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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돌 위의 신발 / 석민자

에세이향기 2023. 3. 14. 09:00

댓돌 위의 신발 / 석민자 

안나의 집엔 특별한 신발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조그마한 남자용 흰 고무신이다. 노리개로도 모자람이 없을 작고 앙증맞은 신발이 댓돌위에 가지런히 놓인 모양새는 누구라 없이 웃음을 베어 물게 한다. 낯가림을 하는 사람도 단박에 팔을 내어 밀게 하는 친화력이다. 바깥쪽으로 얌전히 놓여진 품새는 신 임자가 집안에 있음을 일러준다. 하기는 백일 전의 아기나 신음직한 신발이니 임자가 집안에 있을 밖에 없을 일이기는 하다. 신 임자가 누구냐는 물음에 예수님이라고 답하는 수녀님 얼굴이 풀꽃이다.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예수님 신발을 준비해둘 생각을 하다니. 

 고요하기가 물밑 같다. 자식을 하느님사도로 내어주고 노후가 여의찮아진 어른들이 모셔진 곳이다. 지금껏 십자가 고상이나 성모상만 봐오던 눈에 비친 골무만한 신발 한 켤레가 예수님의 실체에 무게를 더한다.

 '비우고 나면 우선은 내가 편해지고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은 더불어 편해진다.'

 식탁보 밑에 깔려있는 글귀다. 자식을 성직자로 키우지는 못했어도 어떻게 안 될까 싶어 슬쩍 돌려 봤더니 2순위도 있단다. 어디에고 순번은 매겨져 있음이다. 대체로 첫 번째만 인정해 주는 곳은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뭣하던데 마음이 구름으로 뜬다. 천국이라고 이보다 아름답기만 할까. 죽음은 준비를 하고 또 해도 모자람이 없던 것을. 진즉에 깨쳤더라면 좀 더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보려 노력이라도 했을 것을, 살아온 세월이 아쉬움으로 질척인다.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설이나 돼야 새 신발을 신을 수가 있었다. 리본이 달린 빨간 고무신을 품어 안고 잠이 들던 유년이 댓돌 위에서 어른거린다. 늘 한 두 문수쯤은 큰 신발을 사다 주는 통에 입술을 한 발은 되게 빼물던 모습이 정지된 화면으로 남았다.

 "따배이 한 축은 걸따. 다음분에는 시롤 재서라도 꼭 맞차 주꾸마, 그래이 그 입수부리 좀 들놓거라."

 발이 커졌을 때를 배려한 어머니의 속내가 깨쳐졌을 땐 발바닥에 박힌 군살이 신발두께로 두터워져 있었다. 중 고등학교 육년을 신고 다녔던 까만 운동화는 고방 안에 갇혀진 그리움이다. 토요일이면 무조건하고 신발을 빨았고 비라도 내릴라치면 쇠죽솥전이나 부뚜막에 널어서 말려 신던 신발이다. 감히 입도 뻥긋 못 할 거면서 여벌로 한 켤레가 더 있었으면 속으로만 바라는 가운데 육년이 지나갔다.

 하이힐을 첨 신었을 때의 기분은 백설 공주라도 된 듯 으스대지던 치기와 함께 발뒤꿈치가 아팠던 기억이 혼란스럽게 버무려져 있다. 발뒤꿈치가 까져 반창고를 붙이고서도 계속 신고 다녔던 것으로 보아 겉멋이 한창으로 들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겉 치레로 신어야 했던 족쇄의 시작이던 신발이다.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는 세상을 품어 안았을 때의 느낌이 그만할까 싶게 황홀했고 츰으로 대문을 넘어서는 아이의 뒷모습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부르짖었다는 부처가 무색하도록 당당해 보였다. 이제옆에서 거들어주는 정도로 내 소명이 끝났음을 아이의 뒷모습이 완곡히 일깨운다. 지금은 비록 삐뚤빼뚤 걷고 있어도 곧 저 나름의 축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수도 없이 신발 끈을 조여 가며 가야 할 멀고 험한 길이다. 자신에게 맞기만 한다면 유리구두가 부러울까 만은 자칫 잘못 내디뎠다가는 족좨가 될 수도 있음이니 아무려나 신중하기를 바라는 밖에는.

 

 웬 종일을 걸어도 괜찮은 신발이 있는가 하면 모양새만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신발도 수두룩한 게 세상이다. 언제부턴가 먼 길 떠날 일이 생겨나면 신발부터 점검을 한다. 혹여 도중에 탈이라도 생겨 동행에게 짐이 된다면 그 일을 어쩔까 싶어서다. 살아오면서 지운 짐만도 태산이겠거늘 방향이 같다는 것만으로 덧짐까지 지운 데서야 낯이 없을 일이다.

지구를 두어 바퀴쯤 돌아 온 만큼을 걸었을까. 신발에 따라 기준의 척도가 달라질 수도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고 보니 끝자락이 저만큼이다. 보풀이 일어 나달나달 해진 신발, 고단한 품새는 전쟁터를 다녀온 말발굽처럼 땀과 먼지가 범벅이다. 임자가 출중치를 못한 탓에 안 해도 될 고생까지 해온 신발이다. 남겨진 일이 얼마일지는 몰라도 그만큼 부려먹었으면 이젠 좀 쉬게도 해줄 일이다. 발바닥이 신발바닥만큼이나 두터워진 처지에 맨발이라도 못 갈 길이 어디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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