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부채꽃잎처럼 / 박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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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부채꽃잎처럼/박금아
이른 봄날 저녁 처음 그 꽃을 보았을 때, 꽃은 벌써 지고 있었다. '흰부채꽃'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여름에 피어야 할 꽃이었다. 하얀 꽃잎 속에는 붉은색의 가느다란 줄이 혈관처럼 퍼져 있었다.
하월곡동 성가병원에서 문병을 끝내고 미아삼거리역으로 가던 중이었다. 인적 없는 길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걸음을 재촉하여 뛰다시피 하는데 자꾸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달리기를 멈추고 어둠 속을 뒤졌다. 저만치 담벼락에 희미한 물체가 보였다. 더듬어 가보니 작은 유모차 한 대가 서 있고, 곁에서 할머니 한 분이 곱송그린 채 새우등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들고 가다가 무거워 길에 잠시 내려놓은 보퉁이 같았다.
"이거 하나 사주이소. 양복감도 있고 걸레감도 있어예"
유모차에는 빨랫비누와 어린이용 실내화 한 켤레, 천 조각 등속이 담겨 있었다. 젊었던 날 양복점을 운영하다 남은 옷감이라고 했다. 아무리 찾아도 쓸 만한 거라곤 없었다. 비누를 골라 들고서 만 원을 건넸다. 거스름돈은 받지 않겠다고 해도 할머니는 계속 잔돈을 찾았다.
"이 돈 다 주면 우짤라꼬요. 그러믄 이거라도 갖고 가시소오"
걸레감이라도 하라며 천 뭉치를 건넸다. 괜찮다, 가져가라 하는 짧은 밀당 끝에 갑자기 할머니의 행동이 다급해졌다. 바지를 내리며 내 뒤에 쪼그리고 앉는 것이 아닌가. 내가 당황해하는 사이, 벌써 가로수 밑동에 대고 일을 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할머니는 나무 둥치에 기대어 간신히 속옷을 끌어 올리며 다리가 아파서 화장실까지 갈 수 없다며 무안해했다.
지나는 차량의 전조등 불빛이 언뜻언뜻 할머니의 시간을 비추는 듯했다. 고생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운 얼굴이었다. 맑은 눈매와 살짝 다문 입술에는 소녀 같은 수줍음이 담겨 있었다. 푸른 두건을 빠져나온 귀밑머리가 밤바람에 아기 새의 깃털처럼 은빛으로 살랑거렸다. 귓불을 타고 흐르는 하얀 뺨에는 실핏줄이 흰부채꽃잎처럼 퍼져 있었다.
병원비에 보탤 요량으로 들고나왔다는 물건들은 할머니의 전 재산인 것 같았다. 귀에 익은 사투리여서 고향을 물었더니 진주란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동향이라며 덥석 손을 잡았다. 할머니는 흠칫 놀라는 기색을 하더니 떠나온 지 오래라 고향엔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가족을 물었더니 몇 번을 딸막였다. 남편은 아들이 뱃속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고, 유복자 아들은 수십 년 전에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 뒤 소식이 끊겼다고 했다. 힘든 공부라서 오래 걸릴 거라며, 공부를 마치면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만 친척 집에서 참고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영등포에 있는 한 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더니 손을 젓는다. 버스를 탈 수도,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정말로 공짜 치료를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상담을 받아 보라는 말에 잠잘 방도 있는지 궁금해했다.
이름을 물어도 머뭇거릴 뿐, 전화번호도 사는 곳도 알려주지 않았다. 방도가 없었다. 꼭 연락하라면서 내 전화번호를 적어 건넸다. 할머니는 한참을 들여다보다 무언가를 물을 듯하더니 쪽지를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환한 데로 가서 물건을 팔아야겠다며 유모차를 끌기 시작했다. 갈 길이 멀었다. 할 수 없이 할머니를 앞질러 뛰었다.
로터리의 시계가 열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승강장으로 내려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는 걸어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자리에 멈춘 듯도 했다. 달팽이가 가도 할머니보다는 빠를 것 같았다. 떼었다 놓았다 하며 유모차를 미는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어둠은 그렇게 천천히, 전신의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터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사라져 버렸다. 발꿈치를 들어보아도 사람들 속에 묻혀버린 듯 찾을 수가 없었다.
지하철을 탔다. 전동차 안은 조금 전과는 딴 세상이었다. 환한 불빛 속에서 사람들 대부분은 손안에 든 작은 기기로 그들만의 세상과 교신하고 있었다. 사람을 향한 눈길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한 번, 급정차에 쏠려 손잡이를 놓친 내 팔이 앞에 앉은 사람을 사정없이 껴안았을 때도 그의 눈은 스마트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서울대입구역'이란 안내 방송이 나왔다. 몸을 바로잡을 새도 없이 출입문을 향해 돌진했다. 승강장에서 짐짝처럼 부려진 몸을 간신히 추슬렀을 때, 스크린 도어에 적힌 시구가 눈에 들어왔다.
'인생길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용혜원,〈동행〉
혼자 남아 승강장을 지키는 시(詩)가 아직도 차가운 밤거리에 서 있을 할머니의 어깨만큼이나 시리게 느껴졌다. 그때 환청인 듯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걸레감 사이소오, 양복감 사이소오...'
깊은 터널을 맴돌아 나온 목소리가 시(詩)가 되어 봄밤 속으로 한 잎 한 잎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흰부채꽃잎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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