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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백향옥

에세이향기 2025. 3. 16. 09:07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백향옥

 
 

부풀어 오르는 흙이 좋아 맨발로 숲을 걸었다

바닷물에 발을 씻다가 만난 돌은

손바닥에 꼭 맞는 매끄러운 초승달 모양

 

열병을 앓을 때 이마를 짚어주던 당신의 찬 손

분주하게 손을 닦던 앞치마에 묻어 온 불 냄새, 바람 냄새, 놀란 목소리

곁에 앉아 날뛰는 맥을 지그시 눌러 식혀주던 손길 같은

 

차가운 돌을 쥐고 있으면 들뜬 열이 내려가고

멋대로 넘어가는 페이지를 눌러두기에 좋았는데

어느 날 도서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렸다

 

몸 깊은 곳에서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놓친 손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두 동강 난 돌을 잇대보았지만

깨진 돌은 하나가 될 수 없고

가슴에서 시작된 실금이 무섭게 자라났다

 

식었다 뜨거워지는 온도 차이가

돌 안쪽에 금을 내고 있었던 걸 몰랐다

 

이제 그만 됐다고 따뜻해진 돌이 속삭였다

 

그날, 달빛 밝은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깨진 돌을 가만히 놓아주었다

달에게 돌려주었다

 


부풀어 오르는 흙이 좋아 맨발로 숲을 걸었다

바닷물에 발을 씻다가 만난 돌은

손바닥에 꼭 맞는 매끄러운 초승달 모양

장소의 배경은 숲이고 바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숲과 바다와 같습니다. 시인은 거기에서 초승달 모양의 돌 하나를 만났습니다. 이제부터 돌의 이야기가 시작되겠죠.

 

열병을 앓을 때 이마를 짚어주던 당신의 찬 손

분주하게 손을 닦던 앞치마에 묻어 온 불 냄새, 바람 냄새, 놀란 목소리

곁에 앉아 날뛰는 맥을 지그시 눌러 식혀주던 손길 같은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열병을 앓았을 때 이마를 짚어주고, 아궁이에서 불 때던 엄마가, 요리하느라 바쁜 엄마가 놀라며 달려오는 모습, 게다가 머리를 짚어가며 열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던 어머니가 말이죠. 어머니의 손이 닿으면 그저 편안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열이 많이 나던 날에는 곁에 앉아 노심초사하시던 어머니였죠. 그런 어머니였죠.

차가운 돌을 쥐고 있으면 들뜬 열이 내려가고

멋대로 넘어가는 페이지를 눌러두기에 좋았는데

어느 날 도서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렸다

그렇다면 돌은 어머니의 손으로 상징됩니다. 들뜬 열이 내려가고 도서관 책을 눌러두기 좋았는데 그게 그만 깨져버렸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까요?

 

몸 깊은 곳에서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놓친 손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두 동강 난 돌을 잇대보았지만

깨진 돌은 하나가 될 수 없고

가슴에서 시작된 실금이 무섭게 자라났다

어머니를 잃은 마음에 금이 가고 어머니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마음이 허전합니다.

 

식었다 뜨거워지는 온도 차이가

돌 안쪽에 금을 내고 있었던 걸 몰랐다

어머니의 사랑이 너무 깊이 자리를 잡았어요. 그런 사랑이 사라져 내 마음이 무너져요.

 

이제 그만 됐다고 따뜻해진 돌이 속삭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가만 있을리가요. 어머니는 가만 속삭입니다. ‘이제 그만 됐다고’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날, 달빛 밝은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깨진 돌을 가만히 놓아주었다

달에게 돌려주었다

어머니를 가만 놓아줍니다. 이제 달에게 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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