

 

누군가는 무딘 맘 잘 벼려 결대로 깎아

모두에게 희망 주는 불멸의 시를 쓰고

 

누구는 칼에 베인 채

 

큰 적의를 품는다.

 

연필심이 다 닳도록 길 위에 쓴 낱말들

자간에 삶의 쉼표 문장부호 찍어 놓고

 

장자의 내편을 읽는다

 

내 안을 살피라는.

 

- 「연필을 깎다」 전문

 

  중앙일보에서 주최하는 《중앙시조대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연필 깎는 과정을 우리 삶의 내면의 결을 가다듬는 일과 자신의 창작의 고통을 비유함으로써 반성과 성찰의 의미를 이끌어 내고 있다. ‘툭’하고 부러지는 것이 연필뿐이겠는가. 살다 보면 부러질 일이 얼마나 많은가. 힘으로 맞서려 하면 무릎 꺾여 피 흘리게 되는 일들 역시 얼마나 많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을 힘이나 권력으로 해결하려는 현대인에게 지혜롭고 여유로운 삶을 시사해준다. “누군가는 무딘 말 잘 벼려 결대로 깎아/ 모두에게 희망 주는 불멸의 시를 쓰고”와 “누구는 칼에 베인 채// 큰 적의를 품는다”는 시행을 대립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결대로 깎아야 하는 삶의 가치를 부각시킨 시인의 의도가 빛난다.

장자에 의하면, 마음을 닦는 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욕망을 비우는 것이야말로 욕망을 채우는 것이다. 그는 내편에서 “지혜가 많은 자는 항상 여유가 있지만, 지혜가 적은 자는 항상 게으르고 소홀하다.”면서 “커다란 말은 기백이 넘치지만, 어설픈 말은 수다스럽다”고 언급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본마음을 따른다면 어느 누구에겐들 스승이 없겠는가 하는 것이 장자의 내편이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보다 옳고 그름을 초월한 탁월한 지혜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임을 이 시는 깨닫게 한다. “힘으로 맞서면” 그르치는 삶은 칼에 베이게 된다. 이 말은 곧, 욕망이 지나치면 칼에 베인다는 의미와도 같다. 그래서 큰 적의를 품게 되는 것이다. “연필심이 다 닳도록 길 위에 쓴 낱말들”처럼 결대로 제 몸을 깎아가며, 버틸 수 있는 그날까지 지혜롭게 삶을 이어가는 자세를 넌지시 알려준다. 그렇게 세상을 갈고 닦는 동안, 존재가 닳아져 작아지는 사이, 우리는 삶의 자간에 쉼표를 찍고, 무수한 문장부호를 찍으며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장자의 말처럼 ‘물이 얕으면 큰 배를 띄울 수가 없’듯이 생각의 강물이 얕은 곳에서는 큰 생각의 배를 띄울 수 없다. “내 안을 살피라는” 장자의 내편을 읽으며, 복잡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남아야 할 것이다.

 

고통의 삶 빼고 나면 살 날 그 얼마인가

 

산다는 건 또 다시 많은 죄를 짓는 일

 

오래된 마음의 감옥

 

무시로 갇히는 일

 

그래, 내 기억에서 무엇을 지운다는 건

 

어떤 추억 속에 마음이 폐허되는 것

 

그 위에 욕망의 집 한 채

 

또 세우고 허무는 것

 

모른다, 어른 된 지금 아직도 갈 길 잃고

 

상처 곪아 터지도록 견디고 또 견디었을

 

힘들게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고 있는지

 

오늘 한 날씩 슬리는 가을 햇살 경영하며

 

세상에 감나무 한 잎 물들일 수 있다면

황폐한 그 집 골방에

 

편한 잠 잘 수 있으리

 

- 「황폐한 옛집에 서다」

 

  반성과 성찰의 시간이 황폐한 옛집에 고스란히 담긴 시다.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끝없이 채우려는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은 고통스럽고 그 고통의 삶은 바로 황폐함으로 이어진다. 과욕을 담고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많은 죄를 짓는 일이기에 고통스럽다. 죄를 지은만큼 자기의식 속의 감옥에 갇히는 일 또한 많아지고, 우리는 그때마다 스스로의 죄를 바라보는 감옥의 간수가 된다. 이 시에서의 감옥은 “오래된 마음의 감옥”이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님을 의미한다. 스스로 내치지 못하고 마음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죄를 묻던 시간은 아마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생겨나면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속도를 높이고 욕망을 충족하는 것만이 목표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 중심의 욕망을 무한정 확장하다 보면 서로의 욕망이 부딪히면서 갈등만 야기하게 된다. 삶은 늘 “욕망의 집 한 채/ 또 세우고 허무는” 과정의 연속인 데 이러한 욕망을 세웠다가 허무는 곳에는 폐허만이 남는다. 욕망은 그 자체가 부푸는 비누 방울처럼 터져서 사라진다는 것이 전제된 소유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폐허가 된 마음 위에 다시 욕망의 집을 짓고 또 허무는 과정을 반복한다.

황폐한 옛집에 서서 시인은 묻는다. 상처가 곯아 터지도록 견디고 견딘 삶이지만 어른이 된 지금도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본다. 지울 것 다 지우고 황폐해진 마음이 바로, 지금 시인이 서 있는 옛집인 것이다. “가을 햇살 경영하며/ 세상에 감나무 한 잎 물들일 수 있”는 마음만, “황폐한 그 집 골방에// 편한 잠 잘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이렇게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욕망에 물들었던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시인의 시 정신은 「그 여름, 화엄의 숲」에서도 이어진다.

 

총총한 별 몸을 던진 산문에 들어설 때

뜨겁게 우는 풀벌레 제 생을 다 비우고

적막은 물소리보다

산보다 더 깊어진다

 

이 밤 함께 동행한 그도 갈 곳을 잃고

사랑도 얇아져서 마음까지 둘 데 없어

무작정 오금을 박는

저 불편한 불립문자

 

난 안다 새벽안개 경계를 푼 뒤에도

내 입에 대못 치고 눈에 빗장을 걸고

면벽에 이르는 문을

결코 열지 않는다

 

놓아라 버리라던 묵언의 절집 한 채

고적한 산빛 주고 맑은 물빛도 주는

그 여름 화엄의 숲은

눈물 많은 누이 같다

 

- 「그 여름, 화엄의 숲」

 

  여름 화엄사의 숲은 적막하다. “뜨겁게 우는 풀벌레”마저도 제 생을 다 비우고 “물소리보다, 산보다 더 깊어지는 적막한 밤, “함께 동행한 그도 갈 곳을 잃고”, “사랑도 얇아져서 마음까지 둘 데 없”는 밤이기에 더욱더 적막함이 느껴지는 밤이다. 적막한 화엄의 숲과 화자의 마음은 “무작정 오금을 박는” “불편한 불립문자”로 표현된다. 불립문자는 “선가(禪家)에서 가르침은 문자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以心傳心]”이라고 한 것인데, 이를 불편하다고 표현한 것에서 화자의 “사랑도 얇아져서 마음까지 둘 데 없”는 심경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화자는 안다. 이 불편함이 새벽안개가 경계를 푼 뒤에도 면벽에 이르는 문을 결코 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벽을 마주 대하고 좌선을 하는 일은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지만, “내 입에 대못 치고 눈에 빗장을 걸”면 면벽에 이를 수 없다. 적막하고 외롭고 쓸쓸한 화엄사의 풍경을 키우는 것은 무엇일까. 화자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묵묵히 서 있는 화엄사 앞에서 “고적한 산빛”과 “맑은 물빛”을 내어주는, 눈물 많은 누이의 모습을 읽는다.

이 시에서의 ‘화엄의 숲’은 화엄사이기도 하고 불교의 화엄사상이기도 한데, 시인이 ‘화엄사’라고 지칭하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시적 장치로 보인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조화의 정신인 화엄사상을 시인은 인간의 삶으로 가져온다.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원인이면서 결과일 수 있는 자세로 우리는 존재한다. 나와 남의 구별이 없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곳에서 참된 자비가 싹트게 된다는 화엄의 정신. 그 앞에서 화자는 마음을 다 비우지 못한 자신을 반성한다. 화자는 여기서 생을 다 비우는 법과 묵언을 하는 법을 깨닫고 싶을 것이다. 물질, 감정, 생각을 비우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내부를 채우는 일이 아니겠는가. 가장 이상적인 물질의 비움은 본래 왔던 상태대로 돌아가는 것이며, 희로애락을 모두 버리고 가는 것이다. 화자는 이렇게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일탈의 봄엔 쉽게 잠들지 못한다

동백꽃 붉은 홑동백 온몸으로 투신하는

눈 뜨고 볼 수가 없는

황홀경의 이 봄날

 

무심코 뒤밟힌 삶의 아주 사소한 것들에

나는 목이 멘다 무너지는 것 보며 운다

살아온 그 더께만큼

더 많은 죄 짓는다

 

세월은 그렇게 가고 새날은 또 오는 것

차마 즈려밟지 못한 마흔넷 궤적 따라

동행한 그대 사랑에

두 발 깊이 담근다

 

원하는 것 모두 내 안에 있음을 알 때

삶이 가르쳐준 길은 왜 그리 멀리 있는지

이 길의 우연에 대해

난 끝내 입 다문다

 

- 「봄날을 서성거리다」 전문

 

  화자는 동백이 온몸으로 투신하는 장면을 황홀경의 봄날로 역설적으로 표현하며, 속세를 일탈하는 봄으로 읽는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황홀경의 풍경 속에서 화자는 “무심코 뒤밟힌 동백 잎, 삶의 아주 사소한 것들에” 목이 멘다. 피었다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화자는 발에 밟히는 동백 잎을 보면서 살아온 더께만큼 더 많은 죄를 짓는다는 생각을 한다. “세월은 그렇게 가고 새날은 또 오는 것”일까. 무너지고 밟힌 후에야 또 새롭게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순간이다. 그러나 떨어지는 동백 잎을 밟고 가는 길목에 “차마 즈려밟지 못한 마흔넷의 궤적”이 겹쳐진다. 화자와 동행했던 그대 사랑에 두 발 깊이 담그며, 봄날 풍경을 서성거린다. “원하는 것 모두 내 안에 있”는데, 어찌 삶이 가르쳐준 길은 멀리 있을까. 화자는 봄날을 서성거리며 떨어지고 밟히는 것들에 눈을 맞춘다. 삶이 가르쳐 준 길이란 결국 몸과 마음을 비우는 일 아니겠는가. 아주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아름다운 시편이다.

 

 

3. 세상에서 나를 향해 옮겨진 시선

 

  “난 누구고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 걸까” 이 말은 오종문 시인의 시를 관통하는 줄기다. 우리가 사는 현생은 잠시 잠깐 쉬었다 가는 길이라고 불가에서는 말한다. “쉬었다 가는 교차로에서 네가 깨달아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시편을 통해 시인은 속세의 욕망에 물들어 살아 온 삶을 돌아보며 반성한다. 우리는 현생에 머무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욕망하여 왔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는 어느덧 물질문명에 휩쓸려 살고 있다. 물질에 끌려 다니며 살면, 물질이 낳는 재해와 재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들은 물질을 더 많이 갖기 위해 경쟁하며 살아가지만 물질의 풍요로움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더 많은 재화를 소유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심이다. 김수영이 「파밭 가에서」라는 시에서 노래했듯이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가지고 있는 다른 것 하나를 버려야 함에도 사람들은 버리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욕망하기에 급급하다. 욕망을 비운 자리에 정신을 채울 수 있다는 깨달음. 이것을 얻기 위한 내적 갈등과 반성의 순간들이 그의 시, 행간에 숨어 있는 사유의 언어들이다.

“꽉 묶인 삶 울컥 피운// 저 무림(武林)의 억새 일가// 가슴팍 돌팔매질하는// 바람 서 말 얻어 지고// 마침내// 저잣거리로// 수런수런// 돌아가”(「가을 억새-심법 13」)는 그의 모습에서 마음 다스리는 법을 읽을 수 있다. 꽉 묶인 삶을 풀어내고, 가슴팍을 돌팔매질하는 바람 서 말을 얻어 지고 가는 모습은, 고통을 고통으로, 슬픔을 슬픔으로 맞서는 힘을 보여준다. “막장의 삶 알면서도 길 떠나 가 닿는 곳”, “모든 것 떠나보낸 섬”(「바다의 집, 섬」)의 쓸쓸한 풍경을 시인은 눈에 담으면서, “세상은 봄 천지지만/ 인생의 봄 아직 멀”다는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옳은 것은 아니고 아닌 것이 옳다는 세상”(「지하철을 타고 오는 봄」)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빛나 보이는 이유는, 그의 내면을 향한 성찰이 낳을 시적 성취가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까닭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