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939

꼭지마리 / 권혜민

꼭지마리 / 권혜민 시선이 얼어붙었다. 설렁설렁 구경하면서 가볍게 돌아다니던 걸음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동행했던 사람들은 이미 건너편 전시실로 사리지고 나 홀로 남았다. 명치에 묵직하게 통증이 얹히자 진땀이 비적거리고 배어 나온다. 대나무로 만든 생활용품을 전시해 좋은 박물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이곳 남도의 물레는 두 개의 바퀴와 둥근 테두리 사이를 대나무 쪽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몸을 이루도록 되어 있다. 어릴 때 기억을 떠올리며 지나치려는데 물레가 뽑아낸 실이 발길을 칭칭 동여매기라도 한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우리 너머로 보이는 물레의 꼭지마리에서 세상을 떠난 둘째 고모를 만났다. 둘째 고모는 자식을 낳지 못하셨다. 고모부가 장터 국밥집에서 일하던 여인을 들여, 이듬해 딸을 낳으면서 한 남자에..

좋은 수필 2024.04.16

코다리 1 2 / 이 혜 경

코다리· 1 / 이 혜 경 단단히 코가 꿰였다. 지느러미를 바짝 붙인 코다리가 차렷 자세로 줄지어 매달렸다. 줄줄이 엮여 꾸덕꾸덕 말라가는 코다리들은 애초에 같은 운명으로 태어난 것일까? 지금은 저렇게 굳어버리고 묶인 몰골이지만 한 때는 바다향을 머금고 탱탱한 자태를 뽐내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얼음장 같은 바다를 마구 휘젓고 다니던 어린 노가리 시절에는 두려움을 몰랐을 터이다. 언제 그물에 걸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운명임을 알지 못했기에 거침없는 몸짓으로 더 낯선 곳, 더 깊은 곳을 찾아다니며 온몸으로 물살을 밀어냈을 것이다. 부쩍 덩치가 커지고 흑갈색 등에 번지르르한 기름이 돌 때는 스스로 바다의 중심이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으리라. 어느 날 어부의 그물에 걸려 처음으로 바다를 벗어난 순간, 금빛 햇..

좋은 수필 2024.04.15

내가 하나의 풍경이 되려면 / 김 애 자

내가 하나의 풍경이 되려면 / 김 애 자 지금은 봄이다. 대지는 신생하는 것들의 기운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럴 땐 강가로 나가는 것이 좋다. 이랑져 흐르는 물결 위로 굴절하는 빛의 눈부심, 볼에 와 닿는 상큼한 바람결이 다함없다. 강변에 깔린 마름 갈대들의 음률도 들을만하다. 그 어떤 악기가 겨우내 살을 깎아내고 육탈한 뼈들끼리 서로를 껴안고 부르는 조곡弔哭을 연주 할 수 있었던가. 강물이 뒤척이는 에로틱한 신음까지를. 청둥오리와 도요새들이 끼리끼리 모여 부리로 제 깃을 다듬는다. 더러는 머리를 날개 죽지에 파묻고 조는 놈도 있다. 이제 저 새들은 곧 남한강을 떠날 것이다. 나는 깍지 낀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눈을 감는다. 그러면 강변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있는 내가 보인다. 자신을 자연 속에 ..

좋은 수필 2024.04.15

성당 가는 길/ 이명지

성당 가는 길/ 이명지 "야는 그럴 아가 아이다! 성당에 다니는 아는 나쁜 짓을 안 한다" 그때 내게 족쇄 하나가 철커덕 채워졌다. '성당에 다니는 애, 그래서는 안 되는 애'가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성당이 두려워진 건 그때부터지 싶다. 엄마는 우리 마을에서 유일한 신자였다. 늘 일손이 부족한 농촌인데도 일요일이면 깨끗한 한복을 차려입고 성당엘 갔다. 그것은 파격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그런 엄마를 두고 겉멋이 들었다느니, 바람이 났다느니 말이 많았다. 심지어 그걸 허용하는 아버지를 대놓고 비난하기도 했다. 엄마는 사람들의 입방아가 신경 쓰였는지 막내인 나를 데리고 성당에 다녔다. 어린 내 눈에도 엄마는 참 고왔다. 평소에는 때 묻은 무명옷에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농사일을 하던 엄마가 성당에 가는 날이..

좋은 수필 2024.04.12

소리 풍경/허정진

소리 풍경 허정진 깊은 산속 농막에서 몇 년간 지내본 적 있었다. 산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여 전망은 그지없이 좋았지만 이웃도, TV도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사계절 내내 오직 자연의 소리밖에 없었다. 숲속 계곡물 흘러가는 소리, 바람이 여울져 휘감는 소리, 겨울 나뭇가지 뚝뚝 부러지는 소리, 지둥 치게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산장 주위를 배회하는 산짐승 소리, 멀리서 풀국새 울고 장꿩 퍼덕이는 날갯짓 소리까지 들렸다. 더 마음을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면 그들만의 낮은 주파수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꽃이 피고 지는 소리, 해토머리 나무줄기에 물오르는 소리, 겨울밤 함박눈 내리는 소리 같은 것들. 그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고요와 여유 덕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도시 소리가 그립고 궁금하..

좋은 수필 2024.04.12

오늘도 봄동/정옥순

오늘도 봄동/정옥순 봄동 겉절이를 했다. 정성껏 씻어 소금에 살짝 절여 물기를 빼고 액젓에 불린 고춧가루를 넣고 마늘도 다져 넣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봄동아,/볼이 미어터지도록 너를 먹는다//오랜만에 팔소매 걷고 밥상 당겨 앉아/밥 한 공기 금세 뚝딱 해치운다만/네가 봄이 눈 똥이 아니었다면/…너처럼 당당하지 못하고...’ 봄동을 ‘봄’이란 강아지가 쪼르르 길 가다가 눈 연둣빛 똥이라고 노래한 시인의 정취에 웃음이 절로 난다. 봄동을 좋아하는 나도 시인처럼 봄동만 보면 밥상 당겨 앉아 밥 한 공기 뚝딱 해치운다. 마지막 ‘너처럼 당당하지’라는 구절이 나의 심장을 뛰게 한다. 나도 한때 봄동처럼 당당하게 추운 삶을 맞이했던 때가 있었다. 김장철이 끝난 후 결혼했다. 직장 때문에 남편과는 주말부부로..

좋은 수필 2024.04.12

골목의 표정/황 인 숙

골목의 표정/황 인 숙 서울의 골목을 구경해 본 코끼리는 이제까지 한 마리도 없을 것이다. 트럭만큼 큰 어른 코끼리는 골목의 초입에서부터 양편 담벼락에 꽉 낄 것이다. 골목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폐쇄 공포를 느끼겠지. 여태 한 번도 서울의 골목을 본 적 없는 서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우리 동네의 미로 같은 골목을 보면 코끼리처럼 폐쇄 공포를 느낄지 모른다. 구불구불, 울퉁불퉁, 다닥다닥, 옹기종기, 좁넓이도 높낮이도 짧길이도 들쭉날쭉, 어떤 집들은 높다란 축대 위에 껑충 다락처럼 올라가 있고 어떤 집들은 기슭을 따라서 흘러내리듯 서 있다. 지형 생긴 대로 생긴 집들. 골목은 자연 발생적인 주거 공간이다. 생각해 보면 도심 중의 도심인 남산 기슭을 마음도 몸도 가난한 사람들이 지킬 수 있었던 건..

좋은 수필 2024.04.12

두부 한 모 앞에 두고 / 허정진

두부 한 모 앞에 두고 / 허정진 밤새 불린 흰콩을 맷돌로 곱게 갈아낸다. 어처구니를 힘들이지 않고 다루는 여유가 삶의 근력처럼 믿음직스럽다. 가마솥에서 천천히 끓여가며 알갱이가 몽글몽글해지면 베자루로 비지를 걸러내고, 뽀얀 콩물에 간수를 살짝 뿌려 서서히 순두부를 만든다. 그 덩어리를 틀에 넣어 누름돌로 눌러주면 물이 빠지고 두부가 완성된다. ‘두부 만드는 일은 게으른 며느리에게 맡겨라.’는 말처럼 오랜 과정을 꾹 참고 지켜보며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곧 장인정신이다. 오일시장 귀퉁이에 오래된 두붓집을 들렀다가 두부 한 모를 사 왔다. 속이 꽉 찬 것 같은 하얀 속살이 자기 생의 이력서 인양 오지고 탱탱하다. 뭘 해 먹을까? 된장찌개에 숭덩숭덩 잘라 넣으면 좋겠지만 오늘은 그냥 ..

좋은 수필 2024.04.11

눈꼽재기 창, 왜 감시하는가/ 김수인

눈꼽재기 창, 왜 감시하는가/ 김수인 산비둘기 피울음 우는 유월 초순, 우리 일행은 챙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와 간단한 점심을 준비하여 길을 나섰다. 임진왜란부터 고종 시절까지 내시들이 살았다는 청도 운림고택을 찾아 나선 걸음이다. 허나 ‘내시’라는 무거운 단어가 뇌리에 박혀 몸도 마음도 가볍지만은 않다. 역사에 해박한 K선생이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청도의 볼거리를 먼저 둘러보고 가자며 여유롭게 트래킹을 이끌었다. 여린 모가 발을 내리는 무논을 지나고 봇물 지줄 거리는 둑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시조시인 민병도 갤러리를 둘러보고 신지생태공원과 선암서원,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룻밤 묵고 가셨다는 만화정과 선사시대 고인돌까지 둘러 본 뒤 임당리 내시고택에 이르렀다. ​ ​ 먹빛 기와담장에 ..

좋은 수필 2024.04.06

처마의 마음/윤승원

처마의 마음 윤승원 기어코 비가 쏟아지고 말았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수상해 서둘러 하산을 했는데도 주차장에 닿기 전 비를 만나고 만 것이다. 염치 불구하고 길가 집으로 뛰어들어 툇마루에 앉아 비를 그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댓돌 아래 마당에 일렬횡대로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처마는 혹 내 신발에 흙탕물이라도 튀길까봐 제 몸을 마당 쪽으로 한 뼘 더 길게 뻗어 빗물을 받아내고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처마의 마음이다. 처마의 존재를 잊고 지내다가도 이렇듯 비를 그을 일이 있으면 그 존재가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처마라면 단연코 초가집처마다. 물론 버선을 신은 듯 공중으로 제 생각을 살짝 치켜 올리는 날렵한 기와집처마도 있고 떨어지는 빗물을 그대로 흘려 보내는 성격이 급한 슬레이트집처..

좋은 수필 2024.04.06

미역돌 / 박은주

미역돌 / 박은주 동풍에 훈기가 실려오면 어머니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겨우내 바닷물을 먹고 자란 돌미역을 거두어들일 때가 된 것이다. 일기예보를 챙겨보고도 미덥지가 않아 마당에 나가 하늘을 보며 바람을 살핀다. 미역을 따는 날은 물론이고 바싹 마를 때까지 며칠간 햇살과 바람이 뽀송뽀송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녘에 전화를 주신 것으로 보아 이번에도 날을 잡은 모양이었다. 언니와 나는 차를 타고 친정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먼저 온 오빠와 올케는 벌써 부지런히 손을 보태고 있었다. 방금 따온 미역을 말리고 있는 어머니는 눈도 돌리지 않은 채, 할 일을 일러주었다. 미역을 뒤적일 때마다 미끌미끌한 바다 냄새가 포말처럼 코끝에서 부서졌다. 어머니에게 미역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었다. 목숨과도 같은 재산이었다. ..

좋은 수필 2024.04.05

횃대보/정재순

횃대보 정재순 장롱 깊숙이 화선지에 싸여 있는 천은 횃대보가 분명했다. 열아홉 새색시의 혼수품이었던 한 폭 크기의 횃대보에는 부귀와 장수를 기원한다는 꽃과 나비가 수 놓여 있다. 양 끝자락의 ‘복(福)’ 字 는 글자이기 보다는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며 집안에 복이 들어오는 길을 트고 싶었던 엄마의 기도였을 것이다. 당신의 유난했던 손길이 그대로 묻어있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창문 가리개로 쓰면 제법 근사할 성 싶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벽에 못을 박아 긴 막대를 걸쳐서 옷을 걸었다. 횃대보는 벽에 걸어둔 옷에 먼지가 앉는 것을 막아 주는 커다란 천으로, 걸어둔 옷이 보이지 않게 미관상 가리개 역할도 했던 보자기 농이었다. 안방 벽장엔 언제나 부모님의 옷이 걸려 있었고, 그 옆 한쪽 면에 길게 놓인 횃대..

좋은 수필 2024.04.05

탁설, 공空을 깨우다 / 윤미영

탁설, 공空을 깨우다 / 윤미영 바람을 기다린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발밑을 살핀다. 제자리에서 돌아서지도 벗어나지도 않는다. 하안거 동안거가 끝나고 수행 스님이 돌아와도 하늘 언저리에 고요히 빗금만 긋는다. 바람이 오면 바람이 치는 대로 소릿결을 만든다. 능선을 넘어온 산바람은 길을 내지 않는다. 모양도 빛깔도 없다. 사물에 부딪혔을 때 길을 보여주고 소리를 듣게 한다.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을 맞이하여 응답한다. 산빛을 담아 청아한 음색을 울린다 하여 풍령風鈴, 풍탁風鐸이라 불리는 풍경이, 서기瑞氣 감도는 하늘에 얹혀 묵언 수행 중인 사찰을 깨운다. 풍경 안에는 물고기 모양의 단단한 금속이 달려 있다. '탁설鐸舌'이다. '목탁의 혀'라는 두 글자가 '탁'치는 듯, 얇은 혀가 경종을 울리는..

좋은 수필 2024.04.05

그믐 등/백정혜

그믐 등 백정혜 길가 허물어진 기와집에 안노인 둘이서만 살고 있다. 칠순이 넘은 할머니는 자그마한 몸매와 꼬장꼬장한 자태에 못지않게 칼칼한 성품이시다. 평생 남의 손을 빌려 단장해 본 적이 없다는 머리는 언제나 참빗으로 빗은 듯 쪽을 찌고 있다. 삼단 같았다던 머리숱도 이제는 머리 밑이 훤히 드러나고 밤알만한 머리말이의 비녀가 무거워 보인다. 깨끗한 살결과 단아한 이목구비로 미루어 젊었을 때는 엔간한 미색을 지녔을 것 같았다. 거기에 비하면 열 살이나 밑인 다른 노인은 하나에서 열까지 비교가 된다. 펑퍼짐한 체구에 걸맞게 성질 또한 느리고 눅다. 깨끔하고 강단 있어 보이는 할머니와는 달리 만사가 태평이다. 처음에 그들을 보았을 때 어떤 관계로 인연을 맺고 사는지 짐작이 쉽지 않았다. 둘은 어느 때 어디서..

좋은 수필 2024.04.05

어물전에서/손광성

어물전에서 손광성 일요일 같은 날은 고궁을 산책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아니면 정장을 하고 연주회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젊고 멋진 여자랑 함께라면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젊었을 때 우리는 폭풍우 속을 우산도 없이 걸었다. 이유 없는 반항과 까닭 없는 울분과 그리고 폭음과 폭언과… 젊은 혈기마저 식어 버린 지금, 필요한 것은 따뜻한 온기와 약간의 생동감이라고나 할까. 나는 외롭고 쓸쓸할 때면 아내를 따라 장보러 가기를 좋아한다. 시장의 물건들은 임자가 따로 없다. 먼저 선택한 사람이 임자요, 사가는 사람이 임자. 게다가 모든 것이 생동감으로 넘친다. 장사꾼들이 외쳐대는 떠들썩하는 소음과 북적거리는 인파의 혼란 속에서 나는 가벼운 흥분마저 느낀다. 그런 감정은 어물전 앞에서 절정에 이른다. 생선은 도마..

좋은 수필 2024.04.05

둥지/김만년

둥지 김만년 까치가 떠났다. 빈 둥지만 덩그러니 놓아두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둥지는 까치 부부가 합심해서 지은 저희들만의 성소였다. 해토 무렵부터 나뭇가지를 총총 뛰어다니며 분분한 수다로 집 지을 궁리를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우듬지 부근에 견고한 공중 건축물을 축조한 것이다. 까치 부부에게는 오랜 공력을 들여 마련한 신접살림 집인 셈이다. 모진 비바람을 다독이며 털북숭이 새끼들을 키워 온 둥지다. 사람의 심사로 보면 애착이 갈 법도 하건만 까치 부부는 오늘 아침 미련 없이 새끼들을 앞세우고 이소離巢를 감행한 것이다. 한철을 머리맡에서 지저귀던 까치들이 떠나자 문득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밀려왔다. ​ 이사할 목록들을 정리하며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본다. 몇 올의 햇살들만 들락거릴 뿐 사방이 적막하..

좋은 수필 2024.04.05

닻/박말애

닻 박말애 바닷가를 거닐었다. 발걸음이 멈추는 어느 지점에서 우람한 물체가 시선을 압도했다. 전체적인 몸체는 두껍고 무겁게 느껴졌다. 둥글게 자리잡은 밑부분에서 감싸듯 솟아오른 두 개의 갈퀴가 강한 힘만이 이 물체의 전유물인 듯 팔척의 장수처럼 근력이 불끈 솟는다. 돌출된 이미지를 발산하는 이 남성미의 조형물은 닻이다. 크고 육중한 자태는 오랜 시간동안 해풍을 맞으며 자리를 지켜온 듯 세월의 겉옷은 녹이 슬고 거칠어 풍상의 세파를 견뎌온 흔적이 곳곳에 배여 있었다. 우악스럽게 펼쳐진 양쪽의 갈퀴는 금방이라도 하늘을 움켜잡을 듯이 왕고집적인 자태에서 은연 중 야릇한 남성미가 풍기기도 했다. 세상사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의 고리는 비단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미생물이지만 사람과 필연의 관계로 ..

좋은 수필 2024.04.05

분꽃/이혜연

분꽃 이혜연 가슴에 묻어둔 그리움들이 있다. 질화로 속에 담긴 불씨처럼 그렇게 가슴 깊숙한 곳에 들어 앉아 자칫 냉랭해지려는 내 삶에 훈훈한 온기를 불어 넣어주곤 하는, 내 인생의 동반자이다. 때론 선명한 윤곽을 지닌 실체로, 때로는 안개처럼 모호한 모습으로 불현듯 그리움은 다가온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그리움의 대상들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새로 밝는 날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져 가기 때문일까.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귀소본능처럼 자꾸만 까마득히 세월을 거슬러 오르려고만 한다. 화사한 봄보다는 까칠해진 가을에, 빛을 여는 아침보다 빛을 거두어들이는 어스름 저녁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다. 그 어스름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와도 같은 그리움을 주는 꽃이 있다. 목을 뽑아 올린 긴 기다림 ..

좋은 수필 2024.04.05

똥바가지 쌀바가지 / 강천

똥바가지 쌀바가지 / 강천 "흥보가 지붕으로 올라가서 박을 톡톡 튕겨 본 즉, 팔구월 찬 이슬에 박이 꽉꽉 여물었구나. 박을 따다 놓고 흥보 내외 자식들 데리고 톱을 걸고 박을 타는듸. 시르렁 실근, 톱질이로구나, 에이 여루 당그어 주소. 이 박을 타거들랑 아무것도 나오지를 말고 밥 한 통만 나오너라. 평생을 밥이 포한이로구나." 흥부가 중에서 박 타는 대목이다.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초가집의 지붕에는 해마다 박 덩굴이 무성했다. 어둠이 찾아오고 고요한 달빛이 내리는 날, 희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박꽃은 내 어린 눈에도 신비롭게만 느껴졌다. 찬바람에 이파리가 시름시름 기운을 잃어갈 때쯤이면 똬리를 베개 삼아 편안하게 배를 내민 박 덩이가 탐스럽게 영글어 간다. 썩은 이엉이 주저 않을까 무서운 초가지..

좋은 수필 2024.04.04

어느 물고기의 독백/김영수

어느 물고기의 독백 (김영수) 나는 물고기였다. 어부의 그물에 걸려 횟집으로 팔려와 도마에 눕는 순간 나의 이름은 물고기에서 생선회로 바뀌었다. 머리부터 잘린 후 몸에 칼이 들어오는 게 물고기가 횟감으로 되는 평범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나는 두꺼운 나무 도마에 몸을 눕히자마자 눈동자 한번 돌릴 겨를도 없이 정신을 잃었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 내 몸의 껍질은 이미 벗겨져 있었고, 하얗게 드러난 알몸이 횟감으로 저며지고 있었다. 더는 생명이 없는 하얀 살덩이가 된 내 몸을 바라보았다. 한때 나는 저 살과 뼈로 대양을 가르며 부러움 없이 헤엄쳤지. 때로 수면 위 공중으로 뛰어올라 세상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때로는 심연의 바닥에 닿을 만큼 깊이 은신하기도 했다. 터질 듯 부레를 부풀려 보란 듯이 우쭐거린 적도 있..

좋은 수필 2024.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