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그 오래된 도서관/김영식
삐걱, 숲의 문을 떠밀면 꽃과 나무들이 수백만 권 푸른 장서가 된다. 산모롱이 돌아 오솔길 하나 고즈넉이 걸어오고, 어디선가 책장 넘기는 소리도 들려온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고마리며, 쑥방망이, 꽃향유들이 길가에 가지런히 피어있다. 새로 발간된 문고판처럼 귀엽고 앙증맞다. 어디 꽃들의 책뿐이랴! 박달나무, 층층나무, 굴참나무들이 온고지신溫故知新, 초록 위에 단풍을 덧얹고 산등성이에 고요히 펼쳐져 있다.
이때쯤이면 으레 늙은 사서司書가 내 앞에 나타난다. 이 숲의 사서는 오랜 지인이지만 그의 나이는 종내 가늠할 수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숲에 살았다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있는 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산을 찾는 모든 이에게 두루 친절하기 때문이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했던가? 품성이 온화한 사서는 어느 때 찾아가도 반가운 표정으로 산 구석구석을 안내해준다. 물가에 앉아 물장구도 치다가 어떨 땐 바위 위의 이끼를 들여다보다가, 그런 그에게선 깊고 그윽한 향기가 묻어난다.
산 중턱에 이르자 먼저 온 사람들이 땀을 식히며 쉬고 있다. 어떤 이는 산국山菊을 읽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서어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는 다래덩굴을 읽기도 한다. 빛나는 문장을 들려주려고 아침이슬로 부지런히 몸을 닦는 꽃, 나무들의 수런거림, 추사 김정희는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券氣라 했다. 무릇 글씨에는 향기가 있어야 하고 글에는 기운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숲속 도서관엔 저마다 향기 나는 글들로 가득 차 있다.
계곡이 행간처럼 깊어지는 골짜기에 느릅나무 군락지가 있다. 잠시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그중 나이가 가장 지긋해 보이는 나무 곁에 나를 앉힌다. 울퉁불퉁한 회색의 껍질이 상형문자 같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래된 나무일수록 옹이가 있다. 옹이는 나무가 삶의 질곡을 넘을 적마다 그어놓은 밑줄이다. 어떤 곳은 굵게 또 어떤 곳은 깊게 새겨진 자기성찰의 흔적들, 단단하고 서늘한 기전체의 문장을 읽는다. 라코타 인디언들은 살면서 힘든 고비를 넘을 때마다 할머니들에게 길을 묻는다고 한다. 할머니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이야말로 우리를 인도하는 빛나는 지혜의 책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나무들은 모두 할머니를 닮았다.
어릴 적 내 꿈은 서점을 경영하는 것이었다. 바닷가 소읍에는 서점이 딱 한 군데 있었다. 나이 든 아들과 그의 어머니가 운영했다. 학교를 마치면 으레 그곳으로 책 나들이를 갔다. 살짝 눈치를 주는 남자의 눈길을 피하며 새롭게 진열되는 책들을 펼칠 때면 아득한 행복감이 밀려들곤 했다. 끝내 서점 주인은 되지 못했지만 지금도 그 꿈을 포기하진 않고 있다.
다람쥐가 가지 끝에 앉자 잣나무을 정독하고 있다. 산비둘기는 가까운 듯 먼 곳에서 '구구 없으면' '구구 없어도!'하고 아침 산을 읽는다. 다람쥐와 산비둘기는 이 숲 도서관의 부지런한 애용자이다. 매일 숲에서 생활하니 독서가 심오할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산을 찾으니 아무래도 그들보다 독서가 얕은 게 사실이다. 두보杜甫는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 했다. 모름지기 학문하는 자는 다섯 수레에 가득 찬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 수레의 책은 대략 오천 권 분량이라 하니 제대로 된 한 줄의 문장도 어려워하는 것이 전적으로 내 독서량에 상관되는 것 같아 왠지 부끄럽기만 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서관이 많다. 세계 최고最古 도서관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은 기원 전 288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은 스위스 상트갈렌수도원도서관이고, 가장 큰 도서관은 미국의회도서관이다. 그 외 프랑스의 생트쥬느비에브도서관,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도서관도 유명하다. 그러나 수많은 도서관 중에서도 가장 으뜸은 숲, 도서관이 아닐까 싶다.
감어인鑑於人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는 말이다. 자연이야말로 사람의 모습을 비추는 가장 훌륭한 거울이다. 자연 앞에 서면 우리는 한없이 겸손하고 낮아진다. 그러니 감어자연監於自然이라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동서고금의 문장으로 가득 찬 숲이야말로 지혜로운 현자賢者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책들은 숲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친절한 사서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책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 전 2,500년경의 파피루스에서부터 대나무, 닥나무, 지금의 펄프까지, 책의 재료인 종이는 모두 나무나 풀에서 기원했다. 그러니 이 도서관의 책들이야말로 완벽한 원서原書인 것이다. 햇살이 따가워지자 느릅나무가 몸속에서 시원한 그늘멍석을 꺼내 발아래 깔아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산을 내려간다. 오늘은 저마다 어떤 책을 읽고 세상의 마을로 돌아가는 것일까? 노랑턱멧새 한 마리가 '츄이!' '츄이!' 소리를 내며 물푸레나무 우듬지를 떠나 구름까지 솟아오른다. 저마다 가슴 속에 푸른 책 한 권씩 품고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가을 햇살처럼 따뜻하다. 바람결에 피톤치드 은은한 향기가 건너온다. 오늘의 독서를 끝내고 돌아가는 하산 길, 뒤돌아보면 늙은 사서가 오래도록 손 흔들며 배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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