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평론

풍경과 시간이 살아가는 남녘 섬의 따뜻한 서정

에세이향기 2023. 6. 10. 06:30

  풍경과 시간이 살아가는 남녘 섬의 따뜻한 서정

                                           - 신진순의 시세계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1. 삶의 지극한 원형을 찾아가는 미학적 페이소스

 

신진순의 신작시집 『난파선 한 척, 그 섬에』는 남녘 섬에서 겪어온 삶의 순간들을 낱낱이 기록한 아름다운 풍경과 시간의 도록(圖錄)이다. 시인이 살고 있는 전남 고흥 나로도는 차랑차랑, 하염없이, 오랜 풍경과 시간을 쌓아가는 천혜의 공간이다. 시인은 그러한 풍경과 시간의 흐름을 때로는 잔잔하고 투명하게, 때로는 격정과 회한을 얹어 토로해간다. 시종 진정성 있는 목소리를 통해, 삶의 만만찮은 굴곡을 품은 채, 새로운 희망을 일구어가려는 의지를 충만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풍경과 시간을 발화하는 시인의 언어는 과장된 감상(感傷)이나 충동보다는 은은하고 지속적인 내면적 열정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시인은 내면에서 역동적으로 일고 무너지는 적공(積功)에 시의 중심을 두면서 자신만의 사유와 감각의 결을 촘촘하게 안착해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시집은 삶의 구체적 조건 속에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여러 난경(難境)들에 대해 건강하게 반응하면서 삶의 지극한 원형을 찾아가는 시인의 미학적 페이소스(pathos)가 눈부시게 다가오는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살가운 언어 속으로 한 걸음씩 천천히 들어가 보도록 하자.

 

 

2. 나로도의 풍경이 품고 있는 생동감과 고요함

 

시집의 경개(景槪)를 살펴볼 때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일차적 외관은 시인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나로도의 풍경일 것이다. 그 풍경은 자연 형상의 흐름으로 인화될 때가 많은데, 시인은 그것을 삶의 분명한 배경이자 시의 낯익은 제재로 등극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자연 형상을 통해 삶의 본령을 탐색하고 다짐하는 서정시의 작법을 심층적 차원에서 구현해가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시인은 자연의 근원적 속성을 품어 안으면서 자신의 경험적 기억을 하나하나 집중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이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근원적 관계를 암시하는 방향을 취하면서 자연이라는 것이 넓게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원리나 본성을 포괄하는 것임을 섬세하게 알려준다. 그 안에는 바다 같은 천혜의 풍광은 물론 그것의 생성과 변화에 개입하는 근원적이고 편재적인 인간의 삶이 상당한 지분으로 포함되어 있다. 신진순의 시는 이러한 자장 안에서 태어나 우리에게 섬이 품고 있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경의 생동감과 고요함을 아울러 전해준다. 먼저 다음 작품을 읽어보자.

 

나로도 봉래 장날

열무 다섯 단 마늘쫑 세 단 생선 여섯 무더기

아이들 손꼽놀이 하듯 고샅길에 좌판을 벌려놓은

검버섯 깊게 핀 어제의 수다들이

옹기종기 모둠살이 하고 있다

호미자국 새겨진 푸른 시간을 팔고 있다

묵직하게 기다림을 키우고 있다

 

막 가져온 따끈따끈한 손두부 사세요

도토리묵 들여가세요

일찍 담벼락 아래 자리 잡은 화물차 확성기에서

기계음들 달려 나온다

 

콩나물 천 원

찐빵 이천 원

손두부 한 모를 사고 나자 손지갑이 헐거워

열무며 마늘쫑은 끝내 못 사고 돌아선다

 

흙 속 굼벵이처럼

꼼지락거려 가꾼 목숨들을 팔고 있는 그녀들 등 위로

나로도 동쪽 바다에서 보따리 이고 나온

햇살도 한쪽 자리를 차고 앉아 전을 펼친다

일찍 구경 나온 참새 한 마리

그 위를 가로지르며 노래 한 소절로 마수걸이하는 아침

   ― 「풍경의 서막」 전문

 

이 작품은 나로도의 가장 친근한 풍경 하나를 산뜻하게 부조(浮彫)한 그야말로 이번 시집의 ‘서막(序幕)’이다. 시인의 시선이 머무른 곳은 장날에 펼쳐진 삶의 좌판들이다. 섬 생활의 리듬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 시편에서 시인은 소량의 먹을거리를 파는 고샅길 좌판에서 흘러나오는 “검버섯 깊게 핀 어제의 수다들”을 들려준다. “옹기종기 모둠살이” 하는 이들이 생동감 있게 수런대는 그 목소리는 “호미자국 새겨진 푸른 시간”과 함께 나로도의 심상을 단연 선명하게 전해준다. 어떤 간절한 순간을 향한 묵직한 기다림은 그들이 삶에 주어진 운명 같은 것일 터이다. 화물차 확성기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소리도 “목숨들을 팔고 있는 그녀들”을 확연하게 돋을새김해준다. 바로 그때 “나로도 동쪽 바다에서 보따리 이고 나온/햇살”이 이러한 풍경의 한켠을 거들고 있지 않은가. “일찍 구경 나온 참새 한 마리”도 새로운 주인공으로 참여하여 “노래 한 소절로 마수걸이하는 아침”에 나로도 ‘풍경의 서막’은 그렇게 환한 생동감으로 열리고 있다. 삶이 경전처럼 다가오는 그 순간, 우리도 “시간도 오래 묵으면 저렇게 견고한 경전”(「곰보 갯바위」)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가게 된다. 다음은 어떠한가.

 

초여름 나로도에선

함지박 속 햇살도 갯장어가 된다

 

허리가 수평선보다 낮게 내려온 저 할머니

자신과 함께 늙은 함지수레에 들통 하나 싣고

삼거리에서 동포마을 쪽으로 반쯤 식은 태양을 밀며 간다

 

고무 함지를 노끈으로 꿰매 어깨에 걸친 은백의 세월

무임승차한 갯벌에서 건져 올린 비릿한 체념과 파도 소리까지 싣고

노을 속을 지친 소처럼 느릿느릿 걸어간다

 

몇 걸음 가다 멈춰 서서 굽은 허리 양손으로 받치고

등 굽은 독백 한 줌 해변 저쪽으로 푸념하듯 날리며

긴 숨으로 천리 길 가듯 한 뼘 길을 간다

 

유월의 송엽국 한 무리가

분홍빛 졸음을 켜둔 채 당직을 서는

근무자 없는 허깨비 파출소 담장 밑, 길고양이 한 마리

그 걸음길 멀거니 쳐다보다 애 터지고 허기져서

전생을 핥아대며 마냥 앉아있다

 

파도를 접으며 귀가하는 할머니

함지박 속에서 우글거리던 햇살이 스러지고 있다

   ― 「햇살의 무게」 전문

 

이번에는 초여름의 나로도에 번져가는 ‘햇살의 무게’가 선연하게 다가온다. 시인의 시선은 “허리가 수평선보다 낮게 내려온” 할머니 한 분이 “자신과 함께 늙은 함지수레”에 들통을 싣고 걸어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 “반쯤 식은 태양을 밀며” 걸어가는 할머니는 “은백의 세월”에 비릿한 체념과 생의 피로감을 실은 채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그 세월의 안쪽으로는 파도 소리도 세차게 들리고, 노을빛도 은은하게 비치고, 느릿한 소처럼 걸어온 오랜 시간도 자욱하게 아른거린다. “굽은 허리”나 “등 굽은 독백 한 줌” 같은 곡선의 숨결로 걸어가는 길에는 “유월의 송엽국 한 무리”나 “길고양이 한 마리”가 졸음과 허기를 안고 배경처럼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오늘도 한세월 그렇게 “파도를 접으며 귀가하는” 할머니 함지박 속에서 하루의 햇살도 조금씩 저물어간다. 장터의 생동감과는 달리 노경(老境)의 허허로움을 감각적으로 각인한 이 시편을 통해 우리는 남녘 섬을 두르고 있는 고요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거기는 “느린 바람과 구름을 풀어놓은 노인들이/양떼처럼 기다림을 키우는 곳”(「신초마을」)이기도 할 것이니까 말이다.

 

이처럼 신진순 시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섬의 소리들을 때로는 생동감으로 때로는 고요함으로 재현하면서 그 안에 엄연하게 움트고 펼쳐지고 사라져가는 삶을 포착한다. 햇살이 수런대는 풍경을 통해 스스로 자연 풍경 안에 몸을 담그기도 하고, 언어를 멈추고 풍경만이 육체를 얻어 자신의 소리를 내게끔 하기도 한다. 그 순간 시인은 자연이 건네는 침묵의 소리를 들으면서 나로도의 필경(筆耕) 작업을 충실하게 수행해간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시쓰기는 시간에 대한 신선한 감각과 다양한 공간으로의 여행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자연 사물에 의탁하여 내면을 비유하는 단조로운 방식을 넘어 내면의 고갱이가 한껏 빛나는 순간을 독자적으로 담아내는 것이다.

 

신진순 시인은 이렇듯 형식적으로는 단단하고 구심적인 미학을 보여주는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서정의 격과 품을 깊이 각인해간다. 그녀는 이러한 서정의 빛나는 순간을 단순한 산문적 의미로 환원하지 않으려는 남다른 의식을 통해 풍경과 시간의 고유한 양태들을 충실하게 표상해가는 것이다. 이러한 균형 감각으로 시인은 모든 아름다운 것은 삶의 구체성과 만나 ‘시적인 것’을 이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언하고 있다. 이때 우리는 나로도에서 펼쳐가는 이들의 삶에 숨어 있는 생동감과 고요함의 순간에 귀 기울이면서 힘겨운 삶을 견디고 치유해가는 이들의 존재론적 심층에 조용히 가닿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이 ‘나로도’라는 남녘 섬에 우리가 상상적으로 다다르는 순간을 차곡차곡 담고 있다 할 것이다.

 

 

3. 가장 깊이 내려지는 시간의 닻

 

더불어 신진순은 장강대하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낱낱 존재자들의 고유한 삶의 모습을 충실하게 담아가는 시인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시간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운명에 대한 확인과 성찰이 단아하게 녹아들어 있고, 몸 속 깊이 새겨져 있는 시간의 흔적에 대한 진중한 탐색 의지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실존을 뚜렷이 응시하면서 그 안에서 파동치는 시간의 깊이를 함축하는데, 이때 그녀가 그려내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내면에서 지속되는 어떤 주관적 흐름을 은유적으로 함의하는 것이다. 신진순 시인은 이러한 고유한 시간 경험을 통해 자신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끊임없이 성찰해간다. 그만큼 시인은 자신이 처한 현재형에 구체적 육체를 입히는 방식으로 경험적 시간을 낱낱이 형상화하고 있는 셈이다.

 

거품으로 부서지는 자신을, 파도는

바위에 새겨두고 싶은 건지

제 몸을 돌덩이에 모질게 부딪친다

 

온몸을 부딪치고 부딪쳐서

끊임없이 때리는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고 눈에 익다

 

눈에 담아둔다는 말이

한때 위로가 된 적이 있었다

고개 한쪽으로 약간 돌리고

한쪽 발부리 살짝 방향을 바꾸니

그 풍경이 바로 사라지는 걸 몰랐다 그때는

 

발밑에 서걱이는 모래 같은 지나온 시간들이

손으로 긁고 발로 밟아 뇌 속에 일상으로 새겨진다

나란, 그 자잘한 손발의 움직임들이 켜켜이 쌓인 퇴적층

 

눈에 담아두는 게 아니라

손발로 땅에 새기며 견딘다는 말이

깊숙이 가슴을 파고드는 날이다

   ― 「시간 퇴적층」 전문

 

오랜 시간이 층층이 퇴적되어 있는 지층은 어쩌면 인간 보편의 삶을 은유하는 듯하다. 자신을 바위에 새겨두고 싶다는 듯이 온몸을 돌에 부딪치는 파도의 모습을 두고 시인은 “눈에 담아둔다는 말”을 떠올린다. 한때 그러한 표현에 위안을 받곤 했는데 이제는 고개를 돌리고 발의 방향을 바꾸니 그러한 풍경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노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지나온 시간이 일상으로 새겨진 지금, 시인은 자신의 존재가 바로 “그 자잘한 손발의 움직임들이 켜켜이 쌓인 퇴적층”이었음을 천천히 알아간다. 시인은 “손발로 땅에 새기며 견딘다는 말”을 가슴을 깊이 담아두면서 거듭 존재론적 갱신을 진중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 퇴적층’은 시인에게 그만큼 중요한 전회(轉回)의 순간을 허락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시인은 “섬 한 채 품고서 허공 저쪽 음각의 날들 깊이로/침잠”(「곰보 갯바위」)해가면서 또다시 오랜 시간을 쌓아가고 있을 것이다.

 

퇴실하는 손님 중에 팔십팔 세 할머니가

지팡이를 잡지 않은 다른 손에 꼬옥 쥐고 온

망설임 세 쪽

 

애들이 버린다는데 아까워서

한쪽 먹어봐 하시더니

내 손바닥에 낮달 닮은 사과 세 쪽 올려놓는다

 

배웅을 마치고 마당에 서서

그녀가 주고 간 마음 세 쪽을 먹는다

그녀가 건너왔을 허기진 시대를 천천히 씹어본다

 

사과진이 끈끈한 나의 빈 손바닥 뒤쪽

마을 입구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자동차 한 대 허연 연기로 손 흔들며 가고

구불구불 산허리를 끼고도는 나로도 바닷가

갈매기 한 쌍 그리움을 가르며 멀어져간다

   ― 「사과 세 쪽」 전문

 

이번에 시인은 ‘사과 세 쪽’이라는 구체적 사물을 통해 시간에 관한 따뜻한 은유를 빌려온다. 나로도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시인의 구체적 체험을 담고 있는 이 시편은, 거기서 만난 할머니 한 분을 은은하게 조감(鳥瞰)한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다른 손에는 “망설임 세 쪽”을 쥔 할머니는 버리는 게 아깝다고 시인의 손바닥에 “낮달 닮은 사과 세 쪽”을 올려놓는다. 그 사과들은 어느새 “마음 세 쪽”이 되어 시인으로 하여금 할머니가 “건너왔을 허기진 시대”를 돌아보게끔 해준다. 그 순간, 산허리를 끼고도는 나로도 바닷가의 갈매기 한 쌍도 마치 “마음 세 쪽”처럼 오랜 시간의 그리움을 가르며 날아가고 있다. 누군가 건넨 따뜻한 마음의 “보이지 않은 그 어떤 힘이/서서히 내 안에서 새순처럼”(「기억, 존재의 우물」) 돋아나던 순간을 시인을 이렇게 들려주고 있다. 시인의 온화하고 성실한 성정(性情)이 따뜻한 시간의 닻을 내리는 순간이 아닌가 한다.

 

신진순의 시는 이처럼 오랜 시간에 대한 경험 형식 혹은 회상으로 발원하는 경우가 많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거나 아주 오랜 시간이 쌓인 지층들을 되살필 때 시인의 감각과 사유는 고유한 색상과 향기로 한없이 번져간다. 그렇게 시인의 시는 시간에 대한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특성을 지님으로써 존재론적 성찰의 목소리를 폭 넓게 들려주는 세계로 우뚝하기만 하다. 시인은 시간의 근원에 대한 사유와 감각을 축적해오면서 남다른 깊이를 지닌 시인으로서의 표지(標識)까지 우리에게 들려준 것이다. 그리고 시인이 내린 시간의 닻은 이때 가장 깊은 곳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4. 묵중하고 진정성 있는 긍정의 실존적 인생론

 

궁극적으로 신진순의 이번 시집은 이 시인만의 남다른 실존적 인생론으로 귀결되어간다. 시인의 인생론적 경험과 혜안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심미적 언어는 충실한 기억에 의해 조직되고 구성된 예술적 흔적으로 끝없이 넘실댄다. 오랫동안 시인 나름의 아름다운 기억을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로 환치하는 작법이 여기서 비롯하였을 것이다. 이는 시인 자신이 겪어온 나날에 대한 헌사이자 충만한 현재형으로 그것을 변형해가려는 미학적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삶의 심연에서 피워올리는 국량(局量)을 넉넉하게 견지하게끔 해주는데 그 원리는 많은 경우 역설적 사유와 감각에 기초하고 있다. 다음 사례를 한번 들여다보자.

 

해풍의 모서리를 만지면

낮은 바다를 배로 기어온

바람의 손끝마다 오래된 지문이 묻어나고

대낮에도 심호흡이 길게 밀물진다

 

테라스 위로 하루치 그늘이 드리워지면

섬마을 나로도는 집이고 뜰이고 온통 메마른 갯벌이 된다

벽, 빗자루 밑, 민들레 풀섶

어둡고 습한 곳은 어디든 게들의 전설을 들쓴 움막이 되고

베란다 한쪽 모서리로 난파된 다리 붉은 게 한 마리

갯내음 풍기며 칠월 햇볕에 일생을 바짝 말리고 있다

 

내 이름이 쓰인 조각배 하나

부풀린 삶에 눈멀고 부주의한 일상에 좌초되어

요동치는 물살에 중심 잃고 휩쓸려 밀려온

이 섬에 근심 한 채 짓고 말았으니

 

벌레 울음과 파도에 따라 출렁대는 지구 바다

망망한 대양에 삼각자처럼 홀로 떨어진 조각배

저마다 가는 곳도 정박할 곳도 몰라 허둥거리는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모두는 좌초된 난파선들

 

저녁이 되자 바위섬에 둘러싸인

마을 입구 샛강 같은 바다에서 김이 기어오르고

이따금 허공 안쪽, 생 저편으로

먼 항해를 마친 나뭇잎 하나 바닥 근처로 닻을 내린다

   ― 「난파선 한 척, 그 섬에」 전문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편은 나로도에서 살아가는 “난파선 한 척”의 자의식을 역동적으로 담아낸 ‘시인 신진순’의 인생론적 축도(縮圖)이다. 언제나 시인을 감싸주는 “해풍의 모서리”와 바람의 손끝마다 묻어나는 “오래된 지문”이야말로 나로도라는 섬을 구성하는 일차적 질료일 것이다. 테라스 위로 쏟아지는 “하루치 그늘”은 섬마을 나로도를 집이나 뜰이나 갯벌로 만들고, 민들레 풀섶처럼 어둡고 습한 곳은 게들의 움막으로 어느새 몸을 바꾼다. 이러한 역동적인 섬 풍경을 배음(背音)으로 삼아 시인은 “내 이름이 쓰인 조각배 하나”를 상상해본다. 삶에 눈멀고 일상에 좌초되어 물살에 중심을 잃고 밀려온 “근심 한 채”가 그 배와 등가를 이루는 순간, 시인은 그 “망망한 대양에 삼각자처럼 홀로 떨어진 조각배”가 가는 곳도 정박할 곳도 모르는 “좌초된 난파선”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신진순 시인은 역설적 사유에 기초하여 난파(難破)의 여정 속에서도 “이따금 허공 안쪽, 생 저편으로/먼 항해를 마친 나뭇잎 하나”가 바닥 근처로 닻을 내리는 순간을 목격함으로써, 자신의 “생에 새순이 솟아나는 순간”(「헛탈」)과 함께 “또 다른 삶이 들어찰 여백”(「먼지 퇴적층」)을 마련해간다. 궁극적으로 역설의 사유와 감각에 바탕을 둔 묵중하고 진정성 있는 긍정의 미학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삼년 전 서울서 끌고 온 화분 하나

밑동부터 들뜨고 말라가는 뿌리들이

상한 발가락처럼 아프다고 보챈다

 

도시 아파트 유리창 아래

따스운 식물의 날들에서

어느 날 문득 폭력처럼 해풍 속으로 옮겨진

푸른 것들의 생애가

통째로 설움 같은 삶을 버티고 있다

 

물길 따라 이어지는 바닷가를 서성여도

발밑까지 따라와 나를 적시는 작은 신음들

이 섬에 아직 마음 한 자락 펼 곳 찾지 못해

뒷짐 지고 눈발 흩날리는 섬 지붕 위에

여기까지 끌고 온 서울 회색 하늘이 떠있다

섬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장승처럼 말이 없고

길 가장자리 풀들이 스산한 바람에 흔들린다

 

견뎌야 해, 강한 주문 같은 말

마음을 동여맨 의지처럼

머리에서 내려와 가슴으로 파고든다

 

후회의 끈으로 꽁꽁 묶인 지난날을

들고나는 물결 위 먼 하늘로 날려 보낸다

   ― 「마음을 동여매다」 전문

 

신진순 시인은 나로도에 올 때 가져온 화분에서 밑동부터 들뜨고 말라가는 뿌리들을 아프게 바라본다. 익숙한 도심의 따스운 아파트에서 문득 사나운 해풍 속으로 옮겨진 푸른 생애가 설움처럼 다가온다. 안간힘으로 버티는 것처럼 보이는 화분은 어느새 시인의 분신처럼 스스로의 색을 입는다. 시인 또한 바닷가를 오래 서성여도 “발밑까지 따라와 나를 적시는 작은 신음들”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아직도 섬에 마음 한 자락 펼 곳 찾지 못해 “여기까지 끌고 온 서울 회색 하늘”을 겹쳐놓는 시인의 모습이 선연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시인은 견딤의 주문을 스스로에게 건네면서 “마음을 동여맨 의지”를 선보임으로써 고유한 긍정의 실존적 인생론을 펼쳐간다. 후회의 끈으로 묶인 날들이 먼 하늘로 날아가는 것이 느껴지는 때야말로 시인의 그러한 긍정의 마음이 섬 안쪽으로 더욱 동여매지는 순간일 것이다. 시인은 그렇게 “간절해야 열리는 길이 있다”(「우주를 가로지르는 누리호」)는 것을 깨달아간다.

 

이처럼 그녀의 시는 자신에게 전하는 스스로의 존재론적 위무(慰撫)이자 치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담아가고 있다. 시인은 섬에 대한 역설적 사유와 감각에 기반을 두고 그에 상응하는 항해와 견딤의 은유로써 자신의 생을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삶의 절실함과 진정성을 환기하는 장치를 섬에서 찾아낸 후 거기에 스스로를 투영하는 과정을 덧붙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존재론적 도취로 흘러가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시인은 구체적 상황을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그 안에 갇히지 않고 견고한 긍정의 인생론으로 실존적 조건들을 갱신해가는 것이다. 그 실존적 인생론이 묵중하고 진정성 있는 흐름으로 훤칠하게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5. 성스러운 삽화를 통한 ‘사랑의 시학’

 

모든 기억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낱낱 재현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이의 현재적 욕망에 의해 선택되고 구성되는 동일성의 원리로 자신의 본령을 삼게 마련이다. 신진순 시인의 기억 또한 자신의 현재적 욕망과 연루되어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세상이 살 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근원적 터치로 보여주려는 의지는 단연 신진순만의 미학적 기둥을 이룬다. 이는 시인이 노래하는 가장 선명한 전언(傳言)의 원형일 것이다. 시인은 가혹한 시간의 무게를 견디면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기억을 새기게끔 도와주는데, 특별히 자신의 시를 어떤 성스러움의 사건으로 바꾸어가려는 노력을 비친다. 그녀에게 ‘시(詩)’란 이처럼 언어의 도구적 기능을 넘어 언어를 통해 어떤 성스러운 기억의 차원에 가닿는 미학적 사건이 된다.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origin)까지 암시하면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기억의 방식은 시인으로 하여금 성스러운 삽화를 통한 ‘사랑의 시학’을 창안하게끔 해주고 있다 할 것이다.

 

세상의 남쪽에 있어도 봄은 가장 더디게 당도하던 섬

아니다. 버려지는 생의 온도는 꽃 핀 계절에도 늘 겨울이었던

가엽고 아름다운 나의 섬, 소록도의 시간들을 태운 연기가

내 목울대를 매캐하게 막고

내 눈동자를 노을빛으로 물들이며 앞바다로 흩어진다

   ― 「소록도 큰할매 마리안느」 중에서

 

무無, 무한한 허공을 꽉 채운 그 말

벽에 걸었던 네모난 시간도 내리고

 

서랍을 열자 무수한 사연이 쌓인 퇴적층들

그것들 다 품고 갈 수 없어 물기로 흐려지는 눈

 

눈을 뜨면 마주하던, 내 평생이 하루처럼 기도가 되게 했던

책상 위 하얀 유골마저, 이제는 흙 속으로 돌려보내야 할 때

   ― 「소록도 작은할매 마가렛」 중에서

 

이 두 편의 서정시에는 한센 인들을 수용했던 소록도에서 천사와도 같은 봉사 활동을 해온 두 분 수녀에 대한 지극한 헌정의 마음을 담고 있다. 환자들 사이에 ‘큰할매’로 불린 ‘마리안느’와 ‘작은할매’로 불린 ‘마가렛’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미 한국 사회에 많이 알려진 이 천사들에 대해 시인은 그분들이 쌓아온 시간의 성스러움으로 화답한다. 그분들은 “세상의 남쪽에 있어도 봄은 가장 더디게 당도하던 섬”을 찾아와, 그 섬을 가엽고 아름다운 섬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분들의 삶은 시인의 목울대를 막고 눈동자를 노을빛으로 물들였다. 그 사이로 이분들 발자취가 서서히 이울어오는 순간, 시인은 “무수한 사연이 쌓인 퇴적층”과 “물기로 흐려지는 눈”을 남겨준 이들의 기도를 생각한다. 논리적으로는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없지만, 분명한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남은 이분들의 성스러움으로 남녘 하늘이 천천히 물들어가고 있다.

 

우리 삶 가운데는 이성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성한 이야기들이 많이 흐르고 있다. 이때 서정시는 이러한 신성한 사건에 대한 경험적 재현의 양식임을 선언한다. 또한 이러한 성스러운 빛에 대한 재구성을 통해 우리 모두를 경건하게 하는 힘을 보여준다. 여기서 근원을 탈환하면서 새로운 삶을 지향해가는 돌올한 상상력이 최종 심급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말할 것도 없으리라. 존재의 출발점과 최종적 귀속처가 되는 이러한 근원적 사랑의 장면이야말로 현실에서는 경험 불가능한 세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대안적 힘이 아니던가. 이제 우리는 신진순의 시가 성스러운 삽화를 통한 사랑의 시학을 보여주면서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친화력 높게 노래한 세계임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된 경험이나 지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삶의 형식을 이룬다. 그렇지만 지나간 시간에 대한 일방적 미화나 부정은 오히려 우리를 무력하고 고단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쓰고 읽는 서정시에는 이러한 일방적 미화나 부정보다는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삶의 차원을 암시하는 개진의 상상력이 나타나게 된다. 신진순 시인은 시간의 불가피한 흐름을 삶의 형식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거기서 비롯되는 유한자로서의 겸허함과 역설적 역동성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서정시의 존재론을 완성한다. 삶의 고단함과 명랑함의 적절한 결합은 세계내적 존재로서의 인간적 실존이 가지는 긴장과 성찰을 미덥게 들려주고 있다 할 것이다. 이는 우리 시단에 생동감 있으면서도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균형 감각을 지닌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난파를 넘어 긍정의 미학에 이르는 드라마로서 이번 시집이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 받기를 바란다. 풍경과 시간이 살아가는 남녘 섬의 따뜻한 서정으로 굳고 정한 결정(結晶)을 보여준 시인의 고투와 성취에 경의를 드린다. 이러한 시집의 성과를 딛고 넘으면서 시인의 다음 여정이 더 광활한 지평으로 나아가기를 마음 깊이 바라마지 않는다.

 

 

 

 



『난파선 한 척, 그 섬에』표사

 

신진순의 신작시집 『난파선 한 척, 그 섬에』는 남녘 섬에서 겪어온 삶의 순간들을 낱낱이 기록한 아름다운 풍경과 시간의 도록(圖錄)이다. 시인이 살고 있는 전남 고흥 나로도는 차랑차랑, 하염없이, 오랜 풍경과 시간을 쌓아가는 천혜의 공간이다. 시인은 그러한 풍경과 시간의 흐름을 때로는 잔잔하고 투명하게, 때로는 격정과 회한을 얹어 토로해간다. 시종 진정성 있는 목소리를 통해, 삶의 만만찮은 굴곡을 품은 채, 새로운 희망을 일구어가려는 의지를 충만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풍경과 시간을 발화하는 시인의 언어는 과장된 감상(感傷)이나 충동보다는 은은하고 지속적인 내면적 열정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시인은 내면에서 역동적으로 일고 무너지는 적공(積功)에 시의 중심을 두면서 자신만의 사유와 감각의 결을 촘촘하게 안착해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시집은 삶의 구체적 조건 속에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여러 난경(難境)들에 대해 건강하게 반응하면서 삶의 지극한 원형을 찾아가는 시인의 미학적 페이소스(pathos)가 눈부시게 다가오는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