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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이야기 / 정해경

에세이향기 2026. 1. 23. 09:20

바늘 이야기 / 정해경

마루에 떨어진 먼지를 손바닥으로 쓸어 모으다 가시가 박혔다. 약지 셋째 마디에 따끔한 느낌이 들더니 만질 때마다 살갗을 찌른다. 밝은 곳에서 비춰보니 까만 티가 보일 듯 말 듯이다.

바늘을 찾아 들었다. 왼손에 바늘을 쥐고 오른손의 티를 헤집어 빼내야 한다. 이게 뭐라고 숨이 멎을 듯 긴장이 차오른다. 애먼 곳을 두어 번 찌르고 나서야 점 하나가 바늘 끝에 묻어 나왔다. 오만 가지 지천에 무수히 점을 찍던 바늘이 오늘은 박힌 점을 빼내는 일에 잠시 불려 나와 임무를 마쳤다.

바늘은 귀가 생명이다. 몸뚱이 하나에 귀 하나가 전부인 바늘은 귀가 떨어져 나가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 하나뿐인 귀에 실을 걸고 필요한 곳 어디든지 종횡무진 누비며 자신의 발자국을 남긴다. 촘촘한 잰걸음도 듬성듬성 뚜벅 걸음도 보일 듯 말 듯 점 하나씩 찍으면서 실선을 긋는다. 그렇게 그어진 실선은 이음새가 되어 꺾이고 공글러진 천은 마침내 공간을 만들어 필요한 곳에 마침맞게 씌우고 입히고 덮어준다.

레이스 뜨기를 할 때 쓰는 코바늘은 이름 그대로 코가 생명이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기다란 쇠막대 끝에 '코'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조그만 갈고리 하나. 그 코로 손가락에 걸린 실을 끝없이 걸고 또 걸어 원하는 문양을 만들어 낸다.

어느 한때, 나를 매료시켰던 레이스 뜨기는 훗날 손목 터널 증후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것도 중독이 있는지 하나를 뜨고 나면 더 멋진 것이 눈에 들어오고, 그것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실과 코바늘을 찾아들었다. 실을 한 번 감아 걸고, 두 번 감아 걸고, 순서를 바꿔 걸고, 짧게 걸고 길게 걸고.... 거는 것으로 점을 찍는 바늘과 실이라는 선이 만나서 걸고 걸리는 둘 사이의 무수한 반복에 장미가 피어나고, 딸기가 원을 그리고, 궁전의 웅장한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코바늘과 실을 양손에 나눠 쥐고 사슬뜨기로 시작해 한 줄 한 줄 뜨다 보면 점점 문양이 뚜렷해지고 마침내 실을 끊어내는 그 순간이 후련하면서 흐뭇했다.

귀도 코도 없이 몸뚱이 하나로 버티는 대바늘은 짝꿍이 생명이다. 대바늘뜨기는 일단 굵기가 같은 대바늘 두 개가 있어야 시작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자투리 실만 있으면 무언가를 뜨겠다고 달려들었다. 제일 만만한 건 목도리였다. 어른들 옆에서 지켜보던 뜨개질은 술렁술렁 단순 동작이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내가 해보니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코가 너무 빡빡해 바늘을 꽂는데, 콧등에 땀이 맺혔다. 열 코 한 줄을 뜨고 나면 어느 줄은 코가 열한 개, 어느 줄은 아홉 개가 되었다. 고쳐 달라고 어른께 가져가면 풀어서 다시 뜨라며 보지도 않고 바늘을 잡아 뺐다.

가을이 깊어지면 대바늘뜨기로 겨울을 준비했다.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가지 않은 편안한 자세가 되었고 머플러나 식구들의 옷을 떴다. 바늘을 넣고 빼는 것이 수월할 만큼 코가 느슨해지니 털실 뜨기는 비로소 따뜻한 공기를 품으며 포근해졌다. 몇 뭉텅이 실이 다 풀려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닥의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나만 아는 비밀처럼 신기했다.

바늘 두 개가 실을 매개 삼아 분주하게 주고받는다. 마치 어미 새와 아기 새가 부리를 맞대고 먹이를 주고받듯 겹쳤다 떨어졌다를 수없이 반복하며 세력을 넓혀간다. 점 하나 찍듯 코 하나씩 늘려갔을 뿐인데 허공에 집을 짓는 것처럼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차곡차곡 쌓여 면이 되고 면과 면을 붙여 입체가 된다. 이제 마지막 점을 찍고 실 끝을 감추고 나면 바늘은 미련 없이 퇴장이다.

내 손으로 떴던 여러 가지 손뜨개들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 역할을 다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소파를 들여오던 날, 소파보다 소파 등받이를 우아하게 장식해 줄 레이스 뜨기를 펼치는 것에 마음이 부풀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싫증 났고 어느 날, 차곡차곡 개어져 장 속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의 멋진 니트 코트도 고작 두 해를 입고 그만이었다. 그럼에도 선뜻 버리지 못하는 것은 공들여 짰던 그 시간이 실 사이사이 깃들어 있어서였다.

바늘은 점으로 시작해 공간까지 선과 면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생활 속의 도구인 줄만 알았는데 다시 보니 시간까지 새겨 넣는 재주를 지녔다. 바늘이 내 손끝을 따라다니는 건지, 내가 바늘을 따라다니는 건지. 아니다. 어느 한동안 바늘과 내가 일체가 되어 차원을 넘나드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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