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939

7일 동안/최지안

사진southeast131(southeast131)님 7일 동안 최지안 월요일. 대롱 하나가 목에 꽂혀 있는 것처럼 뻑뻑했다. 몸은 전보다 다른 느낌을 전해왔다. 따뜻한 물을 마시며 버텼다. 설마 감기는 아니겠지. 몸이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예고였다. 화요일. 기온이 뚝 떨어지던 날이었다. 예고를 무시하고 수영을 했다.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이 얼고 칼로 내리치듯 한기가 등으로 꽂혔다. 예감이 적중했다. 저녁부터 몸 여기저기에 전운이 감지되었다. 불길한 예감은 왜 비껴가지 않는 것인지. 수요일. 면역체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백혈구가 전열을 가다듬는 듯 했다. 액체가 기울어지듯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피도 그쪽으로 몰렸다. 기침이 날 때마다 체액이 쏟아질 듯 했다. 그때까지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

좋은 수필 2021.05.04

마루가 그립다 / 김인선

마루가 그립다 / 김인선 볕 좋은 날 마루를 닦는다. 햇살 한 장이 마당에 선 나무들을 무늬로 그리면, 하릴없이 졸던 강아지가 게으른 눈을 비비는 한낮, 숫제 싱거운 졸음이나 재우려는 듯 처마도 그림자로 내려앉는다. 마루는 완벽하게 그늘 반 햇살 반이다. 느긋한 햇살에 그늘이 포개지니 마루가 꾼 꿈을 나누듯 두서없는 이야기들이 되살아난다. 황토방에 마루를 놓던 몇 해 전부터 눈시울에 매달려 있었을까. 무시로 고즈넉해지면 옛집에 식구들이 옹기종기 둘러앉는 소리부터 들려온다. 우리는 마루에서 밥을 먹고 숙제를 하였으며, 별을 보다 잠이 들었다. 우리들 발품으로 반질반질 윤이 났던 그 마루에서 우리들은 자라났다. 그런 마루가 좋다. 모서리가 날렵한 세련된 마루가 아니라, 세월의 흔적을 뭉툭하게 안은 못생긴 마..

좋은 수필 2021.05.04

연필/김정화

연필/김정화 연필이 부러졌다. 가방에서 성한 연필을 꺼내 공란을 매워 나갔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왔다. 2010년 인구주택 총 조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조사원으로 종사하고 있다. 조사표를 받아들고 대상 가구를 찾아갈 때는, 아직도 처음처럼 마음이 설렌다. 그 사람들의 음지와 양지를 빌려 통계에 필요한 데이터를 만드는 일은 늘 조심스럽다. 삶의 겉모습만 베끼지 않고 속마음을 어떻게 얻어내어 적을 것인지, 그 속사정을 헤아려야 한다. 되도록 소소한 정보들까지 다 적어 와서는 필요로 하는 서식에 맞추어 넣고 나머지 자료들은 흔적도 없이 지워야 한다. 통계가 지니는 속성의 한 단면인 현란한 눈속임에서 벗어나야한다는 명제를 굳이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어떻게 적어야 하는가는 늘 고민하게 한다..

좋은 수필 2021.05.03

연필과 나 / 조이섭

연필과 나 / 조이섭 잘 깎은 연필에서는 사과 냄새가 난다. 전투에 나가는 병사가 총기를 손질하듯, 농부가 벼 베기 전에 낫을 벼리듯 나는 글 쓰기 전에 연필을 깎는다. 나무의 속살이 넉넉하게 보이도록 깎은 다음, 까만 심을 날씬하게 다듬는다. 잘 깎은 연필을 가까이 두면 글이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만의 최면이다. 내 책상에는 몽당연필과 장다리를 합쳐 서른 자루 정도가 연필꽂이에 꽂혀 있다. 바깥나들이는 항상 장다리 몫이고 몽당연필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고이 모셔둔다. 외려 짧을수록 더 애틋하다. 깎여 없어진 상처는 자신을 희생하여 나의 어쭙잖은 글로 맞바꾼 흔적이기 때문이다. 몽당연필의 공과 결실이 적지 않으니 귀한 대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에는 종이, 붓, 먹, 벼루가 문방사우로 선..

좋은 수필 2021.05.03

모루/정문숙

모루/정문숙 어머니를 휠체어에 앉히고 초록 양철 문을 연다. 오랫동안 주인을 기다렸던 녹슨 아우성이 일제히 터져 나온다. 아버지 대신 뽀얀 먼지를 둘러쓴 거미줄이 먼저 달려와 어머니의 가슴에 안긴다. 거미줄을 떼어 내려 손을 뻗자 어머니는 그것마저 그리웠던 듯 그만 두라며 내 손을 잡는다. 휠체어를 밀고 안으로 들어선다. 주인은 떠나고 기계마저 들어내 말문이 막혀 버린 정미소는 텅 빈 가슴을 열어젖히고 한바탕 넋두리라도 풀어놓을 기세로 한때 주인이었던 손님을 맞이한다. 정미소의 수문장으로서 기세등등하던 양철 문은 아버지의 헛기침처럼 두어 번 쇳소리를 내다 스스로 닫히고 만다. 찢기고 허물어진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별빛 같은 햇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어머니와 나는 무대 위의 주연배우처럼 서 있다. ..

좋은 수필 2021.05.03

글내와 사람내/박양근

글내와 사람내/박양근 모든 사물은 고유의 냄새를 지니고 있다. 동식물뿐만 아니라 사람의 몸에서도 냄새가 난다. 무엇인가 있다는 낌새를 알아차리면 냄새를 먼저 맡는다. 모두가 체취로 자신을 드러내려 하므로 인간의 오감 중에서 후각이 가장 예민하다. 냄새 중에는 좋은 것이 있고 나뿐 것이 있다. 흔히 좋은 냄새를 향기라 부른다. 차향, 꽃향이 있고 한지에 쓴 글씨에는 묵향이 배어있으며 천년 땅속에서 제 몸을 삭힌 참나무에서는 침향이 스며난다. 향기야말로 모든 사물이 지니고 싶은 이상적인 기운일 것이다. 옛 선비들도 자신의 글에서 지필묵 향기가 묻어나기를 소망하였다. 그런데 글과 글씨에서는 문향과 묵향이 풍겨난다고 하지만 정작 글을 쓰는 사람에게서는 먹물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옷에 먹물을 잔뜩 묻힌다고 먹물..

좋은 수필 2021.05.03

외도의 추억/최민자

​ ​ ​ ​ ​ 외도의 추억/최 민 자 ​ ​시詩도 공산품이라는 사실을 제작공정을 보고서야 알았다. 문화센터 한구석 큼큼한 가내공장에서 숙련된 도제와 견습공들이 시의 부품들을 조립하고 있었다. 누군가 앙상한 시의 뼈대를 내밀었다. 곰 인형이나 조각보를 마름하듯 깁고 꿰매고 잘라 내고 덧붙이며 간간이 웃음과 농담도 섞으며 정성스레 매만지는 손길들이 골똘하고 따스했다. 시는 머릿속에서 튕겨 나오는 게 아니고 몸속 여기저기를 흘러 다니다가 손끝으로 감실감실 새어 나오거나 앞 문장의 끄트머리를 붙들고 절름절름 걸어 나오는 거라고, 스티치 위에 인두질을 하고 반짝이 가루를 도포하던 장인匠人이 말했다. 얼추 완성된 시제품 위에 그가 냉큼 새 라벨을 붙인다. 털도 안 뽑힌 살덩어리에서 비계를 발라내고 근육과 뼈가 ..

좋은 수필 2021.05.03

자코메티의 계절/문경희

자코메티의 계절 문경희 겨울 연밭은 폐사지 같다. 스산하다 못해 괴괴하다. 여며 싸고 친친 감아도 몸보다 마음이 체감하는 기온으로 뼈마디가 시려온다. 이따금 얼어붙은 수면을 박차고 오르는 철새들의 따뜻한 인기척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이 냉기를 견딜까. 대궁만 남은 연, 아니, 대궁조차도 말라 비틀어져 버린 연이 얼음 속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중발레를 하듯 겅중겅중 허공을 찍고 있는 저 무념의 발자국들. 물을 딛고 서 있지만 그들의 몸에서 물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 곡기를 끊으시던 어머님처럼, 한 모금 물로 입을 다시는 일마저 부질없는 것일까. 어머님은 결국 인생의 겨울을 넘지 못하셨지만 저들은 분명 생명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잠시 휴면기에 들었을 뿐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깡..

좋은 수필 2021.05.02

울릉도사람들 /박시윤

울릉도사람들 /박시윤 배가 돌아온다. 행남등대, 그 길고도 먼 불빛을 따라 멀리서, 저 멀리서 고운 물결 위에 출렁대며 돌아온다. 만선을 기다리는 섬어미의 바람처럼, 깜깜하게 어둠이 들어앉은 저동 어판장을 향해 섬아비들이 힘차게 내달린다. 밤새 바다에 기댄 시간, 아비의 배는 만선의 꿈을 이루었을까. 항을 향해 내달리는 아비들을 쫓아 어느새 새벽이 물러가고 해가 달려와 왈칵 업힌다. 이제 바다의 시간은 고스란히 바다에 남겨두어야 한다. 헐빈한 배가 못내 아쉬워, 바다에 더 머문다 한들 무엇을 얻을까. 오늘 욕심을 접을 줄 알아야 내일 희망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섬아비들은 잘 알고 있으리라. 아비는 밤새 바다가 내어준 것들을 상자 째 어판장 바닥에 내어놓는다. 경매가 붙을 것은 크기별로 분류되었고, 활어..

좋은 수필 2021.05.02

항아리 / 조현미

항아리 / 조현미 소나기가 그었다. 빗물이 일필휘지한 뒤란 풍경은 동적動的이다. 옥수수 잎이, 호박 넝쿨이, 흰 보라 도라지꽃이 빗물체로 살아 꿈틀거린다. 갓 목욕을 마친 장독들의 때깔도 육덕지다. 반지레하지만 두루뭉술한 태가 꼭 촌부의 뒷모습 같아 관능과는 멀면서도 볼수록 정이 간다. 나란히 어깨를 겯고 있는 항아리들을 보니 슬며시 웃음이 난다. 아가리가 좁고 배는 불룩한 데다 굽도 없는 항아리들이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꼭 닮은 탓이다. 얼굴의 윤곽은 철저하게 무시한 반면 가슴과 배, 엉덩이는 지나칠 정도로 풍만한 조각상은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란다. 크기에 관계없이 펑퍼짐한 복부가 영락없는 여성상의 추상이다. 당시의 크로마뇽인들에게나 현대인들에게나 항아리 형태의 몸매는 다산의 기원을..

좋은 수필 2021.05.02

바퀴/장미숙

바퀴/장미숙 자전거가 푹 주저앉아 버렸다. 공사현장 옆 도로를 구르고 난 뒤였다. 뒷바퀴 타이어에서 쉭쉭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자전거가 묵직해졌다. 자전거를 타는 게 아니라, 땅을 숫제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날카로운 뭔가 바퀴에 구멍을 낸 게 분명했다. 타이어는 벌써 바람이 다 빠져 버렸는지 납작하게 땅에 붙어 있었다. 돌덩이처럼 무거워진 자전거를 끌고 자전거 수리점을 찾았다. 굴러갈 때는 한없이 가볍던 바퀴가 끌고 가려니 짐 덩어리에 불과했다. 수리점 아저씨는 손쉽게 자전거에서 바퀴를 분리했다. 바퀴가 분리되자 자전거는 순간 기능을 잃고 기우뚱댔다. 바닥에 널브러진 바퀴를 보고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찼다. “아따, 요놈도 엔간히 힘들게 살아왔네. 너덜너덜한 게 어지간히 굴러 다녔는갑소. 웬만하면..

좋은 수필 2021.05.02

소금/김원순

소금 / 김원순 간수가 모조리 빠져나간 소금자루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언젠가 세면장 바닥을 바르고 남은 시멘트 포대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것처럼. 국산 천일염 100%라고 쓰인 붉은 글씨가 없었더라면 그것이 소금자루인지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며가며 나는, 바윗덩이 같은 소금자루를 발로 툭툭 차거나 옆구리를 쿡쿡 쑤시곤 한다. 조금씩 부숴 놓아야지 배추나 생선을 절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틈 하나 없이 엉겨붙은 소금들이 은근히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세상이란 바닷물에 여태 부대끼며 살아왔지만 소금처럼 한데 엉겨서 살아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마 내 삶의 간수들이 나를 가둬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웃의 아픔을 보고도 외면하거나 건성으로 대했던 일이며, 남의 불행을 보면서 마냥 행복해 했던 ..

좋은 수필 2021.05.02

압화/설성제

압화 불 꺼진 창문 앞을 오랜 시간 서성이다 돌아온 날이면 압화 접시를 꺼내든다. 어딘가에서 눈비 맞으며 피었던 꽃잎들인가, 아니면 어느 길가에서 철없이 피어 원도 한도 없이 향기를 뿜어왔던 꽃들인가. 하얀 접시 위에 다시 피어난 꽃들과 눈을 맞춘다. 물관으로 들이마시는 숨을 내뱉기가 힘이 들었다. 아마 심장이 짓눌리고 숨통이 조여들어, 마신 햇살과 바람이 전신을 통과할 때 여리디 여린 몸피는 이미 이 새상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의 힘으로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왔다. 누군가 모로 뉘어주어 바늘구멍 같은 숨통이라도 열어주었으면 싶었다. 살고 싶다는 절규의 시간도 이미 사그라졌다. 이대로 눌려야 한다. 산에서 들에서 바람 따라 햇살 따라 어우렁더우렁 지내왔던 시간도 있었지..

좋은 수필 2021.05.02

정미소 풍경/구활

정미소 풍경 /구활 폐허의 성처럼 버티고 서있는 낡은 정미소. 유령이 나올 것만 같은 정미소 앞을 지나칠 때면 마음 한구석이 찡해 온다. 헛간을 덮고 있던 지붕 한쪽은 날아가 비바람이 그냥 들어오고 다른 한쪽 지붕은 임시방편으로 색깔 다른 함석으로 덧땜질해 두었지만 미풍에도 소리를 내는 박자가 제 멋대로인 타악기로 변한지 오래다. 두고 떠나온 고향이 못내 그리워 시골여행을 할 때마다 정미소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 차를 세워 이곳저곳을 살펴보지만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생동감 있는 기계음은 들리지 않는다. 낱알을 주워먹던 참새떼도, 나락 가마니 속을 들락거리던 쥐들도 더 이상 먹을 게 없어 이사를 갔는지 사위는 적요롭기 그지없다. 그래도 햇볕만은 떨어져 나간 천정의 빈 공간을 타고 들어 와 그늘이 범접할 수 없..

좋은 수필 2021.05.02

구두/조일희

구두 조일희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거리 중국집주차장에 웬 사내가 군드러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두 손으로 받친 채 자고 있는 사내 옆으로 반쯤 남은 소주병이 파수꾼처럼 서있다. 아니꼬운 사내를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며 지나간다. 무심히 지나치려는 나를 사내의 알근한 구두 한 짝이 빤히 쳐다보며 아는 체를 한다. 어린 시절, 추운 겨울에도 양말을 신을 수 없을 만큼 가난했었다. 애옥한 형편에 새 신발이라야 고작 일 년에 한두 번, 명절빔으로 받은 검정 고무신이나 운동화가 전부였다. 강산이 두 번씩 바뀌어도 우리 집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흐르는 시간은 촌스러운 나를 싸구려 구두를 신어도 아름다운 나이로 만들어 주었다. 그가 내민 화려한 구두가 솔직히 탐이 났다. 나와 어..

좋은 수필 2021.05.01

나도 더러는 질펀하게 무너지고 싶다 /윤영

나도 더러는 질펀하게 무너지고 싶다 윤영 동해에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건 오전 10시쯤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벼르던 여행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구룡포로 가는 옛길을 따라 조개를 잡고 볼락회에 소주 한잔 마시다 죽은 듯 자야겠다고 먹은 마음을 포기하기에는 마음한테 미안해졌다. 남들이 보면 시답잖은 여행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이판사판으로 가보는 데까지 가보자며 나는 도시락을 싸고 남편은 텐트와 침낭을 챙겼다. 한치 앞을 모르는 게 사는 일이잖은가. 호미곶을 지나 구룡포항에 닿을 즈음이면 파도가 지쳐 있을 거라는 희망은 출발할 때부터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 일기예보는 빗나가지 않았다. 파도는 천년 묵은 한을 토해 해안반도 둘레길을 덮쳤다. 긴 목덜미를 자랑하듯 제철소 수십만 개의 불..

좋은 수필 2021.05.01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다산 정약용(丁若鏞)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다산 정약용(丁若鏞) 경오년 여름에 쉬파리가 말할 수 없이 들끓었다. 온 집안에 가득 차고, 바글바글 번식하여 산이나 골이나 쉬파리로 득실거렸다. 높다란 누각에서도 일찍이 얼어죽지 않더니, 술집과 떡집에 구름처럼 몰려와 윙윙거리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그러니 노인들은 탄식하며 괴변이 났다 하고, 소년들은 떨쳐 일어나 한바탕 때려잡을 궁리를 하였다. 어떤 사람은 파리 통발을 놓아서 거기에 걸려 죽게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파리약을 놓아서 그 약 기운에 어질어질할 때 모조리 없애 버리려고도 했다. 이런 광경을 보고 나는 말했다. "아, 이것은 결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분명 굶주려 죽은 백성들이 다시 태어난 몸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기구한 삶이었던가?..

좋은 수필 2021.05.01

집/박시윤

집 박 시 윤 결혼한 동창이 집들이를 한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친구는 서른 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중매로 만나 석 달 만에 결혼식을 치렀다. 늦은 결혼을 자랑이라도 하듯 마흔 평이 넘는 새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유명 상표의 혼수들로 속을 꽉 채운 집은 보기에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화려했다. 시댁 이야기며 남편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그녀의 달콤한 신혼 자랑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왠지 즐겁지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모퉁이에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휑했다. 환한 달빛이 앞을 비춰 줄 것이라는 생각과 늦은 밤 남편이 나를 기다려 줄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쥐죽은 듯 고요한 공기가 나를 더욱 숨죽이게 했다. 늦은 귀가에 면죄 받지 못할 죄인처럼 뒤꿈치를 ..

좋은 수필 2021.04.30

아버지의 혼불 / 김용삼

아버지의 혼불 / 김용삼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자 속도감이 완연해진다. 서너 시간의 여유 탓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탑게 인사를 나누던 일행들이 하나둘 노루잠을 청하고 있다. 차분하게 비 오는 날의 서정을 누리기에 제 격인 분위기다. 살며시 커튼을 들추어 바깥을 살핀다. 출발할 때 쏟아지던 발비는 어느새 실비로 잦아들고 있다. 빗방울은 버스의 속도감에 끈질기게 저항하며 유리창으로 몸을 던진다. 그러나 빗살무늬의 긴 빗금을 긋곤 이내 허공으로 튕겨나간다. 속도에서 탈락한 빗방울들은 뒤따라오는 차의 전조등에 투사되어 폭죽처럼 부서져 내린다. 허공으로 점묘되어지는 빛의 파편들은 오래 전 고향의 밤하늘을 물들이던 반딧불이의 군무와 오버랩 된다. 망연하게 비와 반딧불이의 추억을 오가다문 득 내 기억 한 켠에 켜..

좋은 수필 2021.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