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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사람의 깊이 20집 이상인 시집 해설/박철영

에세이향기 2023. 7. 8. 07:33

사람의 깊이 20집 이상인 시집 해설

 

순백해진 말들의 상상속 우화羽化

-이상인 시집《툭, 건드려 주었다》

시인, 문학 평론가 박철영

 

어둑해질 무렵

인 밭둑길을 퍼덕이며 달아나는 암탉 한 마리

배고픈 어른들이 새까맣게 뒤쫒아 가고 있다

-두 번째 시집 《연둣빛 치어들》 <쥐불>전문

대체적으로 네 번째 시집 이전까지의 이상인 시인은 은은한 서정에 근접한 시적 세계를 성찰하고 사유한다. 두 번째 시집 《연둣빛 치어들》에서도 시골 아이들의 순박한 모습을 교사의 눈으로 바라본다. <산마을 학교15 _ 호재의 책가방>의 “범 바위골에서 새벽밥 먹고 달려온/호재의 책가방 속에서/노랑턱멧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국어책을 꺼내자/푸드득 교실 뒷문으로 빠져 날아간다.//호재의 가방 속에는 늘 날고 싶은/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며 아이의 희망을 염원하고 있다. 그 아이들의 현재 모습과 닮은 시인도 유년기 담양의 산골에서 나고 자라 가난이 주는 아련함은 남달랐을 것이다. <청솔 연기>에서는 시인의 시적 세계 깊숙이 박혀있는 “우리들의 가슴 맨 밑구들장에서 흘러나와//왈칵, 눈물 솟구치게 하는 그리움의 뿌리.”가 어디까지 닿아있는가를 알 수 있다. 절망이라는 환경에서 기어이 찾아낸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런 희망들이 자신 뿐만이 아닌 세상의 건강한 출구가 되기를 소원한다. 출구를 빠져 나온 시인의 눈이 더욱 바빠졌다. 네 번째 시집 《툭, 건드려 주었다》에서 이상인 시인의 시적 세계의 확장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사람에 머무르지 않고 사물事物에 닿아 일여一如로 다가간다.

 

 

1.

시인은 시로 세상을 산다. 시가 밥이고 술이다. 그래서 슬프거나 기쁘거나 죄다 시가 세상이다. 세상 때문에 시인은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다. 이상인 시인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이는 것과 듣는 것을 시로 옮겨가기도 바쁜데 그럴 틈이 어디 있을까 싶다. 시를 읽어가며 자꾸만 아이를 닮아가는 시인을 떠올렸다. 그냥 아이의 눈이 아닌 아이 같은 눈이다. 쉰여섯 아이 같은 시인의 시편이 참 맑고 곱다. 차마 읽기도 아까운 시다. 읽어가면서 서서히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시인의 시를 몇 번씩 들여다보는데, 시인은 어느 때부터 사물에 다가갔고 그 소리를 애써 들으려 마음의 빗장을 열기 시작한다. 마음이 열리니 사물의 소리가 귀로 들려왔다. 소리는 대 자연의 질서인 이치의 소리다. 그렇게 열린 소리를 촘촘히 담은 시를 펼쳐 섬진강가 은모래 둔치에 돗자리 하나 펴고 간절해지고 싶다.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흐르는 강물 속 은어 떼가 튀어 오르다 수평선의 현을 밀쳐 내는 소리까지 귀담아 듣고 싶다. 이상인의 금번 시에 나타나는 특이한 점은 자연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찾아내 자연과 닮아가자는 데 있다. 지금껏 살아오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줄 알았고 사는 데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것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늦었지만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겸허한 모습이 진지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귀가 비로소 열린 것이다. 그 소리는 꼭 소리가 아니더라도 괜찮다. 온 몸이 귀처럼 열렸기 때문이다.

 

목욕탕 한쪽에 누워 있는데

누군가 내 이마를 툭 친다.

내가 누울 때부터 점점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

아마도 내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또 생겨난 물방울 하나가

이번엔 내 오른쪽 귀를 때리고 잘게 부셔진다.

저 헛생각처럼 자꾸 생겨나고 있는

크고 작은 물방울들은 나를 바닥으로 여기겠지만

나는 천장이 바닥으로 보인다.

-<물방울>에서

 

시인은 목욕탕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바닥을 등에 대고 세상을 올려다보니 지금껏 인식하고 있는 천지天地의 구분이 틀렸음을 알게 된다. 사람 중심이 아니란 것을 깨달아간다. 놀랍지 않은가. 누구나 자신이 중심이고 남은 변방이었다. 자신이 밟고 선 곳이 바닥이라지 않았던가. 그 바닥에다 무엇이든지 깔아뭉개 짓밟아야만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상인 시인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스스로 자신이 세상의 불편한 왜곡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내 살아온 만큼의 무게로 떨어져/가닿아야 할 저 천장 너머 무궁한 바닥/아득하게 깊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단순해지면서 깊어지는 사유를 본다. 나이 들어가며 집착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내려놓는 의지다. 사물事物로 다가오는 일상을 통해 자신의 그릇된 생각을 깨우치고 있다. 지금껏 살아온 세상살이가 단순한 감각에 치우쳐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이마로 떨어진 물방울이 "이번엔 내 오른쪽 귀를 때리"듯 부딪쳐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외부의 소리가 비로소 귀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왔다. 감각에 무뎌진 삶에 비로소 바른 세상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 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아집에서 벗어나게 하는 참 자아에 대한 뒤늦은 각성이다. 하찮은 물방울 하나 떨어져 사라지는 것이 무에 그리 대수겠는가. 그렇지만 귀에 드는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관점의 변화가 시작된다.

몸에 부딪힌 물방울의 형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완전한 변화를 이룬다. 그런 물방울에 오히려 불완전한 사람이 변화되어버린 것이다. 변화는 시인의 열린 귀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람 외의 세계에 대해 다름이 아닌 일여一如의 자세로 바라보게 된다. 무한한 생명에 귀를 기울인다. 귀로 들은 소리가 궁륭의 파안인 것이다. <소쩍새 울음>에서 소쩍새가 울음을 울 때 예전에는 그냥 우는 것이라고 여겼다. 소쩍새의 울음에 젖어들어 시 한 편 휘갈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소쩍새가 운다/제 이름을 부르며 대속하는 양/가슴속에서 울고/기운 어깨의 통증에서 운다"며 인간의 욕망에 대한 죄를 대속하는 회한과 참회의 눈물이다. 그토록 진정한 소쩍새의 마음을 받아 적고 있다. 미물의 소리가 서서히 인간의 소리로 변주되고 있다. “정말 어떤 울음소리는/맑아서 아침 이슬처럼 맺히기도 한다는데/세상을 많이 걸어온 이들에게는/절걱대는 무릎 속에서/시큰시큰 울어준다고 한다./걸어오고 뛰어오면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지/손에 힘껏 그러쥔 것들은/어떻게 거리낌 없이 내려놓을 수 있었는지/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잠시 뜸을 들였다가 울기도 하고/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승에서 전생으로/후생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운다.”는 구슬픈 사람의 생이 한낱 꿈같더라는 이야기였다. 그 사람은 전생에 자신만을 위해 살다간 사람이었다. 죽어서야 탐욕을 놓을 수 있었음을 소쩍새는 울음을 통해 곡진하게 전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 무상無常 한 것이라며 깃을 펼치고 있다. 그토록 절박한데 소쩍새의 날갯짓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마저 아무 소용이 없다.

강진 다산초당, 고개 넘어

백련사 숲에서 만난 동백나무 몇 분은

온 몸에 귀를 달고 있는데요.

-<이륜耳輪>에서

 

만권의 책을 공부해도 몸에 넣지 못하고

천 번의 이별과 사랑을 기약해도

그 뜻을 듣지 못하는 내 귀 근처를

-<경經, 중얼거리다>에서

 

가끔씩

입이 돋는 이도 있지만

콩알만 한 귀가 여기저기에 생겨나고

무럭무럭 자라서

그 동안 안 들리던 이세상의 소리들을

세심하게 듣는다고 한다.

-<목이전木耳傳>에서

 

이 세상의 온갖 목소리를 다 들어주시던

당신의 그 큰 귀 하나가

스르르 풀어져 내려

이 봄날,

온천지에 무성한 소식들로 그득합니다.

-<황사>에서

 

시인의 시를 읽으며 옛날 옛적 할머니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시인의 시를 펼치면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귀부터 기울여진다. 이상인 시인의 시가 소란함을 일거에 잠재우듯 우리 귀를 붙들어 매고 있다. 시인의 상상력이 우화 속 변용을 거쳐 다가오는데 동화 몇 편을 펼친 듯 즐거움을 주는 시다. 강진 다산 초당은 그 자체가 많은 의미를 던져주는 실재다.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수신과 성찰을 이룬 곳이기에 그렇다. 다산초당까지 찾아와 드러나 보이는 것만 보지 말라며 속물 같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화두다. 그렇다고 화두라 해서 무겁거나 심오하여 깊은 지식이 필요한 것은 더욱 아니다. 아이에게 조곤조곤한 귓속말로 들려주는 이야기 같아 귀에 쏙쏙 들어온다. 그러니 동화 같은 시다.

다산 초당 옆 백련사 동백나무 숲을 지나다 시적 상상력이 더해져 이룬 시가 <이륜耳輪>이다. 짓궂게도 동백나무 몸통에다 사람처럼 귀를 달아주었다. 전혀 어색하지 않다. 거기다 시를 종결하는 방식도 “~는데요.” 또는 “~거나 ~네요.”라는 형식을 취해 독자에게 편하게 읽힌다. <耳輪>을 그대로 옮겨 쓰면 귓바퀴다. 귀에다 바퀴를 달아 굴러다니도록 하여 세상의 소리를 경청하겠다는 것까지가 전부다. 이제 조용조용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말들이다. 귀를 통해 들으려는 것은 구강포의 철새 울음소리와 서걱대는 갈대 소리 정도면 족하다. 그마저 귓바퀴를 굴려가며 들으니 더할 나위 없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고 모두의 이상향이다. 경세치용에다 경청을 더했으니 그만한 성찰이 없다. 하지만 성찰을 이루기엔 멀기만 하다.

시로 시를 구할 수 없고 더욱이 시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무기력과 불감증에 빠진 시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시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경經, 중얼거리다>라며 경을 시처럼 중얼거리고 있다. 시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고 나무와 꽃들이며, 새와 나비일 뿐이다. 사람이 스스로 시를 알지 못하니 나무와 꽃과 새와 나비가 그 이유를 알고자 다가와 중얼거린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 쓰여 있기에/나를 읽고 또 읽으려 애쓰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인간의 우둔함에는 단호하다. “만권의 책을 공부해도 몸에 넣지 못하고/천 번의 이별과 사랑을 기약해도/그 뜻을 듣지 못하는 내 귀 근처를” 맴돌던 모기의 따끔한 일침이 기다린다. 미물에게도 용서되지 않는 인간이다. 만권의 책이 사실은 시다. 그 뜻을 듣지 못하는 내 귀라지만, 그것은 우리다. 불용한 시다. 시의 불모성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귀를 여는 수밖에 없다. 시가 다시 살아나는 길은 그것뿐이다.

나무에 귀가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시인의 입에서 맴돌았다. 기어이 신비한 나무는 전설을 낳아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서 더 <목이전木耳傳>은 낯설지만 익숙하게 다가온다. 다른 시인들에게서 볼 수 없는 시인만이 가진 상상력으로 돋보인다. 그 상상력은 몇 편의 시를 통해 선보인 귀의 연작임이 분명하다. 개념을 통한 ‘귀’의 연작의 의미가 더 강조된다. <목이전木耳傳>에서의 ‘귀’는 그냥 듣기만 하는 귀가 아니다. “어김없이/너도나도 목소리만 커지는 세상사/인정이 바짝 메말라가면/귀도 듣는 것을 멈추고/시들시들 말라 결국 죽는다.”며 경고를 하고 있다. 인간의 소리를 듣되 가려서 듣겠다는 진일보한 귀다, 그러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귀를 달고 있는 나무는 죽음도 불사한다. 개념이 있는 귀를 통해 던지는 시의 비기秘記를 본다. 그 비기秘記는 <황사>에서 “이 세상의 온갖 목소리를 다 들어주시던/당신의 그 큰 귀 하나가/스르르 풀어져 내려/이 봄날,/온천지에 무성한 소식들로 그득합니다.” 라며 단호하게 듣기를 거부한다. 이상인의 시에서 보여주는 “귀” 시리즈는 단순 나열이 아닌 4편이 시들이 흩어져있지만, 은밀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의미를 강화해준다. 그러한 발화 의도를 숨긴 채 전개된 시를 자칫하면 오독할 수도 있다. 그것마저도 시인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상인의 시가 상상력이 가미된 신선함이 돋보인 것은 판타지의 분위기에서 연유한다. 판타지는 무한 상상이기에 가능하다.

 

막 동이 틀 무렵

아랫배에서 뻐꾸기가 운다

명치쪽으로 올라와 울기도 하고

편히 자리를 잡고 쉬엄쉬엄 운다.

나는 누군가

다른 둥지에 낳아둔 알은 아니었을까

태어나기 전의 기억을 더듬거리다가

내 주위에서 잊지 말아 달라고

때때로 울어주고 있는 이는 없는지

-<뻐꾸기 둥지>에서

 

눈썹 닮은 또 한놈이

쮸 쮸, 찌이, 찌이 부리나케 날아와

함께 꿀을 빤다.

어리광부리듯이 이 꼭지 저 꼭지

돌아가며 꿀을 먹고는

만개한 벚꽃 속으로 장난처럼 사라진다.

그 뒷모습을 쫓는 동백나무의 무수한 눈동자가

스물네 시간, 사방팔방으로 열려있다.

-<식구>에서

 

지난해 담장 밖에서 잠입해와

무슨 결사대처럼

땅속에서 숨죽여 기회를 엿보았던 것

따가운 오뉴월

짧은 창끝을 슬그머니 뽑아 올렸던 것

저걸 어찌할까 생각하는 사이

여의봉처럼 쭉쭉 늘어나 날카롭게 하늘을 찌르던 것

칼집을 벗고

청청한 깃발로 펄럭펄럭 나부끼고 싶은 것

-<대나무처럼>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경계는 자꾸만 확장된다. <물방울>에서는 자신과 또 다른 세계와의 관계를 알기 위한 진여眞如의 분별력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자신이 누워있는 바닥이 허공임을 깨달았다. 이어 세상에 귀를 여는 <耳輪>은 지구만이 자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도 귓바퀴를 돌려 자전하고 있음을 알아간다. 지구가 자전하는 이유처럼 신체 일부지만 귀를 통해 나 이외의 다른 것이 존재함을 인식하는 깨달음이다.

비로소 우주 질서에 순응해가려는 의지에 다다르지만, 자신의 근본에 대한 회의에 빠져든다. <뻐꾸기 둥지>에서 “나는 누군가 /다른 둥지에 낳아둔 알은 아니었을까”라며 끝없는 회의를 통해 자아를 찾아 진여眞如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회의의 궁극은 자신도 다른 인간과 같았음을 자각한다. 오직 “나는 또 어느 둥지에 남몰래 한두 개/내 마음을 낳아두지 않았을까/그 마음, 껍질을 깨고 나와/덜 깨어난 마음들 둥지 밖으로 밀어내/간단없이 죽이고” 홀로 둥지를 차지한 뻐꾸기와 다르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욕망에 찬 사회에 손가락질했던 자신이다. 굳이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뻐꾸기의 탁란을 손가락질했으나, 그런 사람이 곧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식구>에서 “동박새가 매화 가지 사이에서 날아오더니/쮸 쮸, 찌이, 찌이, 쮸 쮸/빠른 장단으로 옹알이를 하며/스스럼없이 동백나무 품으로 파고든” 모습을 보며, 동박새도 소중한 생명체임을 받아들인다. 뻐꾸기가 남의 둥지 안에서 밀쳐낸 새들이 바로 저 동박새였다는 것에 숙연해진다. 그 동박새가 동백나무에서 나와 세상 속으로 사라져 갈 때에서야 이 세상이 나만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비록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에서처럼 “마음 다독이며 마저 읽으려고 아침마다/한 장씩 넘겨본다”는 지극한 이해는 또 다른 남을 받아들이려는 인내다. 세상이 비록 우리를 속일지라도 마음을 접으면서 오히려 자연처럼 순백해진다. 이상인의 시에서는 풍경 속 사물私物이 사물思物로 굴절되어 나타난다. 굴절되어 보이는 피사물이 시가 된다니, 시는 사실이나 진실을 표현한 문자 조립이다. 조립문자가 또 매번 풍경 속에서 굴절되어 이미지화해간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 도드라진 것은 식물에 대한 상상력이다. 식물이미지에서 식물이 흔히 갖고 있는 수직적 성장성이 억제되거나 배제된다. 하지만 여타의 식물이미지는 확장되어 모호한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식물에 반인적半人的 요소를 이식해 독특한 시 이미지를 구축해내고 있다. 인간의 욕망 충동의 억제는 식물성의 회복으로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상상력을 가미한 성공한 시편들이 눈에 들어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긴 장대 끝에 손을 매달아 하늘로 난 창문을 열고 있었다.

 

어느새 쑥쑥 자라 푸른 하늘 안을 빠끔히 기웃거리는, 알알이 영근 눈동자들

-<수숫대>에서

 

이곳에선 가난도 슬픔도 기쁨도 별빛처럼 아름다이 반짝거린다.

 

푸른 늑골이 아득하게 휘어지는 새벽녘

 

수탉 울음소리처럼 닦을수록 빛나는 어둠이 불끈 주먹을 쥔다.

-<반짝이는 어둠>에서

 

어쩌다 문장을 펄쩍 뛰쳐나간 놈들은

소문처럼 아침 안개로 떠돈다.

별들처럼 새까만 밤하늘의 첫 페이지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문장을 수놓는

이 문장 안에서, 문장 사람들은

서로 뜻이 통하는 한 구절 문장일 뿐,

-<문장리>에서

 

읽어 즐거운 시편들이다. 눈을 즐겁게 하기만 해도 성공한 시다. 그런데 덤을 자꾸 내미는 속살 같은 시에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 풍경 안으로 불러 들여 맴돌게 하거나 귀를 기울이게 한다. 시인의 큰 눈으로 바라본 들녘 풍경은 어느 순간 명징한 이미지가 된다. 상상은 자유롭지만, 상징은 한계일 수 있다. 시인은 일반적인 상상과 상징의 한계를 쉽게 넘어 서버린다. 밭 가에 심어진 <수숫대>에서 “무엄한지고, 하늘 한 모서리를 닦는 척 귀를 쫑긋 세우고 슬그머니 하늘의 비밀한 모습들을 엿보려 들다니”라며 보이지 않는 허공에다 지엄한 호통을 치고 있다. 우화 같은 시에 상상력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그저 바람에 허리를 숙였다 세우기를 반복하는 수수가 꽃이 피고 끄트머리께에 달린 열매가 낭창거린 것에 불과하다. 그런 풍경을 이미지화하고 반인적인 요소를 변용해 시인만의 시를 표출하고 있다. 시인의 일상은 사물에 대한 애정 속 맴돌기다.

<반짝이는 어둠>에서 “대 숲에 일렁이는 어둠의 비늘이 파르르 떨린다.//우리는 한자리에 너무 오래 서 있었구나.”라며 스스로 펼쳐진 풍경 속 세계에 너무 오래 맴돌았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오래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어둠이었다. 그 어둠은 시인이 인식하고 있는 또 다른 세계다. “이곳에선 가난도 기쁨도 별빛처럼 아름다이 반짝” 인다는 시인이 꿈꾸는 이상향이다. 그 이상향은 오로지 시인의 시 세계에서만 가능하기에 안타까워한다. 그것은 “푸른 늑골이 아득하게 휘어지는 새벽녘”이 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어둠은 차별 있는 세상의 굴레에서 자유롭다는 시인만의 가치 인식의 세계다. 또다시 차별이 오는 새벽을 통해 다가오는 환한 시간에 “수탉 울음소리처럼 닦을수록 빛나는 어둠이 불끈 주먹을” 쥐어보이는 데, 그것은 시인이 가진 이상향에 대한 시 세계를 심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또 다른 이미지다.

 

 

2.

 

시인은 말을 시라는 형식으로 옮겨 적는 연금술사다. 연금술사는 이론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미 밝혀진 바다. 그렇지만 시의 연금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상인 시인이다. 그래서일까. 귀와 눈을 통해 사물의 풍경 주위에서 맴돌기를 계속한다. <문장리>에서는 “사람들은 짧은 문장 안에서 산다.”며 생뚱 맞은 말을 걸고 있다. 사물적으로 전개된 풍경을 귀로 눈으로 듣더니 기어이 시의 문장을 완성해낸다. “잠시도 문장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명사들이/서툴게 쓴 문장 길을 어슬렁거리고/문장의 크기만큼 열리는 오일장에는/싸고 풋풋한 언어들이 넉넉하게 팔린다.”는 문장리란 마을이다. 풍경 속 서정에 덧 입힌 이미지가 문장을 통해 명료한 시가 되었다. 이상인 시인의 시는 사물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하고 천착을 통해 사람과 사물이 하나라는 것을 보여준다. 스스로 사물을 규정해버리거나 의미를 함부로 부여하지 않는다. 개별성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동격의 자연의 이치속에서 헤아리고 예우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것은 굳이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서 드러내는 장자의 무위無爲의 불립문자不立文字이고 우화羽化다. 이상인의 시는 읽어갈수록 상형을 닮았다. 상형은 대상을 꾸미지않고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대상 속에 함의된 외양이나 내면까지도 문자를 통해 묘사해내기 때문이다. 단순히 문자를 옮겨 적은 것이 아닌 살아가는 이치를 깨우치듯 자연을 바라보며 온전한 전부가 된다. <이상인 씨의 농사法>에서 말하고자 하는 무위의 삶이란게 대단한 철학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다. 보이는 사물속 대상과 생명의 존귀함을 교감하는 것 뿐이다.

 

세들어 사는, 집주인에게 빌린

다섯 평 남짓한 텃밭

뭘 심을까 궁리하는 사이

풀들은 자라 시큰둥한 무릎을 뒤덮고

숭숭 뚫린 들깨만 멀대같이 흔들렸다.

 

보다못한 집주인이 낫을 들고 덤볐지만

나는 스스럼없이 들이미는

풀들의 여린 머리채를 한번 잡아보곤

그만두기로 했다.

여치며 베짱이, 귀뚜라미 어린 놈들이

우두두 뛰어 달아났기 때문이다.

 

그네들이 베푸는 들깻잎 알싸한

초가을 연주회에 맨 먼저 초대받아

가장 앞자리에 앉기 위해

가끔 허전함으로 생의 한 귀퉁이가

바람벽처럼 무너져 내릴 때

내 방문 앞까지 내려와 위로해줄

자연 악사들의 풀빛 악보를 그려보며

나는 빌린 땅뙈기를

미련없이 다시 빌려주었다.

-<이상인 씨의 농사法>전문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익히 안다. 묘하게도 그것을 알면서 사람들은 정반대의 삶을 산다. 진귀한 보물일지라도 죽음 이후 도저히 챙겨갈 수 없는 것을 뻔히 알지만, 소유할 것들을 최대한 긁어 모은다. 욕망을 가진 시인도 그 범주의 사람이었다. 그런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는 우연찮게 찾아온다. 집에 세를 들어 살며 덤으로 얻게 된 다섯 평의 텃밭으로 소유한다는 개념을 바꾸게 된다. 소유한 다섯 평 땅뙈기가 이상인 시인만의 것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닌 자연속의 이름없는 풀꽃에서부터 생명을 품고 있는 미물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작은 텃밭 속의 또 다른 자연의 생명체계가 위해危害를 가하는 인간을 불편하게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아챈다. 그것은 욕망의 서슬 같은 낫으로도 베어낼 수 없는 들깨 사이의 풀 속에서 “여치며 베짱이, 귀뚜라미 어린 놈들이/우두두 뛰어” 나온 것을 보고 만다. 왕왕 시인은 살며 신산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집 마당을 서성이곤 했다.

그럴 때 자신을 위로해주었던 귀뚜라미나 여치 우는 소리가 다섯 평 땅뙈기속에서 울려 나왔던 것이다. 자신의 식감을 돋운 들깨뿐만이 아니고 잡초가 우거져 이뤄낸 생명의 화음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소유라고 믿었던 그곳은 또 다른 생명체의 공유라는 개념으로 공존한다는 것을 알아간다. 그 속에는 자신의 고단한 귀를 씻게 해주고 마음에 위안을 주었던 자연의 소리가 시인을 바라보며 살고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불편한 생각을 버리니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이 <이상인 씨의 농사법>이다. 그것은 계속 유효하다. “나는 빌린 땅뙈기를/미련없이 다시 빌려주”는 비움을 실천하고 있어 가능하다. <둥근 하늘> 그곳에서도 몸으로 듣는 생명의 무한함을 가슴으로 읽어낸다.

 

나미 한마리가 무밭을 뒤집는다.

손바닥 푸른 손금 안에, 생각을 낳는지

소리도 없이 몇 초씩 머물면서

내 등허리 간지럽다.

 

문득 어깨를 들썩여보니

누란 알에서 깨어난 추억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얼마를 아슬아슬 디디며 견디어야

둥근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나

 

나뿌끼는 생, 몇 장 독파하고 나니

펼치는 힘찬 나비의 날갯짓

허공에 물결무늬 투명하게 새겨진다.

-<둥근 하늘>전문

 

끊어질 듯 말 듯 아스라하게 흔들리고 있는

질긴 인연의 끈

먹먹한 가슴에 감겨져 있던 실타래들이

한정 없이 풀어져서 그리된 것

 

함께 갇혀서,

날마다

둥글게 둥글게 출렁거리는

 

무너지지 말자고

손에 손을 잡는 견고한 방파제처럼

그리움 하나 길게 늘여놓고

팽팽하게 잡아당겨 보기도 하고

끊어지지 않도록

느슨하게 풀어주기도 하는

 

아, 눈먼 항해

-<수평선> 전문

 

시인의 우화는 꼭 특정하지 않아 자유롭다. 일직선의 가로로 놓인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사람의 마음속에다 설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수평선이 넘어서는 안될 방파제가 결국에는 사람이 정한 금지벽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더 불편하다. <수평선>에서는 “함께 갇혀서,/날마다/둥글게 둥글게 출렁거리는“ 꿈을 가둘 수는 없다. 기어이 눈먼 항해에 나서고 만다. 바다의 민낯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바다속의 상상을 심정적으로 시인은 자신과 동일시한다. 어차피 인생은 눈먼 항해를 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것을 안다. 사람도 그처럼 바다라는 망망대해에서는 한 점도 안되는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꿈을 저버릴 수는 없다.

흔히들 자연을 논할 때 사람을 우월하게 인식하고 그 중심임을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이상인 시인은 그런 인식이 매우 잘못된 생각임을 시를 통해 바로잡고 있다. 천지간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을 사람과 미물로 구분하지 않고 事物一如의 정신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나비에게도 “나부끼는 생生”涯(애)라는 겸허로 다가간다. 사람처럼 한 생애를 살아가는 나비를 바라보며 나비의 꿈은 무엇인가에 천착한다. 곧 이어 인간의 욕심과 달리 단지 자신이 비집고 다닌 푸른 무밭이 전부라는 것을 본다. 크고 넓은 땅뙈기가 아닌 푸른 잎싹을 내민 무밭일 뿐이다. 시인이 놓아버린 땅 다섯 평에서도 나비가 알을 낳고 나비가 꾸는 꿈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본다. 그러면서 사람이나 나비나 다르지 않다는 데 이른다. “얼마를 아슬아슬 디디며 견디어야/둥근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새로운 세상”에 도달하는 가를 애벌레를 통해 알게 된다. “노란 알에서 깨어난 추억들”은 곧 둥근 하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열린 마음으로 듣는 소리를 통해 궁극에 도달하려는 곳은 멀리 있지 않았다. 이상인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지금의 세상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