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응시하는 몸의 기억들
마경덕(시인)
무언극에서 관객의 시선은 배우의 손짓, 발짓에 집중된다. 섬세하고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몸동작은 대사(臺詞)와 같다. 최윤우 연극평론가는 “무대에는 소통을 위한 약속이 있다. 연극이 상황에 대한 약속이라면, 마임은 경험과 느낌에 대한 약속이다. 그 경험이 마임이스트의 몸짓과 만났을 때 무대는 한 몸으로 같은 동선을 그려간다. 마치 같은 붓을 잡고 스케치를 하듯. 마임 공연은 그렇게 관객들과의 소통에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고 하였다.
시 창작에서도 ‘경험’은 시의 거름이며 ‘느낌’은 수확물이다. 시는 동작으로 말을 대신하는 팬터마임(pantomime)처럼 부호 하나도 언어로 작용한다. 짧은 문장으로도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시(詩)이기에 압축된 문장은 가장 긴 문장일 수도 있다. 그 여백 속에 숨은 것을 읽어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시인과 독자와의 암묵적 약속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된다”는 연극 대사가 있다.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간절할 때, 막다른 끝에서 태어난 시들은 그 무게를 지니고 있다. 어설픈 엄살이 아닌 절실함은 누군가의 심장을 명중하고 파장을 일으킨다. 느낌은 “몸의 말”이어서 마음이 맨 먼저 알아보는 것이다.
김훈 소설가는 “절망의 힘으로 다시 그 절망과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 아마도 말의 운명이며 그래서 삶은, 말을 배반한 삶으로부터 가출하는 수많은 부랑아들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가출한 수많은 부랑아들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배반한 것들의 무리라는 것인데, 그것들이 말[言語]의 운명이라면 시나 소설, 희곡 따위가 그 부류일 것이다.
박정화 시인의 시편들은 간절하지만, 그 간절함을 슬쩍, 보여주고 이내 침묵한다. 얼핏 스쳐간 것들이 한동안 가슴에 선명하게 남는다. 침묵의 행간을 헤아려보면 어둑한 병실에서 휴가 가듯 아내의 손을 놓아버린 사람이 있고, 마음에 들어와 서성이는 쓸쓸한 저녁과 집으로 가는 길을 잊고 싶은 막막함과 아직도 오지 않는 기다림과 눈빛조차 둘 데 없는 무력한 고독이 그만 죽어도 좋겠다고 선로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죽음이라는 명시적 기억(explicity memory) 앞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래 묵은 기억들과 타인은 알지 못하는 적막함이 시인의 몸에 살고 있다. 그러나 박정화 시인은 자신의 감정에 침잠(沈潛)하지 않고 몰아치는 감정의 완급을 차근히 조절하며 일련의 서사를 재현하고 있다.
쓸쓸함이 빈 배처럼 떠밀려 오는 날
내 창가에 붉은 감잎 하나가
기억 하나를 얹어 놓았다
어둑한 병실에서
휴가 가듯 그가 내 손을 놓았을 때
후르르 떨던 계절이 나보다 먼저 울었다
살아가는 법을 민들레 꽃씨만큼도 모르던 날
친구에게 돈 얘기를 꺼내는 비루함과
치과를 갈 수 없던 가난의 통증 앞에
보고픔은 버려야 할 허영이었다
나만큼의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한 수치가
고장 난 회로 같이
언제나 가을을 들여 앉혔다
유택이 앉을 산자락에
미리 온 계절이 그늘을 짓는다
묵혀둔 일기장에 묘비명을 썼다 지우는 오늘
사진첩의 흔적들도 먼지처럼 날아가고
서랍 속 내 허물들도
헌옷 수거함으로 버려진다
아직도 내 안에 들어와 휘저어 놓고 가는
너를 만나러 가는 준비를 준비하는 날들
꼭 와야 하는 것처럼
사붓사붓 눈이 올 것 같은 하늘에
기러기 한 마리 꾹꾹 울음을 물고
북녘으로 날아간다
― 「만추」 전문
홀로 남은 자의 고통에 대해 “내가 얼마나 고독했었는가를 쉽게 잊는 것은 학살의 일부이다. 얕은 기분으로 화분에 물 주며 나를 뜯어내듯 죽은 잎을 뜯어내는 것도 학살의 일부이다”라고 한 김소연의 시가 떠오른다. 「만추」 는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 “고통의 기록”이다. 잊어서도, 잊을 수도, 위로할 수도, 위로를 받아서도 안 되는, 자신의 법칙 안에 묶인 남은 자의 몸부림이다. 하릴없이 지루하게 평화를 누리는 것, 시나브로 말라버린 기억들을 한 잎 한 잎 뜯어내는 것조차 스스로를 겨냥하는 자학(自虐)의 범주에 들어있다. 자의든 타의든, 고통은 동반되고 대책 없는 슬픔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냉정한 현실이 삶의 목을 조여온다. “살아가는 법을 민들레 꽃씨만큼도 모르던 날/친구에게 돈 얘기를 꺼내는 비루함과/치과를 갈 수 없던 가난의 통증 앞에/보고픔은 버려야 할 허영이었다”라고 고백한다.
남편의 그늘에서 세상모르고 살던 아내가 마주한 세상은 냉혹하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다”는 서양 속담처럼 ‘내부’에서 점점 ‘외부’로 확장되는 고통은 그리움마저 지워버린다. 당면한 현실의 벽 앞에 “육신과 정신적인 고통”이 지속되고 풀지 못한 문제는 고인에 대한 슬픔마저 잠식해버린다. 전해수 평론가는 “결코 내 안에서는 깨어지지 않는 절대적 슬픔은 돌을 던져 그 대상을 깨뜨리기에는 어려운 바람 같은 슬픔”이라고 하였다. 박정화 시인이 마주친 체험적 슬픔도 대상을 깨뜨리기 어려운 바람 같은 슬픔일 것이다. 이 슬픔마저 이제 만추(晩秋)처럼 저물어간다.
저잣거리에서 버스를 따라온 저녁
아이의 어미가 내리지 않아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유월의 저녁은 천천히 오는 것이라서
굴뚝의 연기같이 온기를 품고 오는 것이라서
스멀스멀 기어오는 물 탄 어둑을 빗자루로 쓸어내며
일곱 살 아이는 버스를 기다린다
후드득 감나무 잎사귀에 빗방울 지나가고
축축한 저녁이 댓돌 위에 올라서면
빈 신발 자리엔
허기진 기다림이 밤을 밀고 있다
앞산이 성큼 다가서면
내일을 도리질하는 할매
등잔 심지를 털어내며
옅은 밤을 끌어와 이불을 펴고
천식 기침 뱉으며 막차도 밤으로 간 지 오랜데
아이는 오늘도 어둠과 친구가 되어
겁먹은 표정으로 아직도 내일을 기다린다
이따금 마음에 들어와 서성이는 쓸쓸한 저녁과
집으로 가는 길을 잊고 싶은 막막함과
지금도 오지 않는 대책 없는 기다림을
늘 앓고 있는 수심처럼
묽은 어둑의 얼굴로 다가선다
― 「저녁의 표정」 전문
한 입 먹는 순간 누군가가 꼭 안아주는 느낌이 드는 음식, 사랑했던 사람이 떠오르거나 그와 함께 했던 순간이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 미국 메인주 시골 마을에 ‘로스트 키친’이라는 아담한 식당의 세프 ‘에린 프렌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였지만, 한 입 떠 넣으면 그들이 옆에 있는 듯 느껴지는 음식을 만들었다. 그에게는 누가 가장 멋진 음식을 만드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음식을 먹고 나면 남는 것은 음식을 먹는 동안 느꼈던 좋은 감정이며 그 소박함이 “음식의 힘”이라고 하였다. 좋은 음식이란, 사랑을 표현할 말이 없을 때 사랑을 맛보게 해주는 수단이며 요리의 강력한 힘은 음식의 맛을 오래가는 추억으로 바꿔주는 것이라고 했다.
시 한 편이 ‘깊은 맛’을 낸다. 굴뚝의 온기 같은 어릴 적 그 느낌,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그 온도는 따스한 엄마의 체온과 같다. 저잣거리에서 아이와 함께 돌아온 엄마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가족을 위해 서둘러 저녁을 지었으리라. 경쾌한 도마 소리,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 달그락달그락 그릇 소리가 부엌을 빠져나와 그 저녁을 다 채웠을 것이다. 음식을 먹는 동안 느꼈던 좋은 감정처럼 이 평화로운 기억은 그리움으로 변환되고 “살아갈 힘”으로 작용한다.
「저녁의 표정」 은 엄마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이 시 전반부에 깔려 있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엄마와 함께 보낸 일곱 살의 기억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여실히 느껴진다. 이따금 마음에 들어와 서성이는 쓸쓸한 저녁과 집으로 가는 길을 잊고 싶은 저녁의 표정에는 유년의 즐거운 순간들이 잠복해 있는 것이다. 일곱 살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하늘과 같다. 그 엄마가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안도감으로 저녁은 날마다 배불렀을 것이다. 그 빈자리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시인의 쓸쓸한 목소리가 파문으로 번지고 있다.
면경 같은 햇살이 살얼음을 만지는 강가에
속앓이처럼 뾰족한 입술을 내미는 버들
겨울을 밀어내느라 힘이 드나 봅니다
따뜻한 사람들의 심성처럼
시장기 같은 그리움이 내려앉는 물 위에
노을이 기어와 불을 붙이면
바람은 잠시 멈추어 서고
건너편 강둑에서 봄이 걸어와 내 곁에 섭니다
제 식구들 보듬어 안고 몸을 트는 샛강에
가물한 기억 같은 물주름이 일면
내 안에 들어선 티눈 같은 통증을
물수제비에 얹어 던져 봅니다
아궁이에 남은 재 냄새를 따라
돌아가기엔
아직 낙조가 너무 붉습니다
나무껍질 속으로 달큰한 물길이 흐르는 삼월
강은 긴 봄날처럼 아득한데
어디쯤 갔을까요
꽃이 되기 위해 흘러간 어머니는
― 「삼월이 지나는 강둑에서」 전문
거울처럼 해맑은 햇살이 살얼음 낀 삼월의 강을 녹이고 있다. 삼월이 딛고 지나갈 강은 이제 “봄의 발목”이 푹푹 빠진다. 돌덩이처럼 단단했던 추위를 밀어내는 봄의 응원에 속앓이하던 버들잎도 안간힘으로 뾰족한 입술을 내미는 강둑은 밀고 당기는 힘으로 팽팽하다.
“제 식구들 보듬어 안고 몸을 트는 샛강”에서 샛강이 키우는 식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강물에 발을 적시는 버들과 물살을 간지럽히는 바람과 샛강을 다녀가는 새떼와 저녁노을도 모두 강이 보듬어주는 식구일 것이다. 시인의 가물한 기억에 물주름이 일면 자신을 보듬어주던 가족이 떠오른다.
내적 파동과 만나는 곳은 삼월이 지나는 강둑이다. 일찍 곁을 떠나버린 어머니의 부재는 티눈 같은 통증으로 도진다. 물수제비를 던져 보지만 흘러가지 못하고 강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돌멩이는 여전히 떨치지 못한 그 무언가가 있음을 암시한다. 나무의 물관으로 달큰한 물길이 흐르는 삼월이지만 더는 흐르지 않는 기억이 사무치고 시인은 탄식한다.
서둘러 져버린 꽃이 되지 못한 어머니, 강물처럼 흘러가 버린 기억들이 모두 삼월의 강둑에 모여 있다. 축적된 상처를 응시하며 고백하는 박정화 시인의 서정적인 시편들은 대부분 몸의 기억들이다. 각인된 고통의 순간들을 심미적(審美的)으로 구성하고 내면에 잠재한 방황과 슬픔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놀라운 것은 개인의 서사가 현대인의 피폐화된 마음을 어루만지는 힘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렇듯 감정의 내부까지 파고드는 아릿한 울림이 박정화 시인이 지닌 힘이며 쓸쓸함을 감당하는 방식이다.
바람난 아버지 돌아오지 않는 동짓달 밤
종신자식 기다리던 할매는 철부지 손 잡고 저승길 떠났다
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 지 몇 계절이 다녀가고
시어미 똥오줌 받아내는 어머니 한숨에 밤이 더 긴 겨울
굳어버린 무릎을 세우고 산 지 삼 년
모로 누워도 무릎은 서 있고 반듯이 누워도 서 있던 무릎이
목숨줄 놓았다고 펴질까
별짓을 다 해봐도 삼 년이나 굳어버린 다리는 펴지지 않는다
새벽빛이 할매의 갈 길을 재촉하는가
상두꾼 아재가 다딤이돌을 안고 와 할매의 곧추선 다리에 놓아 버렸다
따닥!
펴졌는지 부러졌는지 아무도 말이 없다
어머니의 곡소리만 더 서럽고 아버지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다
부러진 다리로 저승길 가는 할매 걱정보다
다듬잇돌 밑에 깔린 다리의 신음이 밤마다 나를 찾아와
무서운 열병을 앓았던 내 열두 살 겨울밤은 너무 길었다
― 「할매의 다리와 다딤돌」 전문
임종 시간은 다가오고 종신자식은 오지 않는 길고 긴 동짓달 밤, 기어이 어린 손녀의 손을 잡고 임종을 맞은 할머니는 먼길을 떠나셨다. 죽음보다 깊은 상처는 할머니의 “곧추선 무릎”이었다. 펴지지 않는 무릎은 입관이 불가능하기에 상두꾼 아재가 무거운 다듬잇돌을 안고 와 할매의 곧추선 다리에 놓아버린 순간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릎이 펴졌다. 시인의 열두 살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의 한이 서린 곡소리와 원망과 두려움이 도사린 아버지의 빈자리가 있다.
“부러진 다리로 저승길 가는 할매 걱정보다/다딤이돌 밑에 깔린 다리의 신음이 밤마다 나를 찾아와/무서운 열병을 앓았던 내 열두 살 겨울밤은 너무 길었다”고 한다. 모로 누워도 반듯이 누워도 삼년 동안 서 있던 무릎이었다. 별의별 짓을 다 해도 펴지지 않던 다리를 다듬잇돌이 내려치고 따딱, “뼈 부러지는” 소리는 할머니의 마지막 비명처럼 들렸을 것이다. 막연히 죽음이라는 느낌을 깨뜨려버린 찰나의 그 생생한 소리가 겁많은 두 귀를 붙잡고 있다. 동짓날 밤의 풍경은 마치 퍼즐 조각이 떨어져 나간 미완성의 작품과 같다. 숭숭 구멍이 뚫려버린 삶, 제자리를 채우지 못한 허기와 불안함이 내면에 각인되어 음습한 기억을 도출(導出)해낸다. 암울한 결말은 “부러진 무릎”이 되어 시인의 가슴에 웅크리고 피부에 와닿는 한기(寒氣)는 오래 가시지 않는다. 「할매의 다리와 다딤돌」 은 가부장적 권위에 희생당하며 살아가는 여인들의 고통을 리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장터 돌아앉은 골목 끝 백마관
쉰 술 냄새가 춤추던 홀
찌그러진 주전자들이 반짝반짝 웃고 있다
이름이 마담인 엄마와 내 눈을 마주보지 못하는
동갑내기 친구가 사는 술집
내 사친 회비를 꿀떡 삼키고 아버지를 빼앗아 간
유년이 아프던 그곳
내일을 준비하러 노을이 산 넘어가면
아버지의 시간은 지금이 시작인 듯
자전거 뒤에 자반 한 손 묶어놓고
수박등의 손짓 따라 백마관 유리문 속으로 스르르 흡수된다
하늘로 치솟은 올림머리와
치맛단 잘잘 끌며 웃음 헤픈 색시들과
통곡하듯 부르는 울어라 열풍아
주전자 뚜껑과 젓가락도 떼창을 하는 골방
뜨거운 바람도 밤을 새고 아버지도 밤을 지샌다
일 년 농사 다 바치는 아버지와
내 꿈도 주전자처럼 찌그러지던 날
미운 그 친구 마담 엄마를 버리고 밤 기차를 탔다
부지깽이 두드리며 장단 짚던 술집 딸내미
어느 항구 선술집에서 울어라 열풍을 열창하고 있다는 바람의 소식과
주전자만큼 불러오는 아버지의 배는 간경화 꽃이 만발해
쉰 고개에서 봄을 따라갔다
TV 화면에 트로트 한 자락 흐르고
살풋 봄잠 속으로 용서가 덜 된 아버지 다녀가면
눈 흘기며 밀어내던 나보다 더 가여운 친구의 눈물과
백마관 벽에 매달려 울어라 열풍을 토해내던 주전자들
잊히면 더욱 좋을 풍경들이
아물지 않는 상처의 생살처럼
기억을 헤집으며 기어 나온다
― 「찌그러진 주전자가 부르는 울어라 열풍아」 전문
‘백마관’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한 가족의 사건으로 확대되고 있다. 유년에 찾아온 상실감을 시인은 고통스럽게 더듬는다. 아버지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순간 희망은 차단되고 어둠은 지워지지 않는다. 한 줄기 빛을 찾으려는 시인에게 현실은 너무나 냉정하다.
“내 사친 회비를 꿀떡 삼키고 아버지를 빼앗아 간/유년이 아프던 그곳/내일을 준비하러 노을이 산 넘어가면/아버지의 시간은 지금이 시작인 듯/자전거 뒤에 자반 한 손 묶어놓고/수박등의 손짓 따라 백마관 유리문 속으로 스르르 흡수된다”에서 추측하듯이 ‘백마관’은 아버지의 생활 반경(半徑)을 차지하고 있다. 자전거 뒤에 묶인 자반 한 손은 가족의 끼니가 되지 못하고 백마관 단골인 아버지는 술과 여자에 둘러싸여 세월을 탕진하고 있다.
날이 저물고 애가 탄 어머니가 아이에게 시킨 심부름은 아버지를 찾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지만 주색에 빠진 아버지의 시계는 ‘백마관’에 멈춰있었다. 대쪽을 얽어 수박 모양을 만들고 종이를 발라 그 속에 초를 켠 수박등, 아버지는 각박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환상적인 불빛에 홀려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자식의 사친 회비와 일 년 농사를 유흥비로 다 갖다 바친다. 결국 아버지는 간경화로 복수가 차오르고 쉰 고개에서 봄을 따라갔다. 가장을 잃어버린 집안 형편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가족에게 무책임한 아버지는 여전히 용서가 덜 된 사람이다. 오래된 상처는 쉬 아물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를 현재로부터 이해할 수 있고, 현재는 과거로부터 파악될 수 있다”고 한다. 현재는 과거와 이어지고 탕진한 시간만큼 아버지는 스스로 소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양은 주전자가 찌그러지도록 장단을 치며 주색잡기로 세월을 보내던 무능한 가장들, 아내에게는 권위를 앞세우던 남자들, 시인은 일상에서 자행되는 관습의 폭력을 일찍이 경험한다. 「찌그러진 주전자가 부르는 울어라 열풍아」 는 한 시대 사회상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막차를 기다리는 전철역 나무의자에
집으로 가는 길을 밀어내는 바람 한 뭉치
뻣뻣한 목을 세우고 있다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고
눈빛조차 둘 데 없는
이 무력한 고독이
그만 죽어도 좋겠다고 선로를 향해 걸어간다
여백 없는 카운셀링 A4 용지에
속엣것 뭉텅뭉텅 다 게워내고
의사의 가운을 부여잡은 야만이
불우한 가슴을 때린다
선이 모호한 삶의 지평은
초점이 흐린 안경처럼 흔들리고
빈혈이 잦은 시간이 낳아버린
후회만 점철된 일상 속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가슴이 널을 뛴다
통제한 기억마저 굳이 아파하며
이미테이션 같은
피해와 망상의 자켓을 입고
막차가 떠나버린 전철역 나무의자에 앉아
이 밤
허파까지 부푼 바람 한 뭉치를 토해내며
뻣뻣한 뒷목을 수습하고 있다
― 「우울의 얼굴」 전문
먼저, 낭만적이고 화려한 파리의 어두운 변두리 표정을 담아낸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 을 살펴보자. 파리의 뒷골목 누추한 몰골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 보들레르의 거칠고 혁명적인 산문시에 대해 황현산 평론가는 “산문으로 시를 담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산문적인 현실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했다”고 하였다. 가난한 자들의 모습에서 암울한 세계의 숙명을 발견한 보들레르, 파리의 내밀한 모습을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담아낸 『파리의 우울』 은 문학 장르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하나의 “문학적 사건”이었다.
“지붕들의 물결 저편에서, 나는, 벌써 주름살이 지고 가난하고, 항상 무엇엔가 엎드려 있는, 한 번도 외출을 하지 않는 중년 여인을 본다. 그 얼굴을 가지고, 그 옷을 가지고, 그 몸짓을 가지고, 거의 아무것도 없이ⵈⵈ 때때로 그것을 내 자신에게 들려주면서 눈물을 흘린다.” 보들레르의 「창문들」 이란 시의 일부분이다. 삶에 지친 우울한 도시의 모습은 파리를 표현하는 시적 알레고리이다. 보들레르는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현시대의 암울한 흐름을 예견했을 것이다.
불완전한 삶에 느닷없이 끼어든 불행으로 우울은 가중된다. 현시대의 눈부신 문명에도 편리하고 풍요로운 생활에도 우울은 존재하고 우울 앞에 인간은 무력해진다. 박정화 시인은 늦은 밤 눈빛조차 둘 데 없는 무력한 고독과 싸우고 있다. 의사의 가운을 부여잡아도 죽음은 완고해서 불우한 가슴을 때린다. “통제한 기억마저 굳이 아파하며/이미테이션 같은/피해와 망상의 자켓을 입고/막차가 떠나버린 전철역 나무의자에 앉아” 그만 죽어도 좋겠다고 선로를 향해 걸어가는 것은 고독한 절망이다. 바람 한 뭉치를 토해내며 뻣뻣한 뒷목을 수습하는데 우울은 모든 것을 체념하라고 다가와 속삭인다.
부스러기처럼 남겨진 것들은 온몸을 조이는 각박한 현실이다. 박정화 시인의 시편에는 녹록지 않은 삶의 흔적과 그로 인한 안타까운 감정들이 부산물처럼 남아 있다. 아래 예시된 작품은 이 시집의 표제작이다. 내면에 깃든 이룰 수 없는 열망은 비애(悲哀)로 다가온다. 그 누가 예기치 못한 운명에게 관대할 수 있을까.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로 갈 거야
트루먼 쇼 같은 나의 무대가 끝나는 날
노을이 되어 떠날 거야
꽃을 조문하며 마음 밭에 씨앗 하나 뿌렸더니
싹대 하나 눈물로 녹아버리고
마당엔 언제나 바람이 서성이네
화려한 말솜씨도 없고
박신박신한 허물과
한 박자 늦게 가는 이력으로
닳아버린 뒷굽 같은 생이였어
퀵 서비스로 배송된 불행을 반송할 수 없어
나의 시간은
필라멘트가 나가버린 알전구처럼
늘 저녁이었지
외로움과 쓸쓸함은 수선할 수가 없어서
압축된 파일 속에 숨겨버렸어
커튼이 내려지면
가녀린 풀등에 앉았다가
숨 가쁜 여울을 달리다가
말간 달빛의 애무에 혼곤한 꿈을 꾸다가
사랑받지 못한 푸석한
기억을 지우며 나는 그렇게 노을이 되려 하네
그리하여 긴 줄기의
서사 끝에 서 있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로 갈 거야
먼길 다녀와도
늘 거기 기다리고 있을 그대에게
일생 단 한 번 찾아온 사랑을 만나고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추억을 껴안고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여주인공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다리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자녀들은 유품을 정리하다가 어머니가 숨겨온 다른 유품을 열게 되고 거기에는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나흘간의 이야기와 평생 가족에게 충실했으니, 죽어서는 남편이 아닌 일생에 처음 만난 사랑을 택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이처럼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의 상징이며 죽어서만이 갈 수 있는 다리이다. “한 박자 늦게 가는 이력으로/닳아버린 뒷굽 같은 생이였어//퀵 서비스로 배송된 불행을 반송할 수 없어/나의 시간은/필라멘트가 나가버린 알전구처럼/늘 저녁이었지”라고 어두운 기억을 고백하는 시인, 사랑받지 못한 푸석한 기억을 지우며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대에게 가겠다고 한다. 이 다리는 애틋한 사랑을 상징하는 추상적 장소이다.
장성은 작가는 “내게 추상성은 아름다움의 가능성이 응집된 총체다. 추상적인 개념들에 대해 자문하며, 그 추상성을 완전히 해체하기보다 더 분명한 방법으로 다가서고자 하는 시도들이 작업으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일정한 긴장과 자기 통제 아래 이루어지는 상상력의 문학은 암울한 시대 상황과 싸우는 유일한 부드러움이요 무기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로 진입해서 시상(詩想)을 찾아내는 ‘추상적 사고’를 가진 박정화 시인에게도 추상성은 설렘이며 그 추상성을 해체하기보다 더 분명한 방법으로 다가서는 시도가 “시를 짓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집 한 권은 한 사람이 굽이굽이 살아낸 “왜곡할 수 없는 역사”이다. 만날 수 없는 사랑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로 가야 한다. 재회가 “가능한 지점”은 오직 그곳뿐이다. 가질 수 없어 더욱 애틋한 사랑은 그 다리에서 시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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