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사무치다/박규리

에세이향기 2025. 10. 11. 17:07

 

깡마른 노을이 민둥산 넘다 말고 주저앉는다

마른 별빛 견디지 못해 나도 주저앉아 기다렸다

오래 기다렸다 하지 않겠다

그저 파란처럼 일생 너를 앓았다

천형

내 속에서 죽어 나간 건 아무것도 없었네 분노와 사무침도, 우짖는 절망과 통한도, 아무리 얼음장 밑에 가두고 화염 속에 던져도 그것들 내 속에 고스란히 웅크리고 있었네 어둠 속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내가 나를 죽이진 못했네

언제였을까, 천년 만에 발견된 연 씨가 싹 틔운 뒤 아뿔싸, 언젠간 저것들도 반드시 싹 틔우고 꽃 피우고 말리라는 걸 짐작한 것이, 나를 그토록 아프게 하고 세상 저버리게 하고 그댈 떠나게 하고 기어이 나를 버리려 발버둥 치게 했던 저 징그러운 것들이 아, 실은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한 가없는 쓰라린 욕망이자 엄마가 내게 유일하게 남겨 준 뜨거운 생의 젖줄임을 깨달은 것이

저것들 때문에 내가 살아 아침이면 길을 가고 밤이면 나를 증오하고 새벽이면 다시 나를 용서했다는 걸 알 것 같았네 일생 숨죽여 떨고 있는 저 가여운 것들을 내 손길로 어루만지고 내 눈물로 말갛게 씻어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나도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알 것 같았네

빛 좋은 날, 곰팡내 눅눅한 스산한 비애와 아직 다 꾸덕꾸덕 마르지 못한 짓무른 눈물과 잔가지 하나둘 썩어 가도 기어이 꿈틀대며 살아 숨 쉬는 뿌리까지 바람결에 내다 말리네 저것들, 저것들 다 품고 가는 일이 이 지상에서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쓸쓸한 천형이요, 하마 아득하고도 아름다운 업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네

홍도화 붉은 물결뿐

야윈 두 손으로 홀로 피안의 배를 노 저어 가는 그대 도대체 우리 살아서 몇 번이나 다시 만날까 아무 기약 없는 쓸쓸한 삶의 모퉁이를 나는 돌아가지만 그대 그곳에 도착하면 부디 잊지 말고 소식 한 장 꽃잎에 실어 보내 주오 봄, 눈물겨운 이승의 적막 밖엔 다시 흐를 게 없는 이 환장할 봄날, 텅 빈 허공만이 그대와 나 사이에 흐르고, 그 사이로 끝내 가닿을 수 없는 그대와의 지척엔 홍도화… 아아 홍도화 붉은 물결뿐

 

댓돌 위에 따뜻한 달빛 한 켤레

두 눈 꼭 감아도 문살 간질이는 바람 소리, 스멀스멀 좌복 속으로 스며드는 귀뚜리 울음소리, 그대 마지막 신음 소리, 열 손톱에 촥촥 쇠금 가는 소리, 혈관에 펄펄 신열 끓는 소리, 밤 깊을수록 더욱 세차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 소리, 소리, 소리, 견딜 수 없이 낭자한데…

괜찮다고,

문을 여니 댓돌 위에 따뜻한 달빛 한 켤레

안부

봄비가 후득후득 창문을 두드리며

겨우내 아팠던 내 안부를 묻네

괜찮으냐고

괜찮으냐고

오래 참았던 두 눈에

눈물이 핑 도네

네게로 가는 길

길 잃어도 네게로 가고

길 없어도 네게로 간다

온몸에 혈관처럼 펴져 있는 길

경혈마다 뜸불 자국 자욱한 길

눈 감으면 아직도 선명한 길

내 속에 사는 네게로 가는 길

길 잃어도 괜찮다

길 없어도 괜찮다

늙은 개

사시사철 대문 열린 골목 끝 집에 늙은 개 한 마리 쇠줄에 묶여 있다 사람이 오가도 쳐다보지도 짖지도 않고 온종일 죽은 듯 엎드려 있다간 아주 잠깐씩 눈을 들어 대문 밖 도로만 망연히 바라볼 뿐이다

문득 그 골목 안 늙은 개의 텅 빈 눈과 마주쳤다 그 속엔 무참한 이별의 상혼과 한 생의 뜨거운 열기가 당당하게 서려 있다

늙은 개가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괜찮다고,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오늘 따라 쇠줄에 설핏 스친 석양이 서럽도록 환한데

안거, 죄

골짜기마다 치자 향기 흐드러지고 찻잔마다 산국 향기 흥건하고 눈 뜨면 사시사철 온갖 생명들의 서럽고 애잔한 눈물 투명하게 흘러내리는 이곳으로 놀러 오세요 신산하던 지난날도 생각해 보면 한 점 떨어진 꽃잎에조차 비할 바 아니어서 억울할 것도 서러울 것도 아니어서 가슴속에 품어 둔 시린 노래 한 소절 흥얼거리며 눈 감고 이곳으로 놀러오세요 가슴에 당신 품은 죄밖에 없는, 이 아늑하고 아득한 곳으로

안거, 파도

대나무 그림자가 마당을 비질해도 마당엔 먼지 하나 일지 않고, 교교한 달빛이 사정없이 강을 뚫어도 물 위엔 흔적 하나 없습니다* 나도 언젠가 천길 마음 아래 닻 고이 내렸다 믿었건만, 스치는 한 줄기 그리움에 산산조각 난 상념의 파도는 이 밤도 벼린 칼이 되어 내 등을 맵게 후벼 팝니다

*야부도천冶父道川의 선시禪詩

안거, 구름 한 송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 아무것도 없는 줄 진즉 알아서 그동안 남몰래 사귀어 온 착한 구름 한 송이 불러다, 눈 감으면 마주보며 함께 웃다가 눈 뜨면 무작무작 함께 졸다가, 꿈 아닌 꿈길에선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비애와 칡넝쿨에 달라붙은 초월의 마른 잎도 몇 오물거리며 자다 깨다 자다 깨다 일없이 앉았습니다

안거, 강

애욕에 겨워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 희열로 터져 오르는 웃음 소리, 그리움에 타는 탄식 소리, 죽어 가는 이의 거친 쇳소리,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통곡 소리, 깨달은 자의 무심한 숨소리… 갈래갈래 서로 다른 길을 품에 안은 남강이 유유히 흐릅니다 환희와 비애가, 만남과 이별이, 삶과 죽음이, 장엄하게 흐르는 그 강을 따라 천 근 같은 생살을 끌고 나도 따라 흘러갑니다

사무치다

텅 빈 우주에 홀로 있는 것만 같은 슬픔이 뼈에 사무쳤다 마냥 열에 달떠 신음하고 가끔은 차갑게 식어 온몸을 떨었다 달 없는 한밤 흔들리는 자작나무 기둥에 기대어 서면 법당 뒤로 들려오는 노루 울음소리가 깊고 길었다

눈 감으면 사시사철 풍랑이 휘몰아쳤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다니는 조각배처럼 외로웠다 어지러웠다 마음이 어지러운 만큼 꿈도 어지러웠다 꿈에서 깰 때마다 구토가 났다 이 한 몸 작은 촛불로는 내 황량한 동토의 한 조각도 데울 수 없었다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였다 이리저리 떠밀리다 흔들리다 절명의 끝에서 등댓불처럼 내게 손짓하던 별 하나, 작고 흐리지만 목숨처럼 간절하던 그 불빛

너를 만나고 나를 용서하고 너를 다시 보낼 때까지 그러나 나는 한 번이라도 내게 진실했을까 얼마나 사무쳐야 아무런 불빛없이 나를 말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사무쳐야 빛도 어둠도 없는 그곳에서 기어이 너와 하나 될 수 있을까

앙상한 나무에 산 것들이 주검처럼 매달려 있더니, 갑자기 나뭇가지 하나 창을 깨고 들어와 내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긴다

아직은 더, 더, 사무쳐야 한다고!

한술 밥

만산 홍엽 신열에 지친 가을 아침

독하게 몸 일으켜 밥을 먹는다

보잘것없는 이 몸뚱어리도

함께 나누어 사는 생명 있어

억지로 물 말아 밥 한술 뜬다

착한 벌레 나쁜 벌레 병 벌레 약 벌레

모두 나와 밥 먹는다

독한 마음 보고픈 마음 설운 마음 찢긴 마음

모두 모여 밥 먹는다

내 속 어디에 이토록 많은 것들 살고 있었나

나는 없는데, 나를 이루고

세상을 가득 채운 이것들,

아무리 살아도 세상 모퉁이 돌 때마다

뼈저리게 아픈 병 끝을 딛고

오늘, 다 같이 뜨는 한술 밥

구절초

그리움 때문에

새벽 북은 울리고 바람이 불고

지친 눈을 뜨고 밥을 먹고 버려진 방에 돌아와

책상 위에 먼지를 쓸어내리다가

다시 그리움 때문에

한밤중에 길을 나서

만났다 이별하고 홀로 남은 사람들이

하나둘 쓸쓸히 시들어 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우리 만나서

장장한 울음으로 한 철 울다가

썩을 그리움만 낭자하게 남기고 떠난

그대 무덤가에 안겼다 돌아온 신새벽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어 다시 보고 싶어

그대 방문 앞에 서니, 오호

새하얀 눈물 환하게 밝혀 밤새 날 기다린 구절초

조각배

바닷가 어스름한 새벽에

조각배 한 척 떠 있다

저 위태롭게만 보이는 작은 배가

출렁이는 파도와 한 몸이듯 넘실대고 있다

파도보다 높지도 않게

파도보다 낮지도 않게

엄마가 흔드는 요람에 잠든 아기처럼

시소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아이처럼

비바람이 온몸을 때려도

파도가 머리끝까지 휘감아도

스스로 파도가 되어

생을 건너고 있다

겹동백

나를 후리고 내 혼줄 다 빼 놓고는

엄동설한에도 겹겹이 두른 치마

들추지 못해 환장이더니 천년만년

내 곁에만 살 것처럼 정분질이더니

봄바람 타고 줄행랑쳐서는

젠장할 이 산에서도 저 산에서도

요망한 속곳 훌러덩 다 까집고는

나부끼고 있네

벌겋게 나부끼고 있네

새해 아침

산기슭 다 쓰러져 가는 외딴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 추울까 봐

흰 눈이 소복하네

장독대 위에도

살구나무 위에도

갓 쪄 낸 백설기 같은

흰 눈이 소복하네

많이 드시라고

올해는 아프지 마시라고

하늘이 차린 밥상

방문 열고 나온 할머니가

서둘러 부엌에 드시더니

하얀 고봉밥 지어

마당에 지붕에 고루 뿌리시네

밤새 배고팠던 벌레들

날개 꽁꽁 언 어린 새들

어서어서 먹으라고

온 세상이 나눠 먹고도 남겠네

아무렇지도 않게

외로움에 담담해지는 것

그리움에 그만해지는 것

뼈마디 쑤시는 일에 무던해지는 것

그러다 문득 마지막 그날이 오면

잠결에 자던 배게 하나 옆구리에 끼고

슬그머니 건넛방으로 넘어가듯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게

화장

새 옷 입고 가네

예쁜 옷 한 벌 새로 입고 가네

고와라 고와라

바람에 치마 결 살랑거리고

끝동엔 자색 꽃잎 곱게 수놓이고

버선에 손 싸개에 모자까지 있네

나는 베옷 말고 종이옷 입고 가겠네

세상에서 제일로 보드랍고 얇은 나무로

옷 한 벌 곱게 지어 입고 춤추며 가겠네

좋아서

좋아서

저 화염 속 불길보다 더 붉고 환하게

웃으며 웃으면서 가겠네

낙타에 부쳐

ㅡ 신경림 선생님의 서거를 애도하며

가시네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가시네

가난하고 버림받고 슬픈 것들

부서져 흩날리는 아득한 길을

쏟아지는 열사의 태양 꿈결인 듯 받으며

세상 가장 낮은 진창마다

뻘투성이 맨발로 함께 빠지다

세상 배고픈 흙바람 속을

꽹과리 두드리며 함께 울부짖다가

형형한 눈빛일랑 속울음으로 감추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채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가시네

바보처럼 성자처럼

다 버리고 다 용서하고 모두 품어 안고

걸음따라 화염의 모래밭 큰물로 적시면서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오시네

오시네

저기, 낙타 되어 오시네

*신경림 시인의 시 <낙타>를 부분 인용.

나남시선 97

『사무치다』

- 글쓴이 / 박규리

- 펴낸 곳 / (주)나남

- 펴낸 때 / 2024년 6월

박규리

- 1960년 서울 출생.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수료.

- 동국대학교 대학원(불교선학) 박사.

- 1995년 《민족예술》로 작품활동 시작.

- 시집으로 『이 환장할 봄날에』(2004), 『사무치다』(2024)가 있음.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 박규리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

수렁 같은 사랑에 빠져버렸네…

박규리 시집 '사무치다'

연합뉴스 / 2024-07-19

김용래 기자

"텅 빈 우주에 홀로 있는 것만 같은 슬픔이 뼈에 사무쳤다 (중략) 달 없는 한밤 흔들리는 자작나무 기둥에 기대어 서면 법당 뒤로 들려오는 노루 울음소리가 깊고 길었다" (박규리 시 '사무치다'에서)

'사무치다'는 첫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창비·2004)를 펴낸 이후 20년간 안거(安居)에 들었던 박규리 시인이 두 번째로 펴낸 시집이다.

수록된 시편들의 바닥에는 "텅 빈 우주에 홀로 있는 것만 같은" 고독과 슬픔과 허기가 도도히 흐른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어서 그저 꿈만 같기도 하다.

"내 쓸쓸한 외로움과 가난한 허기가 / 저 나무도, 바람도, 당신도 만든 거라고 / 이 환장할 그리움도 치성한 슬픔도 / 다 내 한마음이 꿈결처럼 만든 거라고"(시 '정말일까'에서)

시인은 내 안은 물론, 내 마음 바깥쪽 세상 도처에 웅크리고 있는 고통받는 존재들을 연민으로 끌어안는다. 그리고는 '수렁' 일 줄 알면서도 끝내 '사랑'하고 만다. 절집에서 공양주로 지내고 또 오랜 시간을 선(禪) 공부로 마음을 다스렸다지만, 수렁 같은 사랑엔 오랜 공력을 쌓은 선승 같은 시인도 속수무책이다.

"끝내 너를 그냥 보낼 줄 뻔히 알면서도 / 이 수렁 같은 사랑에 다시 빠진다 / 어쩌랴 / 어쩌랴"(시 '수렁' 전문)

시인은 1995년 신경림·정희성 시인의 추천으로 '민족예술'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의 마지막에는 지난 5월 세상을 뜬 스승 신경림 시인을 기리는 조시가 자리했다.

"세상 가장 낮은 진창마다 / 뻘투성이 맨발로 함께 빠지다 / 세상 배고픈 흙바람 속을 / 꽹과리 두드리며 함께 울부짖다가 (중략) 가시네 / 바보처럼 성자처럼 / 다 버리고 다 용서하고 모두 품어 안고 / 걸음마다 화염의 모래밭 큰물로 적시면서"(시 '낙타에 부쳐 - 신경림 선생님의 서거를 애도하며'에서)

과작(寡作)인 시인이 앞으로는 좀 더 많은 시로 독자들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만드는 시집이다. 나남.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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