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평론

변용變容과 관용寬容 사이

에세이향기 2023. 5. 7. 09:42

변용變容과 관용寬容 사이
-신용목 시집《그 바람을 다 걸어야한다》중심으로




암흑을 꼭 어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굳이 어둠을 말하면서 암흑을 떠올리지 않듯 그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짙은 어둠에 둘러싸인 지리산 어느 낮은 산자락에 든 어둠은 결코 불편하지 않은 어둠이다. 이 어둠은 암흑에서 잉태되었지만, 암흑이 분만한 새끼라 해도 옴팍한 가슴께로 파고든다면 더 이상 어둠이라 불릴 수 없다. 어차피 어둠은 거대한 혼돈 사이에 존재한다는 코라(chora)라는 기제를 통과해야만 가능한 빛으로 우리가 인식해야하는 또 다른 현대적 문학의 언표다. 그 어둠을 오랫동안 응시하면 사물 분별의 안목이 생겨 조금씩 사물에 대한 형상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최근 젊은 시인들이 추구하는 시의 성향은 어둠에서 막 빠져나온 듯 또 다른 시詩의 유형으로 낯설지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유형의 시도 어찌 보면 오랫동안 구습에 갇힌 문단의 풍토에서 빠져나온 어둠의 자식인지 모르겠다. 따라서 기존의 익숙함에 젖어있는 시 문단에서 돌출한 신용목 시인은 신세대를 대표하는 전위 문학의 일원임을 인정해야 한다. 작금에 쓰인 시단에서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신용목 시인의 시를 들여다보면서 그런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어둠에서 마악 빠져나온 듯 《그 바람을 다 걸어야한다》에 실린 시인의 말이 그래서 신선하다 못해 담담하게 들린다. “별자리처럼 흩어져 계신 스승들과/풀씨처럼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위 아래 벗들,/여전히 애잔한 눈빛을 보내는 가족으로부터 나온 이것들을/다시 그들에게 돌려보낸다.”며 진술한다. 결국에는 시인이 써낸 시편마저도 자신이 살아온 곳에서 빌려온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암흑도 성경속 천지창조의 무질서 속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것 자체가 어차피 혼돈 같은 암흑과 뜨거운 물집 속에서 잉태된 생명임을 말해준다. 잉태된 과정이 곧 어둠이기 때문이다. 어둠은 내면의 빛이고 바깥으로 분출될 때 비로소 형상을 드러내는 사물이라고 볼 수 있다. 드러내는 사물 이전 산수유 꽃망울이 물집으로 변용되었다가 활짝 피기까지의 시간을 시인은 우리에게 관용으로 인내해 줄 것을, 과감하게 시적 발화를 통해 요구하고 있다.


데인 자리가 아물지 않는다
시간이 저를 바람 속으로 돌려보내기 전 가끔은 돌이
켜 아픈 자국 하나 남기고 가는 저 뜨거움
물집은 몸에 가둔 시간임을 안다


마당귀에 산수유꽃 피는 철도 독감이 잦아 옆구리에
화덕을 끼고 자다 나는 停年이 되어버렸다


노비의 뜰에나 심었을 산수유나무
면도날을 씹는 봄 햇살에 걸려 잔물집 노랗게 잡힐 적
은 일없이 마루턱에 앉아 동통을 앓고 문서처럼 서러운
기억이 많다


한 뜨거움의 때를 유배시키기 위해 몸이 키우는 물집
그 수맥을 짚고 산수유가 익는다고 비천하여 나는 어깨
의 경사로 비탈을 만들고 물 흐르는 소리를 기다리다 늙
은 것이다
-<산수유꽃> 부분


에서 시의 변주를 시도하는 서정적 모색은 끝이 없다. 우리에게 다가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오래도록 머뭇거렸다. 상처가 아물기를, 그러나 상처는 쉽게 아물 수 없는 거라며 자신의 지난했던 과거를 흉터처럼 들이밀고 있다. 누구나 상처 몇 개쯤은 보이지 않는 가슴에 숨기며 살아간다. 그중 시인도 예외일 수 없다. 산수유 꽃에 맺힌 물집 같은 뜨거움이 상처라니, 데어본 사람만이 아는 통증의 심연이다. 단연코 시적 사유의 중심에서 감지해낼 수 있는 고통을 수반하는 긴 시간의 체험이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유전된 자연에 대한 융숭 깊은 응시에서만 인지 가능한 것이다. 꽃 피기 전 긴장이 도사린 산수유꽃 몽우리의 아픔을 감지해낸 것도 시인만의 선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면서도 “데인 자리가 아물지 않는다”며 아픈 곳을 어루만져 보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상처는 무엇 때문이며 누구로부터 온 상처였을까를 이즈음에서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것은 노비의 뜰에 심어진 천박한 산수유나무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산수유나무는 귀한 약재로 쓰이는 약용성 식물로 천박하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이 천박하게 다뤄져야할 운명이 되어버렸다. 심어진 곳과 귀한 산수유나무를 키워내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사회 인식은 확연하게 달라진다. 산수유나무를 심은 주체는 시인이 알 수 있는 가계를 은연중 지칭하고 있다. 나이 먹어 더 이상 꽃피우지 못한 산수유나무처럼 주인의 처지가 그렇다는 것이다. 스스로 잦은 독감에 몸도 쇠약해져 사람으로 치면 정년이 되어버린 헛 물집만 가득하다. 그러니 그 나무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천박한 부류로 전락해버렸다. 산수유꽃 필 자리 속 “시간의 문장은 흉터이다 둑 위에서 묵은 편지를 태웠던 날은 귀에 걸려 찢어진 고무신처럼 질질 끌려다녔다 날아간 연기가 남은 재보다 무거웠던가/사는 일은 산수유 꽃빛만큼 아득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시인의 아득한 응시는 그곳에서 멈출 수 없다.
<봄 물가를 잠시> 거닐며 상념에 젖어 드는 문청文靑 시절 시인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멍을 때리는 것이다. 여기서도 사물은 우연스럽게 시각적인 의미로 잠입하고 만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추면 내면은 또 다른 시적 인식을 요구하고 있다. 봄 물가에 핀 개나리꽃을 통해 전이되는 사물의 변용은 지체없이 내면의 자아까지 순간 혼란에 빠뜨려버린다. 그 멍 때림이 잠식해온 사물의 천이망遷移罔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직시하며 황망해 한다. 그렇지만 “내 머리 속엔 언제쯤 그 너비를 건너간 뱀이 알을 슬었는지 거품처럼 허옇게 자라고 있다 너무 오래 머뭇거렸다 저것들의 서식지가 되기까지”의 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을 되돌아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 <옥수수 대궁 속으로>의 한갓진 시골 풍경은 어쩌면 시인의 집 일 수도 있겠다. 정오를 가르는 햇빛은 모두를 겨냥하는데, 다만 시적 대상은 옥수수가 있는 서정의 한복판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집에서 “상을 차린 어머니가 마당까지 나서 때 잊은 막내를 불렀지만, 나는 이미 어머니 캄캄한 몸속에서, 간간이 늙은 음성이 어머니를 빠져나가 햇살에 머리를 받고 스러지는 것을” 보고 말았다. 한 톨의 씨알이 저만큼의 옥수수 대궁을 키워 열매 맺기까지 대가가 너무나 참혹했음을 알았다. 어머니의 젊음을 고스란히 잠식하고서야 대체된 시간의 결과였다. 까칠해진 사물을 통해 어머니를 떠올리지만, 세월을 건너간 시간을 저지해볼 방도가 없다. 모든 사물에 대한 외형으로 감싼 세월은 어둠처럼 깊다. 뒤늦게 인식하게 된 비밀을 발설할 의지마저도 무망스럽다. 하지만, 시적 세계의 탐색은 계속 이어진다.


헤집을 때마다 목구멍에 닿는 바닥
눈 없는 마음이 헤어 못 날 깊이로 자진하는 밤은 문
자보다 밝다 발목으로는 설 수 없는 길


별은 아니나 별빛을 삼켰으므로 사람은 아니나 사랑
을 가졌으므로
갈피 없는 산책이 까만 바람에 찔려


死火山 헛된 높이에서 방목되는 햇살 그 투명한 입술
이 들이켜는 분화구의 깊이처럼
허술한 세월이 삿된 뼈를 씻는 우물


온몸의 피가 회오리쳐 빨려드는 사방의 중심으로 잠
결인 듯 파고드는 봄 얼마간
내 아픔은 뜨겁던 것들의 목마름에 바쳐져 있었다
-<우물> 부분


시인의 눈은 사방으로 돋아 있다. 그 눈은 가시의 전형이다. 허투루 돋아있는 가시가 아니어서 중심을 향하고 있다면 그냥 지나쳐 볼 수 없다. 학미산을 다녀오다 발목에 가시가 찔린 모양이다. 그 가시를 통해 잊고 지낸 신체의 구조를 새롭게 인식하는 자기 발견의 시다. 매번 걸을 때마다 가슴까지 전해오는 통증으로 인해 가슴속 어딘가에 있었을 심장을 생각해낸다. 자연의 일부인 가시나무가 시인의 내면으로 들어오는 것은 전혀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우연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침투다. 사람이나 가시나 존재하는 것의 의미는 매 한가지다. 한 우물만 판다는 것에 이견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가 주시하는 곳은 자신의 가시 박힌 몸에만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미리 붉게 물든 홍단풍마저 햇살이 뻗친 가시에 찔린 것으로 상상하고 만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상처 부위를 건드릴 때마다 환해지는 아픔이 기어이 “死火山 헛된 높이에서 방목되는 햇살 그 투명한 입술/이 들이켜는 분화구의 깊이처럼/허술한 세월이 삿된 뼈를 씻는 우물”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접하는 일상이 곧 아픔이고 우물을 파는 일임을 깨닫게 한다. 그 우물을 통해 목마른 목을 축이는 제의祭儀에 새롭게 쓰이기에 그마저도 헛되지 않다는 것이다. “뜨겁던 것들의 목마름”은 항상 중심을 향하고 있다. 아픔으로 전해오는 모든 것들은 곧 삶의 중심이고 그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몽근하게 아파오는 것은 왜 모두 슬픔처럼 어둠의 빛깔로 찾아오는 것일까.


저 산 산새나 내려앉을 골에 들어 아버지 낫을 놀리시
네 달램도 없이 저무는 해 툭툭 나무들 꺾여지는 상처마
다 어둠이 신음처럼 피어나는 것을
나는 넓적바위 위에 앉아 바라보네 나무 속의 어둠과
나무 밖의 어둠 나른한 경계에 서는 검은 낫의 비림 갈
라지는 바람의 능선에서 어미 없는 나방이 고치에서 풀
려날 때 얼굴 없는 기다림아 나는 흔들리는 개망초 시름
을 거두러 잃어버린 길로 내보낸 마음 무릎을 모으면 산
그늘이 걸어와 볼을 비비고 가슴을 쓸어 저 먼저 엎드린
마을로 뚜벅뚜벅
-<낫자루 들고 저무는 하늘> 부분


시인은 아버지의 일상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도 아니라면 과거의 어느 한때를 상상하는지 모른다. 어차피 시는 상상력으로 몰입한 상징이다. 상징은 상상력을 유발하는 시적 시그널이다. 신용목 시인의 시를 살펴보면 내재한 시적 시그널이 간간히 틈을 비집고 나온다. 비집고 나온 틈으로 슬픔과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시적 서정이 어둠처럼 도사리고 있다. 그 서정은 초저녁의 어둠을 지나 사위를 미명 속에 간단없이 노출시키는 긴장이어서 어스름보다 짙을 수밖에 없다. 작은 산골짜기 어느 한 곳에 자리 잡고 낫질하는 아버지를 상상하는 시적 발화가 자연스럽다. 그것은 오랜 체험으로 육화를 거쳐 굳은살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무의 가슴팍을 지지하는 등뼈가 툭툭 꺾여지듯 소리가 자연이라는 사물과 아버지 사이의 틈을 환청처럼 소리로 채워진다. 그 틈새는 항상 안과 밖의 어둠이 혼재하는 것처럼, 아버지와 시인과의 존재 사이에서 감상이라는 간극을 두고 있다. 그러다가 어둠과 개의치 않는 “바람의 능선”은 “얼굴없는 기다림”의 대상으로 상징된 아버지에게 되돌아간다. 그냥이 아니고 “먼저 엎드린 마을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아버지처럼 따라 들어간다. 낯설지 않는 길을 뒤 따라가는 시인의 자아 속 연민은 이미 “한 짐 굽이진 산길 어둠을 받쳐 내려오신 아버지 다시 구들을 지고 앓는 밤 나무들 돌아가듯 연기는 자꾸만 산으로 구부러지” 는 것을 본다. 이런 것을 볼 때 시인의 사물로 다가온 서경을 통한 서정으로의 변용은 극히 상투적일 수 있지만, 안과 밖이라는 대립 항이 아닌 순정한 마음으로의 회귀여서 주저하지 않는다. 사람이나 나무나 어차피 산에서 내려와 산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다. 관용寬容으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을 시인은 또 다른 생의 기제로 변용해내면서 시의 서정을 확장해낸다. 죽음이라는 색깔은 먹먹하게 몰려오는 저녁께의 어둠처럼 회색빛을 띠지만, 무섭게 다가올 때는 어둠보다 암흑처럼 더 짙게 다가온다. <오래 닫아둔 창>에서 보듯 죽음을 연상하는 시인의 사유는 시적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시적 변용에 능한 시인만의 언어의 자유로운 부림을 보여주고 있기에 그렇다. 우선 ‘방’을 통해 시인은 자신을 방의 주인으로 설정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어 ‘골목’으로 나와 ‘세상’을 통과하면서 자아 인식의 올바른 가치를 지닌 생명체로 복귀하지만, 아직은 이르다. 하지만 그 이후에 해야 할 사명을 잊지 않는다. “오로지 그녀를 통과하면서 어른이 되었다/그녀의 몸에 남은 지문에 검거되어 영원한 유배지에서 다시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부채를 껴안게 된다. 오래 닫아둔 창문을 열고 나온다는 것은 죽음 속에 유폐된 내면의 잠을 깨우는 주체이고 자각인 것이다. 그러나 쉽사리 그 “창을 빠져나갈” 수는 없다. 빠져나간 그 이후부터는 고단한 세상과 다시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막 깨어난 눈빛은 혼몽의 상태와 같아 어둠의 빛을 닮았다. 시인만이 갖는 내면은 외면과 항상 맞닿아 언제라도 미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둠은 누추를 바람처럼 데리고 다닌다.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달
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갈대 등본> 부분


자의식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성장통을 수반한다. 시인의 예리한 눈빛은 사물 속 숨겨진 통증을 매번 놓치지 않는다. 그것은 참혹한 아픔을 체험한 사람만이 가능한 몫이다. 시인이 바라본 사물화된 대상은 번번이 성장기 환경과 데자뷔된다. “바람이 부리는 노복”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아버지의 누추도 그와 다름 아니다. 수없이 땀 흘려야 건널 수 있는 하루 치의 무너진 그늘 너머로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은 그래서 더 멀기만 하다. 그럴수록 통증처럼 날아드는 새떼들의 부리는 허공에서 부러진 촉 끝처럼 민망해진다. 전망이 없는 가을 풍경은 빈 둑에 늘어서 있고, 기어이 아버지는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으로 포박되어버린다. 저녁 같은 화석에는 지나온 하루치의 바람이 고스란히 세워졌다. 허리 꺾인 가장이지만, 열심히 살았던 과거의 이력은 등본에 어둠의 지층처럼 남겨져 있다. 고단했던 이력에 빼곡히 수록된 바람 먹은 등본이 아버지의 전부다. 현실 속 과거를 통해 신용목 시가 지향하는 정점은 절망스럽되 비감스럽지 않고 과거에 대한 반추를 통해 재인식하는 것이다. 되려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아 우려스럽지도 않고 부분을 수용하고 긍정한다. 또한, 산문과 시의 영역을 넘나들며 경계를 허물고 있다. 긍정을 매번 반복하면서도 아쉬울 것조차 없고 시의 이미지를 운율로 대체하는 것마저 거부한다. 신용목 시에서 보여주는 추억은 변용과 변주를 거쳐 오히려 시 미학적으로 성공하는 면모를 보인다. ‘염부’나 ‘노복’의 시적 표현을 빌어보면, 성장기 자의식으로 수수된 누추가 심리적으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방증이다. 시인은 자서적인 시를 통해 부채처럼 쌓인 고뇌를 언어 미학적으로 잘 부려내고 있다.
시적 미학은 변용을 통해 관용의 범주까지로 확장된다. 절규(The Cry)를 통해 실존의 고통을 잘 형상화한 에드바르 뭉크처럼 일상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이 휘거나 굽거나 <성내동 옷수선집 유리문 안쪽>은 “잉어의 등뼈처런 휘어진/골목에선 햇살도 휜다 세월도 곱추가 되어”버린 채 그것은 모두 관습적인 일상일 뿐이다. 오히려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인마저도 “어항 속에 형광등이 휘어지듯이/그 앞을 지날 때마다/휘어지는 걸음을 어쩌지 못한다”며 말을 흐리고 만다. 어차피 시적 세계의 사물적 대상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궁극에서는 똑같다. 성내동 옷 수선집 앞을 지나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인간의 개별성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만큼은 누구든지 똑같을 수밖에 없는 관용寬容의 희생자가 되어야만 한다. 인위적 구조물로 뒤덮인 도시 환경의 연쇄 속 지배력에 무력해져 사물에서 대체된 사람마저 스스로 무기력해지는데 불편하지도 않다. 간혹 탈출에 성공한 듯도 하지만,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한 것이 많다. <옛 염전>처럼 황폐되어버린 유배지에서 언제나 탈출을 꿈꾸고 있다. 어차피 뜨거운 폭염도 상처의 중심에 고인 빛이어서 탈출지는 죽음의 색깔을 닮은 어둠이어야만 한다. 그마저 성공하지 못한 경우에는 스스로 풍장에 들어야 한다. 운이 좋다면 주인이 떠나기 전 염전 밭에서 수습된 뼈를 어둠에 묻을 수는 있겠다. 그곳의 “주인은/화장의 뼛가루처럼 남아 빛나는/그 상처들”과 “새로 그은 해안선 무릎을 따라가며/절룩이는 바다가/유언처럼 갈겨써놓은,/대낮”이 다가올 어둠을 기다리고 있다. 시적 의미를 통한 암시는 항상 전망을 어둠처럼 수반한다. <그 사내의 무덤>에서 우리에게 죽음을 다시 환기해주고 있다. 뒷골목에서부터 써늘한 뒤 끝을 따라붙은 죽음까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 매일 반복되는 곱창집에서 “술과 술잔과 술병의 그 어디쯤/올 나간 삶을 매어두고/세월을 흥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 과연 세상에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그래서 유난히 죽음의 이미지가 빈번히 출몰하는 곳도 신용목의 시다. <사과 고르는 밤>의 “제 몸으로 무덤을 삼는 영혼들”과 <왕릉 곁>의 “둥근 것들은 떠난 뒤에도/떠난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며 죽음의 언저리를 맴돈다. 둥글거나 봉긋한 안쪽에는 고요 같은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죽음으로 빗댄 둥근 것이 죄다 죽음과 맞닿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선험을 통해 죽음 이전의 “감당하지 못할 사랑을 덮어주는 것은 이별이다/둥글게 떨어지는 눈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둥글게 덮여진 왕릉도 어차피 오래된 과거로의 시간일 뿐이다.
<톱니바퀴 속에서> 죽음의 이미지는 변용을 거쳐 더 확연해진다. “덧없는 더움이 있어 끝없이 흩어지는 한 줄/연기를 버리기 위해 시린 숨 몰아쉬는 저 능선 예순둘을 돌았어도 으스러지지 않는” 아버지의 굽은 등 뼛속까지 심층으로 인식의 범위를 해부해간다. 시인이 나이 들어감을 방증하듯 그것마저도 관용이다. 고단한 한 생이 세월의 더께에 얼마나 짓눌려서야 시인 자신이 지금에 이르렀는가를 알게 된다. 따라서 아버지의 등을 예사롭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 것마저도 관용 속에 포획된 시인이어서 가능한 것이다. 등속으로 끊임없이 스쳐 간 아버지의 인생이 곧 거센 바람의 등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도 아버지가 겪었던 고단한 시간 속에서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는 생의 목표를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신용목의 시에서 더 이상의 변주나 변용이 낯설지 않다. 궁극으로 통하는 관용이 있기 때문이다. 지구의 자전을 따라 돌면 어지러울까? 묻기 전 이미 시인은 지구 반대편까지 마저 상상해버렸다.


눈 내린다 누군가 구덩이를 파고 있다


아무도 빠져 죽을 수 없는


눈 속인데 손자를 둘러업고
할미는 승강장에 나와 있다


저 나이가 되면 지구의 자전도 느낄 수 있어
연신 기둥을 잡고 어지러운 할미는
-<구덩이를 파고 있다> 전문


때를 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연륜의 세월을 보냈다는 증거다. 노련한 어부가 밀려오는 파도의 놀 수를 헤아리며 바다의 물때를 알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때가 되면 스스로 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것은 지구의 자전 법칙처럼 거역해선 안 될 자연법칙이다. ‘구덩이’는 그래서 우리가 사는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삶의 일상이 그렇듯 어린아이는 성장통의 구덩이를 파고 시집 안 간 처녀는 시집갈 궁리를 하며 스스로 덜미를 잡힐 구덩이를 파고 있다. 아장거린 아기의 발걸음이 자꾸 빨라질 때 행여 너무 빨리 깊은 구덩이로 빠져들까 봐 할미는 “손자를 들러업”고는 걸음을 멈추도록 한다. 그렇게 멈춰진 시간은 업힌 손자나 할미의 멀미 속에 정확히 계산되어 청구서로 날아든다. <삼 년 전>에서처럼 단순 셈법으로 환산해보지만, 어김없는 시간은 삼 년마다 청구서처럼 쌓이기를 반복한다. 시인에게도 삼 년 전의 시간은 일정하게 청구되고 있었다. “삼 년 전, 그때가 언제던가//삼 년 전에 나는, 달리는 차창에 손금을 찍으며/세상을 통째로 지우고 세상을 통째로 다시 그리지 않았던가” 되묻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었음을 안다. 잘려나간 시간에는 꼭 죽음이라는 대차대조표가 단서처럼 따라붙었다. 해마다 손익 계산서로 날아온 <목련꽃 지는 자리>에서는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꼭 죽음이라는 색깔로 어둠을 체워 넣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과 공간이 함께 공존하듯 벼랑과 시간도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붙는다. 끈끈한 접촉면에는 “숱한 어둠의 구멍/속으로 실족/하는/달”처럼 떨어지는 목련꽃을 하나씩 조화처럼 말아 올리고 있었다.
신용목 시인의 시에서 어둠은 우울하거나 슬픔이거나 괴기스럽지 않아서 담담한 수채화처럼 다가온다. 매번 물음표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더 큰 슬픔을 빗장처럼 걸어놓지도 않았다. 오히려 과거나 현재를 체험한 감각적인 시적 세계를 현상된 것처럼 보여주지 못한다. 당연하게 인화를 통해 화려한 색상으로 물들일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할 수밖에 없다면, 나머지는 성공한 것이다. 어차피 사람이 사는 세상을 바라본 인식을 다룬 시의 세계이기에 그렇다. <헛것을 보았네>처럼 우린 누군가에게 물꽃처럼 헛것으로 보이며 사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헛것으로 살다 가는 것은 분명 아니다. “커다란 물거울에 몸 담그는 봄을/허청허청 휘젓고 가는// 고된/걸음”이다. 멈춰버린 하늘의 모습을 담은 무논을 우리 생이 닮았다. 잠시 멈춰 죽음 같은 낯섦을 생으로 변용해내고 관용으로 치환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무논에 내려앉은 이른 봄의 하늘처럼 누군가는 그 평온을 깨뜨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김수영의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는 발설에 일부 긍정하지만, 신용목의 시에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뿐더러 불온한 것마저 변용과 관용사이에서는 결코 불온해질 수 없다. 따라서 신용목 시인이 지향하는 문학의 에너지가 새롭고 조금은 낯설다 해도 결코 전위일 수 없고 문학적인 텍스트에 충실했음을 방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