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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낯섦의 부재에서 치환해낸 자연의 시어

에세이향기 2023. 5. 7. 13:20

낯섦의 부재에서 치환해낸 자연의 시어

-김계식 시선집 《연리지의 꿈》을 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자연과 맞닥뜨리는 촉수는 사물을 바로보는 의식이고, 자아가 외부 세계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 첨예한 접점에서 발현한 자의식으로 시적 상상력은 형상화에 다다른다. 시의 세계로 내재화된 자연은 삶의 경계를 여지없이 허물어 낸다. 그러한 작업이 환원되어 건강한 시어로 추수됨을 알 수 있다.

 

나는

무리의 질서를 존중하는

한 마리의 일벌

-<몰락> 부분

 

비록 부분을 보여주지만, 전체를 나타내주기에 충분하다. 이 싯구를 통해 시인의 시적 방향성과 삶의 정신을 가늠해볼 수 있다. 여기에 “나는 / 한 마리의 일벌”이었다며 기나긴 침묵을 고해하는 성사를 마저 이룬다. 시인의 고백을 통해 단정할 수 있는 것은 공감할 수 있는 비애와 슬픔과 통증에서 비롯되는 아픔이 생애로 통시通時를 이루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시대를 관통해온 체험의 공감에서 오는 의식으로 시적 발원지를 <틈 건너온 새>에서 일말을 엿볼 수 있다. “독일 광부와 간호사/ 월남전에 다리 하나 놓고 온 전사 등 디딘/ 가난 까맣게 모르는 손주새끼들/동물원으로 새보러 간다/ --중략--/ 어제 오늘로 건너온/ 우리네 삶의 틈새를 함께 건너온/ 갖가지 새/ 그 새보러 간다” 며 당시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거를 현실과 빗대어 사회적 불편함을 고발한 시다. 그러한 틈새는 여전할 것이고 머지않아 주류가 될 것이 자명하다. 자신 이외의 남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의식을 점잖게 질타하는 모습마저 낯설지가 않다. 오랜 시간을 제도권의 교직에서 몸담아온 까닭이다. <나도 너의 너다>에서 “남의 이목이라고는 아랑곳없는/ 가면무도회의 표정”보다 더 심각한 “빗살무늬 토기 깨진 조각 찾을 수 없다고/ 플라스틱 조각으로 때워 놓은 꼴불견”의 세상을 우려스럽게 바라본다. 개인적 체험에서 얻을 수 있는 사유가 사변적 감동만은 아니듯 사회의 부조리에서 오는 불편한 불화의 시적 발화는 시인으로는 꼭 필요한 사명이다. 그러한 의식은 역사의 일면인 역사의 현장에서도 지나치지 못한다. <제자리걸음인 좌와 우>는 지리산 자락 하동 북천면의 이병주 문학관을 둘러 보다 느낀 감상을 술회한 시임을 알 수 있다. “검은 풀테 안경 짙은 콧수염 뭉툭한 곰방대/ 추키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던 손길/ 지금껏 좌와 우 하나 되지 못한 뭇사람들의 상념마냥/ 문학관 밖 고샅만 어설피 뱅뱅 돌고 있네”라며 시인의 문학적 해명까지 곁들이고 있다. 과거와 현실이 시로 틈입하고 자아는 시로 불순한 잠식을 허용한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천이遷移처럼 삶을 인식한 자아에서 비롯된다. 더욱이 내면의 관용으로 전부가 아닌 일부만이 발화를 거칠 때는 아예 그마저도 보류되기 십상이다. 그러한 작업이 시인에게는 문학적 통념으로 내재화되고 서정의 공간으로 재인식된다.

시인의 근원적 욕망은 자연을 찾아가는 것이다. 시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몸과 마음이 자연의 결을 응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계식 시인의 시는 세계로 다가온 자연 속 풍경에서 시작되었고 과도하거나 때로는 빈약할 수밖에 없는 풍경 속 텍스트를 내면화하는 노력으로 추수되고 있다. 풍경의 실체인 내면을 인식한 순간 김계식의 시에서는 살아있는 자연의 전언을 아포리즘처럼 담아낸다. 그러한 풍경은 내, 외부를 망라하고 이미 소멸해버린 과거의 어딘가를 향하기도 하지만.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고 있다. 시선의 초점은 항상 부침 없이 성장하는 도시의 중심이 아닌 도시 바깥을 향하고 있다. 도시의 틀은 견고한 제도 속에 갇혀 시인의 시 세계로는 치유나 휴식을 취할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모와 피폐를 수반하는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다. “전주 중앙시장 계란 직판장 유리문에/ ‘계란 없습니다’./ 아예 계란이 없다는 건지/ 팔아야 할 계란이 없다는 건지// AI로 살처분한 닭이/ 오늘 현재로/ 이천오백만 마리”를 깡그리 죽이고도 잘살아가는 나라가 대한민국이고 국가를 아작 낸 최고의 권력자도 모른다고 해버리면 아무 일 없는 나라라고 불편함을 토로한다. 정말 죽어야 할 사람도 잘사는 나라라는 현실에 “모든 걸 새로이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분노하지만, 그마저 혼란스럽다. 그럴 때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이유가 극명해진다.

자연에 은둔하는 삶은 은일적 노장사상이고 안빈낙도의 회피적 삶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경계를 절대 넘지 않는다. 눈과 귀가 더러워졌을 때는 자연 속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이 최고다. 자연으로 분리된 공간이 보기에는 누추하고 비루하지만, 오래도록 들여다보면 누추하지 않고 비루하지 않는 당당한 이유를 귀로 들을 수 있다. 섬진강 변의 물소리가 귀를 씻어주기 때문일까. 소음이라는 데시벨의 단위가 어느 지점부터 꽃잎이 벙그는 소리로 들려온다는 화개花開 장터를 향하고 있다. <벚 굴>을 통해 은유하고 있는 시인의 눈은 한갓 미물에 불과한 ‘벚굴’을 통해 시인의 속말을 전하고 있다. “오직 하나 아직도 입술 꼭 여민 벚굴/ 담수의 맑은 물 쪽도/ 짭짜름한 해수 쪽도 편 들지 못해/ 훈풍도 모르쇠 거칠게 앙다물고 있”는 벚굴의 모습에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생리적 불편함을 표출한다. 몸으로 감지한 자연과 시인의 의식이 동화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은 더 필요하다. 자연과 오랜 단절에서 오는 모음으로 “만삭된 벚꽃망울들/ 오백오십 리 줄달음쳐 달려온/ 섬진강 짠한 역사며/ 푸른 바다 일렁이며 다독인” 세월의 전언을 통해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를 알게 된다. 자연을 통해 두툼해진 서정의 시선은 벚꽃이 벌어지는 찰나에서 멈추지 않고 더 깊어진다. 그 너머 ‘벚굴’의 꽉 다문 입속에서 발화되지 못한 묵음의 의미까지 치환해낸다. 시인의 시 세계 속 풍경에는 자연과 친화하여 치유되고자 하는 의미 이상의 성찰까지 다다르고 있다. 성찰은 때가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고 어느 만큼의 연륜에 다다라서야 가능한 일이다. 하찮게 보였던 것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기 시작하는 때가 지천명知天命 이후다. 그래서 ‘명량’鳴梁은 단순한 <명량>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울돌목<명량>의 거센 물결/ 바다 밑 돌을 울리고/ 짠한 역사 엮어가는 자/ 마음 울리”는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겸허히 다가간 자연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살려는 자 죽을 것이요/ 죽으려는 자 살 것이라”는 순명의 소리가 이순耳順이다. 순명順命은 자연에서만 들을 수 있는 지엄한 천명天命이다.

 

헌 나무 질통

가늘게 쪼갠 대나무로 테를 맨다

금간 옹기동이

두툼한 무명배로 배접褙接한다

 

헌옷 같은 편함이 좋아서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게 좋아서

얽어매고 때우고 꿰매고 붙이고

끊기려는 명줄을 이으려 애를 태운다

 

해거름

황혼이라고 믿은 서글픔 위로

언뜻언뜻 내일의 일출 얼비침에

살며시 쥐어보는 생명선

 

타의로만 믿었던 의지가

슬금슬금 자의로 터 잡음에

엉거주춤 엉덩이 땅바닥에 부리고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

-<연명> 부분

 

김계식 시인은 이미 그러한 연배를 훌쩍 뛰어넘은 칠십이종심소욕七十而從心所欲, 불유구不踰矩에 이르렀다. 내 마음이 원하는 바를 순연히 따르는 것이어서 법도에 어긋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자는 학문을 통해 죽음의 예禮를 삶의 예禮로 전환해낸 학學을 실천한 사람이다. 공자와 달리 자연을 학學의 근본으로 삼고 살아온 시인의 시 세계는 아름답고 웅숭깊을 수밖에 없다. 자연을 답사하며 깨달은 가치는 의미 그 이상이다. 질통이 수명을 다하면 느슨해진다. 이것을 더 사용하기 위해 조여줘야만 한다. 대나무를 깎아 질통을 조이는 데 사용하는 테를 만든다. 잘 빚어진 옹기동이도 흙에서 나오고, 사용하다 깨진 옹기를 때우는 데 덧댄 두툼한 무명 삼배 그 또한 흙에서 나온 동질이다. 그러려니 하며 보아 넘길 수 있는 일상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시점이 곧 깨달음이다. 어거지처럼 들이대지 않아도 <연명>에서 “헌옷 같은 편함이 좋아서/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게 좋아서/ 얽어매고 때우고 꿰매고 붙이고/ 끊기려는 명줄을 이으려 애를 태”우는 모습이 우리였음을 상기한다. 더 시간이 지난 어느 때인가는 시인에게도 예감할 수 있는 “해거름/ 황혼이라고 믿은 서글픔 위로/ 언뜻언뜻 내일의 일출 얼비침에/ 살며시 쥐어보는 생명선”을 가늠해보는 여유마저 가능해졌다. 해가 저무는 곳은 언제나 서쪽 하늘이고 어둠도 서쪽으로부터 다가온다는 자연법칙을 이미 헤아리고 있다. ‘연명’은 생과 죽음에 대한 자유 의지까지를 함의하고 있다. 시인의 인식 속 자연과 삶의 경계에는 보이지 않는 문이 존재한다. 그 문을 오가며 시인의 삶을 검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매번 검열을 통해 시적 성찰에 이르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본래 모습을 간직한 고단한 몸 대신 눈길은 아슴한 기억 너머의 모성을 종종 찾아간다. 까마득하게 잊다가도 바람처럼 이는 추억 속의 사립문을 열면 담박에 눈 성그는 어머니를 뵐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반신불수가 되어버린 사립문처럼 시인은 <공황> 상태를 직감한다.

 

바람의 발길에 채인 사립문이

반신불수 된 채 어렵사리 기대어 선

그 안쪽

 

온갖 잡동사니 풀들이 터를 잡은 마당

외래종인 노란 민들레

집주인인 양

제 마음대로 나눈 식민지에 지번을 매기는데

 

짚신 한 짝 외로이 놓인 댓돌을 디딘 시선

열린 방문 너머로 바라본 아랫목 햇대에는

집안의 역사만

주렁주렁 거미줄로 매달려 있고

 

빠끔히 정지문 열고 서 계시는 어머님 모습

전기는 있지도 않았던 그 곳에

13촉 알전구 불빛마냥

어른거리는 내 고향집

 

오늘 밤에는

어머님의 전화번호 찾지 못해

너른 광야를 또 얼마나 헤매야 할지

벌써 정신이 멍멍한 내 마음의 공황.

-<공황> 전문

 

누군가를 잊어야 하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이 인연이다. 인연 중에서 모질도록 그리운 인연이 어머니다. 언젠가는 찾아오는 죽음을 통해 아픈 이별을 안고 남은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 그토록 극한 슬픔도 시간이 흘러 삭아지면 애처로운 그리움이 된다. 그럴 때마다 몽매토록 더 그리워지는 것이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고향 집이다. 텅 빈 시골집을 찾아간 시인은 그래도 어딘가에 있을 어머니의 흔적을 놓칠 수 없다. 아무리 찾아보지만,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잊을 수 없는 빈집에 촘촘히 걸쳐진 거미줄마저 더 애처롭다. 망막한 날이다. <사모곡>에서는 “어머니의 굽은 등/ 그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저 아래쪽 여윈 볼기로 깔고 앉은/ 서러운 새끼 타래를 보았습니다.”라며 자신의 철없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타래는 울타리에 심어 붉은빛이 돌 즈음 잘 익은 열매를 따서 처마 밑에 매달아 두었다 약한 아이에게 약으로 달여 먹이던 약재다. 그런 타래마저 어머니의 손길이 닿은 의미 이상으로 감지한다. 추운 달밤까지 새끼줄을 꼬아 가족을 챙겨온 과거까지 회상하는 것은 덤으로 얻은 서정이다. 타래로 자극된 이미지가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려지며 의미가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된다. 그렇다고 마냥 어머니에 대한 회상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오랫동안 걸어온 길이 너무 아득해 보인다. 그 길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아 스스로 찾아 나서거나 물어 찾아가야만 닿을 수 있는 시원의 길이다. 닿았지만, 정주할 수 없는 고된 업이라면 그것은 평범한 사람의 길이 아님을 알아챌 수 있다. 인간의 시작과 끝은 끝없는 유목일지 모른다. 어머니의 모태를 벗어나 발걸음을 떼면서부터 시작되는 습성은 주변으로의 영역 확장으로 비롯되고 삶의 근원을 이룬다. 유목적 삶의 근경에 서식하는 다양한 환경과 매번 부딪치면서도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시어를 통한 모성으로의 회귀 지향은 모태인 자연언어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어의 본질은 언어이고 그 중심에 시가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인의 사변적 일상은 시의 관심으로 유발되고 시로써 다시 태어나고 비로소 하나의 가치를 지닌 시로써 명명됨을 볼 수 있다. 사실 주변의 환경에 무심해져 버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요즘이다. 하물며 사람이 잘못되어도 무심한 세상인데 길가에 있는 듯 없는 듯 처박혀 있는 우체통쯤이야 별 대수가 아니다. 모두가 무관심하게 방치한 녹슬어가는 우체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세상이니 말이다. 녹슬어 간다는 것 자체가 함의하는 종착은 소멸이다. 언젠가는 시간이 문제이지 녹슬어 철이란 그 자체가 산화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람처럼 같다. 사실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의 긴 여정 자체가 곧 눈물이고 마음 퀭하도록 아픈 통증이다.

<녹슬어가는 세월>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구나 존재감을 보여주며 살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문제가 현실이다. 우체통도 스스로 가슴앓이처럼 아파하다 사라져야만 하는 “골목길 어귀에서/ 부양가족 없는 외톨이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 누구 하나 보듬어 주지 않고 되려 “철딱서니없는 똥개 한 마리/ 왼쪽 뒷다리를 들고/ 질펀하게 오줌 갈겨/ 제 영역을 농하게 그려놓으면// 정신 오락가락하는 빨간 우체통/ 제 눈물인양/ 퀭한 마음 밭에 담긴 찬바람 쓸어안고/ 징징 울고 있는 꼬락서니가/ 그냥 짠하다”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수용하고 만다. 그렇다고 여기에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것이 아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의식의 해체를 통해 무망해진 욕망을 놓지 않는다. 성찰까지는 아니더라고 의식의 전환을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균형잡기>에서 “나무에 매어놓은 찌러기// 한 방향으로 잡아 돈 외고집/ 끝내/ 벌건 콧구멍으로/ 날선 아픔을 쌕쌕 뿜고 있다”며 시인의 자의식을 바라보는 시점으로 끝나지 않고 도발적 인식으로 전환해간다. 그러한 인식의 전환은 존재 의미로 발화한다. 시인만이 인식한 구체적인 서정의 공간에 그냥 달덩이가 아닌 둥글다는 달을 띄워 올렸다.

 

둥근 달덩이였다

 

가느다란 외줄기쯤

깊숙이 감춘

그럴싸한 함성이었다

 

초점은

그 작디작은 꼭지였던 것

 

그저 여린 끈의 끄트머리인 줄 알았더니

탄소 소재로 된 질김의 상징이었고

지구를 통째 빨아들이는

생명의 빨대였다

-<배 꼭지> 부분

 

발화된 시어가 우선 감각을 자극한 질감으로 다가온다. ‘둥근 달덩이’라는 실재 이미지가 떠오르고 이어 ‘함성’은 청각적 분별까지 요구한다. 그러면서 다시 빨대라는 미각적인 음미를 강요한다. 그러다 기어이 시각을 자극하여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도록 장치하고 있다. 시인의 눈빛을 꿰뚫고 있는 배의 꼭지다. 그 작은 꼭지를 통해 달덩이 같은 풍만한 배를 키웠다. 그토록 풍성함으로 충만한 배를 키워내기까지의 이력은 시련을 참고 견딘 내력이다. 단단한 결속의 이음새마다 흔들리지 않도록 견고하게 지탱해준 꼭지가 있었음을 환기하고 있다. 과거 한 때 시인도 자신만의 아집으로 “지구를 통째 빨아들이는/ 생명의 빨대”이길 바랐던 적이 있었음을 진술하고 있다. 생물적 기능에 불과한 배 꼭지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생명성이 함축된 가계家系를 이루고 있다. 단순한 시어의 나열에도 시어에 대한 관심의 집중은 균일하게 재 배분되고 있다. 기어이 의미를 획득하고 대상화의 진술에 성공한다. 이 ‘꼭지’라는 수유 지점을 통해 개개인이 아닌 우리가 자연이라는 공간에서 공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연이라는 복판에 솟은 산과 산을 이어가는 길을 따라 시인의 눈은 바쁠 수밖에 없다. <가을 복판에 들어서다>에서는 기왕에 “짙게 그린 도계道界쯤은/ 허공에 그린/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헛금// 내장산 무르익은 단풍/ 추령고개 넘으며 갈탄 목 축이려/ 장성호를 굽어볼 즈음/ 백양사 추켜세운 울창한 숲 덩달아 고왔다”는 시인이 자연 속의 일부로 동화되어간다. 자연은 이미 시인의 가슴 안에 있는 상상의 자연이 아닌 몸이 먼저 욕망하는 자연이다. “산골 아낙네들 앞서 품은 가을바람/ 살진 감 곱게 전 벌이고/ 제 마음의 정까지 흥정하고 있는” 내장산의 풍경은 정지되고 갇힌 서정이 아닌 열린 자의식으로 인식되고 자연에 동화되어가는 시적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자연의 이면에 터를 잡은 산골 아낙의 ‘살진 감’은 결코 붉은 가을의 서정과 비례한 것만은 아니다. 먹고사는 생존과 직결되는 자연과 인간의 경계에서 붉어가는 가을이 첨예한 대립을 완충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산골 아낙에게는 하루가 천금처럼 애끓는 생계다. 태생적 가난을 체험한 시인은 다만 속내를 내보이지 않을 뿐, 이미 다른 세계를 통해 고단한 전언을 마다하지 않는다. 시인의 촉수는 전신全身이다. 한순간도 생각을 멈추거나 쉬지 않고 대상을 살핀다. <더듬이 짓>처럼 생각을 좇아 몸이 뒤따라간다. 다가가려는 곳은 보이지 않은 미지의 자연 속이거나 자연의 일부로 흡수되어 흔적조차 없는 풍경만 남은 전설일수도 있다. “미지는 언제나/ 낯선 들어섬 앞에 두려움으로 무장한다// 마라난타 존자가 멀고 먼 극동/ 백제에 첫발을 붙인 그 깊은 뜻이나/ 불갑사 대웅전 삼신 불좌상이/ 왜 동쪽을 향해 앉았는지/ 아둔한 자가 어찌 알 수 있을까”라며 반문한다. 진리를 향한 탐문은 오랫동안의 사유를 유발하여 자연에 대한 응시로 나타난다. 그 응시는 표면에 응전된 시간까지도 꿰뚫는 날카로움이다. 백수 해안도로를 따라 시인처럼 찾아들었던 수백 년 전의 마라난타 존자를 떠올린다. 낯선 곳에 대한 탐색은 두려움이 따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보편적 가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 사는 거나 만물이 피고 지는 것마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인식에 다다른다. “잎과 꽃/ 만나지 못한 상사화의 서러움”을 통해 “또 한 삶의 서툰 행보”를 내디딜 수밖에 없음을 자각한다.

티베트 사람들은 평생의 소원으로 오체투지를 통해 삶을 훌훌 벗어던지고 라싸까지 갖은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시인은 티베트 사람들처럼 헛헛한 생의 덧없음을 깨닫기 위해 자연을 순례하며 마음을 청결히 하는 의식으로 수행을 하는지 모른다. 그러한 방향성이 시에서 표출되고 있지만, 사유의 접점은 아쉽게도 이해가 가능한 코드에서 정물화靜物畵되고 만다. 자연의 순례에서 만나는 서경敍景을 더 강한 상징으로 환유하지 못하고 마는 아쉬움이 크다. <비에 젖은 나제통문>의 “나제통문 지나/ 무풍 땅에 들었더니/ 억양 다른 말소리에 귀가 막혔다// 적상산 붉은 치마폭/ 보드라움으로/ 닦아내고 닦아내도 끄떡없더니”라며 자연 속 풍경에서 서사적 의식으로 발화한다. 하지만 “무슨 필설로 이 우매를 타이를 것인가”라며 감상적 애수에서 시적 치환으로 더 진전되지 못한다. <연리지의 꿈>에서도 “기어코 그 꿈 이루고 말리라는 믿음에/ 너 아닌 나로/ 나 아닌 너로/똑 같은 크기의 나이테를 그려내고 있다”며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어 <두 줄기 빛>의 “다 잊고/오순도순 우리의 마음 하나로 섞은 빛/저 동산에 내거는 쌍무지개로/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냥 어울려 살아가자고요”에서처럼 시 세계에서 보여주고 있는 친숙함은 사실 낯섦의 부재에서 오는 위안일 수밖에 없다. 낯섦의 부재라는 것은 유형의 반복으로 시적 긴장감을 떨어뜨려 과소비를 유발한다. 물론 일부는 문학적 가치로 환수되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낭비를 감소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의를 배제한 시대적 통증이 내재된 구체적 발화가 요구된다. 그것은 자연을 통한 언어의 분화에서 확장된 타자성을 환기해야만 가능하다. 그러한 징후의 기미는 멀리 있지 않다. 시인의 시속에서 맹아의 촉이 이미 발현하고 배를 띄울 강물도 남상濫觴에서 비롯됨을 인식하고 있다.

 

촉이올시다

 

어둠을 뚫고 나가는

구부러짐 없는 한 가닥 밝은 빛이요

정적을 뚫고 나가는

날카로운 한 줄기 소리올시다

 

추녀 밑 단단한 돌에 동그란 확을 파는

끊임없는 물방울 그 힘의 첫머리요

도도한 물줄기를 이루어 바다로 흘러가는

남상濫觴이올시다

-<꿈의 씨눈> 부분

 

화랑의 금석문에 새긴 맹세처럼 이 시를 통해 시인은 무언가에 대한 단단한 결의를 내비치고 있다. 그 대상은 오로지 시인만이 알고 있다. 촉을 화살에 매달면 끝없이 날아가 과녁을 맞힌다. 촉은 때로 감感보다 앞서는 혜안이거나 마른 땅을 비집는 강한 힘을 가진 여린 싹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에게 있어 ‘촉’은 보편성에 담보된 언어 체계에 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임이 분명하다. 상처를 입은 언어들은 새살을 돋우려는 강한 의지의 촉수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추녀 밑 단단한 돌에 동그란 확을 파는/ 끊임없는 물방울 그 힘의 첫머리요/ 도도한 물줄기를 이루어 바다로 흘러가는/ 남상濫觴”임을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시는 서술하지 않는다. 시적 감수성이라는 상투성을 탈피하고 차별성을 획득하려는 날카로운 의지의 ‘촉’이 몹시 기대되는 시점이다. 그것은 김계식 시인의 시가 가질 최고의 희망이기에 놓칠 수가 없다. <그릇 비우고>에서처럼 “우 하니/ 제 뿌리쪽을 향해 쏟아지는 낙엽” 마저도 고단한 사계절의 추수라고 본다면 충분한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