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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

에세이향기 2024. 1. 11. 10:50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2011년가을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 *문창2011년가을

1.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짐승의 눈빛이었다고 했다. 열정을 넘어 광기의 눈빛이었다고 했다. 학생들의 그런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쓰러졌다. 알 수 없는 병으로 이미 한쪽 눈을 잃었고, 남은 한쪽 눈마저 멀어갈 때 그래도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붙잡았던 시였는데……, 나는 쓰러졌다. 늦깎이로 들어간 대학원, 아이러니하게도 ‘시창작’ 수업시간에 나는 쓰러졌다.
2001년, 그날 이후 혼미해진 의식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고, 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나는 그만 막막한 적막 속에 갇히고야 말았다. 끊임없는 고통이 밀려왔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극한상황으로 치달았다. 병원에서는 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채 그저 혼자 참아내고 혼자 견뎌내며 기다려야 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다. 때때로,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는 ‘시간의 신’을 자위적 방패로 내세우며 고통과 맞서보았지만 그것 역시 허사였고, 날이 갈수록 그 고통은 점점 더 심해갔다. 나는 고통이 쨍쨍 내리쬐는 덕에 매달려 바짝 말라가는 한 마리 물고기 같았다. 문득 바라본 거울 속엔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정말로 바싹 마른 북어 한 마리가 입을 크게 벌린 채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2.

느닷없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텅 빈 몸속으로 쏟아졌다. 침묵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책상 앞에 앉을 수도, 펜을 잡을 수도 없는 이 기막히고도 처연한 상황 앞에서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새순 같은 의지를 들어 시를 썼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의식을 잃고 또 쓰러졌다. 깨어난 곳은 병원이었다. 놀랍게도 나는 뇌종양 수술실 앞에서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는 코가 막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입으로만 숨을 쉬다보니 입술과 혀가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돌덩이 같은 혀로 받아 입술에 시를 하나씩 새겨나갔다. 까맣게 탄 입술 속엔 빨갛게 시가 익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몇 번째 이어지는 혼수상태 때문이었다.
혼수상태가 잦아지자 담당 의사들은 ‘죽음’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못들은 척 두 귀를 떼어냈다. 귀가 없어도 ‘죽음’이라는 말이 자꾸만 몸속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사람이라면 그 어느 누구라도 죽음 앞에서는 정말로 놀랄 만큼 분명해지는 ‘그 어떤’ 것이 있음을 그때 느꼈다. 다시 또 빠져드는 혼수상태 입구에서 나는 ‘그 어떤 것의 힘’으로 시, 좧북어좩를 새까맣게 탄 입술에 조각하듯 새기기 시작했다.

사람한테 잡혀가도 입을 크게 벌리고만 있으면 산다고 아버지한테 귀 닳도록 들었습니다 사람한테 잡혀가도 눈을 크게 부라리고만 있으면 사람들이 겁먹고 도망간다고, 눈을 똑바로 뜨고만 있으면 사람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며 도망간다고 아버지한테 귀빠지게 들었습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눈 하나 깜빡대지 않고 크게 뜨고 있는 내가 무섭지요? 벌벌 떨리지요?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다시 깨어나면 또 몰려오는 고통을 그저 혼자 참아내고 혼자 견뎌내다가 몇 번의 혼수상태에 빠져나오던 그때까지도 텅 빈 몸이 바라본 거울 속에는 작은 기호처럼 북어 한 마리가 소리 없이 절규하고 있었다.

3.

눈물과 울음의 파동이 육화되는 순간에는 그 순간부터 눈과 입은 보고 말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이 없어지는 것이다. 몸 전체가 곧 커다란 입과 눈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하나의 감각기관으로서의 말하는 ‘입’과 보는 ‘눈’이 아니라 몸 전체로서의 ‘입’과 ‘눈’의 절규인 것이다. 소리 있음이 소리 없음이 되고, 소리 없음이 소리 있음이 되는 공간의 ‘몸’은 그래서 더욱 울림이 커지는 마임 같은 절규인 것이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진다. 몸이 아프면 낯익은 발자국 소리조차도 무서워진다. 세상의 하늘과 벽은 온통 무서움으로 뒤덮이고 축조되어 날마다 무서움이 쏟아진다. 무서움은 약한 정도가 커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북어’는 그래서 더 두렵고 더욱 무서운 것이다. 더군다나 한쪽 눈을 잃고, 남은 한쪽 눈마저 멀어가는 북어는 자꾸만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더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북어는 무섭지만 무섭다고 말하지 않는다. 슬프지만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을 향하여 해학적으로 호령하고 따뜻하게 부라린다. 무서움을 감춘 채 “내가 무섭지요? 벌벌 떨리지요?”라고 역설적으로 절규하는 ‘북어’가 정말 무섭거나 떨리기는커녕 그런 북어를 보고 오히려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그것은 울음을 삼킨 북어가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삶을 향한 의지를 보이는 몸짓이다. 과거와 현재는 다른 시간이며 그래서 미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을 것이라는 따뜻한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려는 단순한 방어기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 좧북어좦의 기호 속에는 ‘북어’라는 기호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극한적인 소외와 그로 인한 무서움이 담겨있다. 그러나 ‘북어’는 이러한 기호 속의 절망에 머물지 않고 그 절망을 극복하고 환한 세계로 나아간다. ‘몸 전체’로서의 희망적인 ‘절규’를 통해서 사람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 ‘절규’는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 나,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부라리고 호령’하면서 이 ‘소외’와 ‘무서움’을 극복하여 반드시 희망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상상력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의 저서 『공기와 꿈』에서 ‘진정한 시인은 상상력이 하나의 여행이기를 원한다’라고 서술했으며, 또한 문학은 ‘다의적’이라고 적었다. 따라서 하나의 시를 하나의 의미체계로만 한정짓는 것보다는, 보고 읽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상상을 통해서 시의 문자 층위 이면에 감추어진 새로운 의미를 탐색하는 것 또한 재미있고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북어’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잃었던 눈의 시력도 다시 찾았다.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다. 더군다나 시, 좧북어좩가 2011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었고, 그래서 그 고마움은 더욱 크다. 그동안 나를 위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지금도 병들어 아픈 사람들, 또한 상처받아 아픈 사람들 그리고 극한의 소외 속에 살아가는 아픈 사람들 모두에게는 나의 시를 바친다. 환한 용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