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겨울소리/문경희

에세이향기 2023. 3. 15. 03:10

겨울소리

                                                                                                                       

                                                                                                                문경희                                                           

 사방 바람의 우범지대다홀로로는 결코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부조리에 맞서듯 바람은 닿아지는 모든 것들을 다그쳐 소리를 만들어낸다소리를 앞세워 자신을 과시하고소리를 채찍 삼아 세상을 평정하려 든다.

 뒷산 능선을 넘어오는 북풍 역시 을씨년스러운 소리부터 앞세운다수척해진 나무들의 등짝에 냉냉冷冷한 문신을 새기고 있는지바람의 손이 스칠 때마다 구성없는 비명이 쏟아진다바람의 소리인지소리의 바람인지오늘 따라 집 뒤 굴참나무 숲정이는 귀곡산장이 따로 없다.  

 얼음장 같은 바람이 헤살을 놓는 날엔 무조건 퇴각을 외쳐야 한다바람에 항거하는 방법이란 고작 문이란 문을 꽁꽁 닫아걸고 보일러의 온도를 높이는 것뿐이다그러나 철옹성 같은 문도 소리의 출입까지는 막을 수 없나니휘잉바람이 흩뿌린 소리의 단검이 귓전으로 싸늘하게 내리꽂힌다잔뜩 벼려진 위세를 코앞에다 부려놓는 친절한 바람 씨들이다.

 불시에 허를 찔린 듯팔다리가 욱신거린다구멍이란 구멍으로는 냉기가 들이친다어깨를 추스르고 허리를 곧추 세워보지만먹은 것마저 명치끝에 묵직하게 얹히고 만다하여문 안의 무풍지대에 소심하게 움츠린 채 빼꼼 문 밖을 정탐하는 일로 시간을 뭉갠다곰처럼 챙겨 입고도 소리의 피난처를 찾아 귀를 펄럭이는 몰골이라니.  

 바야흐로 소멸의 계절겨울이다산도들도나무도 거머쥔 것들을 발밑으로 내려놓는다세상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월동이라는 가풀막을 넘지 못한 자에게 봄은 없다한 점 토르소처럼손발을 내어주더라도 숨줄만은 거머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 겨울에 임하는 그들의 생존법이다.  

 봄을 위한 전초일 뿐이라고 아무리 긍정의 주문을 걸어도뼈만 남은 풍경이 송곳처럼 마음을 후비고 든다남편은 귀촌 후 맞는 첫 겨울의 소회를 콧날이 시큰해질 정도의 스산함이라 한다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때때로 가슴 밑바닥을 할퀴고 가는 얄궂은 심사는 눈이 아니라 귀가 초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투둑귀로 들어와 몸과 마음을 죄 쓸쓸함으로 탈색해버리는 조락의 소리들 말이다언 땅을 딛고 선 나무처럼악착 같이 봄의 약속을 되새기는 것만이 겨울과겨울의 소리에 무너지지 않는 자구책이랄까.      

  팔순을 훌쩍 넘긴 어머니에게도 문 밖은 오로지 위험한 곳일지니느지막이 아침상을 물린 어머니께서 주섬주섬 리모컨을 챙겨든다작년 겨울감기 때문에 한 달여를 고생한 전적이 있어서인지 선뜻 바깥을 엄두내지 않으신다덕분에 연일 죄 없는 TV만 등짝이 뜨끈해지도록 고군분투를 한다.

 화면이 열리자 아침드라마를 예고하는 자막이 뜬다어정뜬 나이로 치매에 걸려 버린 아버지와그런 가장을 향한 애틋한 가족애를 그려내는 드라마다어제는 그간 숨겨오던 아버지의 와병 사실이 들통나면서 끝났으니 오늘은 분명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장면으로 시작을 할 것이다.

 

 “저기 참 더러븐 병이라저거한테는 안 붙들리고 가야될 낀데….

 드라마를 볼 때마다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지만 인생의 겨울에 발목을 적시고 계신 어머니가 아닌가이미 노하고 쇠함의 비명으로 오라를 지고 사시는 처지니 무엇엔들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마당을 장악한 고추바람처럼세월도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소리를 동원한다당신의 계절에도 삭풍이 부는 건지다섯 자식의 발원지인 어머니의 몸에서는 최근 들어 겨울의 소리가 잦아졌다앉고 일어설 때마다 ‘끙’‘아이쿠’의 신음을 지팡이처럼 짚으신다육신의 마디마디에 소리의 집이 들앉은 듯소리로 눕고소리로 뒤척이신다낡고 초라해졌으나마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 느슨해지는 순간꽁꽁 단속을 해둔 소리들이 활개를 치는가 보았다흡사 소멸의 예고장 같다는 방정맞은 생각 때문일까의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어머니의 소리에 머리끝이 주뼛 일어서는 때가 많다.  

 하긴당신이 온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게다제 속을 깡그리 내어준 무광처럼거죽만 남아 흐느적거리는 것이 어머니의 신체지수인지도 모른다이건 이리해라저건 저리해라종종 이순 문턱의 나를 진두지휘하시는 모습을 보면 느슨해지다가도 기침처럼 툭툭 당신을 불거져 나오는 소리는 긴장의 끈을 바투 쥐게 만든다몇 마디 담소를 나누다가 감쪽같이 단잠에 빠지거나주무시겠거니 TV 음량을 낮추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시시콜콜 드라마를 생중계하시는 천연덕스러움에 가슴 한쪽이 무지근해진다.  

 한때는 카랑카랑 목청을 세우며 우리를 잡도리 하던 당신이다아들 하나에 딸 넷고만고만한 자식들은 단 하루도 고요히 넘어가는 적이 없었다뺏고 뺏기고울고불고육탄전까지 불사하는 천방지축 우리들을 단숨에 진압한 것은 어머니였다‘버럭’ 전법이 통하지 않으면 시커먼 부지깽이가 춤을 추고빗자루가 일순 몽둥이로 용도 변경되기도 했다자식들을 오금박던 쓴소리의 진원지는 늘 어머니였으니그저 허허실실따끔한 말의 회초리 한 번 들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해 악역을 자처하셨던 셈이다.

 악역에 흔쾌한 이가 있으랴그러나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악역이라는 것도 세상에는 존재한다저마다의 고집으로 제 목소리만 낼 줄 아는 자식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데시벨도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언제쯤 어머니의 소리에서 해방되었을까몇 번인가 당신을 향해 앙칼진 소리로 대거리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불편한 심사를 있는 대로 표출하며 고집스레 방문을 걸어 잠갔던 적도 없지 않다돌아보면고함도회초리도 먹혀들지 않는 자식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기세등등하던 소리의 지휘봉을 내려놓도록 만들었지 싶다이제 와서 사무치게 그리워질 줄은 생각지도 못한 채.

 

 재작년 봄아버지가 세상을 뜨시고 나자 어머니는 소리 없는 여인이 되었다더러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생긴다한들 따따부따할 의욕이 없으신가 보았다뜬금없는 입의 파업으로 포식자를 잃어버린 소리들이 노쇠한 육신을 공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저토록 사사건건 당신의 행보를 간섭하고 드는 걸 보면.    

 어머니의 겨울을 겨울보다 더 황량하게 만드는 소리들다섯 자식에 이어저 난만한 소리마저 헐렁해진 노구에 공명을 일으키고 있으니 어찌 분답지 않으랴이따금 전설이 되어버린 청춘의 한때를 추억으로 환기시키지만잔고가 바닥나버린 계좌처럼 남루해진 세월만 도드라질 뿐이다늙어가는 일이란 절로 고요해지는 것이 아니라홀로 감내하고 홀로 삭여야 하는 소리가 점점 많아지는 일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설거지를 하고 찻물을 올리는 사이 나지막이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소리의 출구가 열리는 모양이다아무리 세월의 옷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가려도 침묵만으로는 갈앉힐 수 없는 것들이 사방에 널렸을 터저렇게라도 응어리진 소리들을 배출하고 나면 남모르게 견뎌야 하는 당신의 몫이 조금은 줄어드는 것인지.

 존재와 소멸의 경계에 어머니의 소리가 있다시곗바늘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 한당신께 더 이상 청춘이 소생하는 봄은 없을 것이다머잖아 겨울이 물러가고 어머니께서 부재한 계절이 오면저 뚝뚝한 소리나마 얼마나 간절해질 것인가.

 달달한 커피타임을 뒤로 한 채삭정이 같은 육신이 뱉어내는 겨울소리에 귀를 맡긴다어머니의 소리를 구절구절 내 안으로 받아 적는다당신이 있어 내가 있었음을 설법하는 소리의 경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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