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골목의 필경사들
안 희 옥
이 골목엔 오래된 필경사들이 산다. 날마다 골목을 베끼는 것들, 호프집은 호프집을 베끼고, 북경반점은 북경반점을 베끼고, 세탁소는 세탁소를 베낀다. 낡아가면서 따뜻해지는 것들 중에 골목만한 것이 또 있을까. 날마다 반복되는 문장사이를 걸어 오늘도 집으로 돌아온다.
흑백사진 같은 풍경의 양쪽으로 회색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다. 골목입구에는 하루를 마감하려는 듯 포장마차가 불을 밝히고, 찐빵가게와 세탁소, 아동복가게, 미장원 등이 어깨를 맞대며 늙어간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대문 앞에는 우편물이 나뒹굴고 담벼락 아래엔 누군가 버리고 간 슬리퍼 한 짝도 놓여 있다. 월세와 전세 쪽지가 너풀대는 전봇대 뒤로 길고양이가 재빨리 모습을 감춘다. 골목 끝 언덕을 오르면 내가 사는 연립아파트다.
도회지에서의 첫 살림집을 마련하느라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산뜻한 보금자리를 꿈꿨지만 적은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은 한정되어 있었다. 변두리 큰길가 모퉁이를 돌아가니 오르막길이 시작되었고 그곳엔 고성固城처럼 허름한 아파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지은 지 수십 년이 되어 곧 재개발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소문으로 뒤숭숭한 그곳에 새 거처를 마련했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그나마 근무지로 이어지는 편리한 교통이 마음을 다독거려 주었다. 돈을 모아 얼른 여기를 벗어나야지 그렇게 다짐하면서.
골목입구엔 찐빵가게가 있다. 젊은 부부가 어린 애를 데리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퇴근길에 그 앞을 지나노라면 가뜩이나 시장기 도는 배에서 체면 없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일하는 아내 등 뒤로 다가가 밀가루 묻은 손으로 아이를 받아주는 남자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길가에 내놓은 찌그러진 찜 솥 위로 모락모락 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내 삶도 저처럼 어느 한 순간 둥글고 따뜻하게 부풀어 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소망식료품가게가 있다. 영천 댁이 주인이다. 서분서분한 성격에 가게 안은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콩나물 천원어치를 사도 우수로 한 움큼 더 얹어줄 만큼 인심이 좋다. 살림살이에 서툰 나에게 친정어머니처럼 살갑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외지에서 그나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서그러운 마음씨 덕분이었다. 휴일이면 자주 식료품가게에 앉아 함께 해바라기를 했다.
맞은편엔 중년부부가 운영하는 세탁소다. 금슬이 좋기로 근방에 소문이 자자했다. 내가 이사 오고 일 년쯤 지난 늦가을, 문이 굳게 닫혔다. 중병을 앓던 아내를 먼저 보내고 그 충격에 술로 세월을 보낸다고 누군가 넌지시 말했다. 그 뒤 이웃 사람들 보살핌으로 두어 달 만에 가게를 열었다. 세탁소 앞을 지날 때면 다리미가 예전처럼 하얀 입김을 뿜으며 구겨진 옷을 다렸다.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곳엔 구두수선점이 있다. 육이오 동란에 참전했다가 파편에 맞아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할아버지가 수선을 했다. 낡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군가를 흥얼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엔 언제나 활기가 넘쳐났다. 시내 구둣방에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내 분홍샌들을 감쪽같이 새 것으로 변신시킬 만큼 솜씨가 뛰어났다. 소문 때문인지 댓 평 구두 방엔 헌 신발들이 언제나 빽빽하게 줄지어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골목에는 악다구니와 지린오줌냄새와 깨진 연탄재가 서로 뒤엉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마치 그것들 중 하나라도 없으면 골목이 되지 않는다는 듯.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싸움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삶을 완성하는 것은 어쩌면 크고 육중한 것이 아니라 작고 이름 없는 것들인지도 모르겠다. 슬프고 눈물 나고 웃고 토닥거려주는 그런 사소함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 가는지도.
녹슨 베란다에 기대어 골목을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때로 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어두워지는 동네를 바라보노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늑함 같은 것이 밀려들었다. 밤이 깊어 가면 창문마다 하나, 둘 불빛들이 잠들고 골목은 조금씩 소실점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구두수선 가게와 세탁소와 북경반점에는 일찍 불이 꺼졌다. 호프집과 통닭집과 포장마차에선 늦은 시각까지 불빛이 새어나왔다. 가로등 아래로 벚꽃 잎이 난분분 떨어지는 봄날이 가장 좋았다. 솜털 같은 저 꽃잎이 부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단한 잠을 포근하게 덮어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 출장 간 사이, 밤늦어 둘째아이가 갑자기 경풍으로 의식을 잃었다. 다급해진 나는 영천 댁에게 도움을 청했고 뒤이어 통닭집아저씨가 헐레벌떡 도와주러 왔다. 아이를 들쳐 업고, 구급차를 부르며 정신없는 나를 대신해 그들이 모든 일을 처리해주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진다. 다행히 일찍 병원에 가게 되어 큰일은 면할 수 있었다.
골목은 이제 점점 벼랑 끝으로 밀려나고 있다. 이웃 간 정감이 넘치는 공간들이 사라지고 초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선다. 밀려나지 않으려 발버둥을 쳐보지만 중과부적이다. 편의점과 학원과 대형마트가 우후죽순 그 자리를 차지한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뤄진 변화에 못 이겨 몇몇 사람들은 다른 곳을 찾아 떠났고 더러는 귀향을 하기도 했다. 금방 떠날 것 같았던 나는 떠나지 못했다.
골목은 날마다 골목을 반복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제와 닮은 듯 어제완 달랐고 어제가 아닌 듯 어제를 닮았다. 오늘도 포장마차와 찐빵가게와 북경반점과 소망식료품과 세탁소를 지나온다. 가벼운 목례너머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서툴렀던 삶 몇 개는 쉽게 들키기도 하면서.
이젠 허리가 구부정해진 저 필경사들에게 돋보기안경이라도 씌워줄까. 그러면 삐뚤빼뚤한 문장들도 잠시나마 가지런해질 텐데. 가로등 깜빡거리는 언덕을 오르며 오늘도 나는 나를 베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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