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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파본(破本)/파본

에세이향기 2025. 12. 9. 09:06

 

 


 
파본(破本)


   심강우


 
시를 쓴다고 방을 나가지 않은 날이 많았다
걱정하는 사람의 말이 달개비 꺾이는 소리로 번졌다
더러 흩어 놓은 말들이 구름을 이루고 떠돌다
한낮의 소나기로 다녀갔으나 처마가 깊어 젖지 않았다
한갓되이 울 밖의 소문에 귀를 담그지 않으리
온몸의 감각세포가 문풍지가 되어 달빛만이 우련했다
문고리 거는 기척에 모시나비 한 마리 기웃거리다 가고
내 속을 훑은 기억들이 뒤란의 동백으로 붉어질 때
삿갓을 닮은 섬에서 글을 썼다는 사람을 생각하곤 했다
그이 역시 붓을 들었을 때는 풍향(風向)을 묻지 않았으리
그이의 호흡을 필사한 후박나무가 푸른 소매를 흔들고
바늘땀 뜨듯 골무꽃은 자색 무릎걸음으로 안부를 물었으리
주위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문지방을 넘어선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벼랑 끝이었다 출렁이는 수평이었다
좀 더 수직을 유지하기로 했다
내가 버린 단어들이 수평의 검은 수위를 높였다
물살이 되어 아프게 철썩거렸다
이대로 섬이 잠겨도 좋다고 생각했다
먼 훗날 파도가 그치고 바다가 육지가 되고
내가 살던 방이 검은 지층이 되었을 때
우연히 닿은 어떤 인연이 퍼렇게 박힌 파본(破本) 한 구를
발견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시집 『사랑의 습관』 (2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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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본(破本)은 제본이나 인쇄가 잘못되었거나 파손된 책을 말한다. 훗날, 우연히 자신의 시집을 읽게 된 어떤 인연이 파본을 발견하게 될 거라는 건 오독으로서의 독서, 혹은 영원히 남는고고학적 유물로서의 작품을 의미한다. 전자라면 열린 읽기를, 후자라면 작가로서의 일반적 욕망에 해당한다.
   현재 발행되는 문예지는 모두 몇이나 될까? 마음먹고 세어본 적이 없으니 감이 잡히지 않는다. 대략 손꼽더라도 문예지마다 대략 스무 편에서 서른 편 정도의 시가 실린다 칠 때, 한 계절에 발표되는 작품 수는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쏟아지는 시집들까지 합한다면 쓴 사람과 그 주변 사람 몇몇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읽히지도 않은 채 사라지는 시들이 부지기수이리라. 돈도 안 되는 시를 왜 쓰느냐고,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그 짓을 왜 하고 있냐고, “걱정하는 사람의 말이 달개비 꺾이는 소리로 번”지든 말든 “시를 쓴다고 방을 나가지 않”는 이상한 시인들은 전국에 쌔고 쌨다. “한갓되이 울 밖의 소문에 귀를 담그지 않”겠다는 시인의 다짐 따위,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 세상인가. 아마도 그가 “삿갓을 닮은 섬에서 글을 썼다는 사람을 생각하곤 했”던 이유도, 노도에서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던 서포 김만중의 외로움과 닮은 외로움에 침잠했던 때문이리라.
   우리가 읽는 글을 누군가는 피를 찍어 쓴다. “오랜만에 문지방을 넘어선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던 시인처럼, 자신의 글에 혼을 담아내지 않는 작가가 어디 있으랴. 그렇게 쓴 한 편 한 편의 시를 귀하게 여기며 다정하고 자세하게 읽어내고 싶었다. 동백처럼 붉은 마음으로 썼으니 부디 퍼렇게 파본으로 남아 있기를…….
 
  신상조 (문학평론가)
 
심강우 / 1961년 대구 출생. 본명 심수철.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1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2014년 《월간문학》신인상 시 당선.  2017년 《어린이동산》 중편동화 당선. 시집 『색』『사랑의 습관』 , 소설집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꽁치가 숨쉬는 방』『우리가 우리를 버리는 방식』, 동시집 『쉿!』『마녀를 공부하는 시간』, 동화집 『꿈꾸는 의자』, 장편동화 『시간의 숲』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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