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층 이발소 / 김정화
삼색등이 빙글 돌아간다. 널브러진 판자 더미 옆에서 육지의 등대인 양 꿋꿋하다. 달동네 고갯길 모퉁이에 선 이층 이발소, 주변은 올해부터 재개발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주 명령이 떨어지자 철거촌의 으스스한 분위기에 짓눌린 주민들은 예상보다 서둘러 짐을 꾸렸다. 몇 개의 점포들만 남아서 버티더니 지난달에는 단골 김밥집과 쌍둥이네 떡집도 시장으로 터전을 옮겨갔다.
저 이발소, 유행에 뒤처지고, 미용실과의 한판 승부에 밀리고, 이제 개발의 대열에서마저 낙오될 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나는 저곳을 드나든 적이 있다. 십오륙 년 전 이발사 부부의 연년생 아이들에게 글쓰기 지도를 했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가정집을 개조한 일층 이발소 문을 열고 이층으로 향하는 좁고 가파른 계단길을 올랐다.
이발사 부부는 조용했다. 당시도 손님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난로 앞에서 졸거나 연속극을 보다가 내가 들어서면 화들짝 놀라 일어서는 모습에 항상 미안했다. 주로 남편은 머리를 깎고 부인은 면도를 해주었다. 나는 묵례를 하면서도 이발소 안 풍경에 자꾸만 눈길이 쏠렸다. 타일로 붙여 만든 개수대와 가지런히 놓여 있는 면도 기기들과 벽에 걸린 영업허가증, 그리고 성화가 그려진 모조 그림 액자들이 눈에 익었다. 비누 거품이 내뿜는 향기와 포마드 기름 냄새가 이층방까지 올라왔지만 역겹지가 않았다. 손기술 하나로 평생 가족을 먹여 살린 부부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는 언제나 경건했다.
내가 어릴 적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아이들은 이발소에서 머리를 잘랐다. 주로 남자아이들은 빡빡 밀고, 여자아이들은 뒤에 층이 있는 상고단발을 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읍내 장터 이발소에 다녔다. 나무의자에 걸친 빨래판에 앉아 고개를 숙이면 뻑뻑한 수동 바리캉이 뒤통수를 집기도 했지만, 으레 이발 후에 맛보았던 순대국밥을 생각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아이에서 소녀로 성장하면서 조선무처럼 목덜미를 훤히 드러내던 머리 모양을 더 이상 하지 않았고 이발소는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그곳은 어느새 여자들에게 금기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호시절이 지나가고 이발소도 설 자리를 잃었다. 후미진 골목으로 숨어들거나 목욕탕 귀퉁이로 자리를 옮겼고 남아 있는 이발소도 폐업 위기다. 단골손님은 점점 세상을 떠나가고 젊은 층은 최신 헤어스타일을 연출해 주는 미장원에 간다. 이발소라는 간판은 헤어숍이나 헤어살롱이라는 이국 명에 빛이 바래고, 이발사理髮師로 격상된 호층마저도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내건 헤어디자이너에게 패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런데 최근 어느 유명 미용사에게도 지지 않을 자존심을 가진 이발사를 보게 되었다. 그는 울진 후포리에서 진이발소를 운영하는데 요즈음 유행하는 TV 예능 프로그램의 몇몇 출연자 머리를 다듬고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아무리 유명 연예인이 찾아와서 조목조목 압구정동 헤어스타일을 나열하더라도 "맽기세요!"라는 한마디로 상황을 종료시킨다. 안광이 예사롭지 않은 60년 관록의 이발사가 흰 이발보를 어깨에 올리는 순간 이어지는 절차에는 모조리 순종하게 된다.
진이발소에는 투박한 이발 의자와 자루식 면도칼과 머리에 물을 붓는 물뿌리개까지 옛것을 고집한다. 심지어 플라스틱 솔로 머리를 박박 문질러 감기고 독립투사를 연상시키는 2대 8 가르마로 마무리 짓는다. 생뚱맞은 변신에 손님이 고개를 갸웃하거나 지켜보던 구경꾼이 폭소를 자아내도 그는 자신의 방식에 흔들리지 않는다. 작은 어촌마을의 옛 이발사가 송강호가 나오는 '효자동 이발사'나 연재만화 '삼봉이발소'보다 인기 있는 이유는 그만의 배짱과 철학이 탄탄한 까닭이라 여겨본다.
최근에는 대접받고 싶어 하는 남심男心공략으로 현대식 이발소인 바버숍Barber Shop이 등장했다. 모던하고 클래식한 인테리어에 헤어 자판기가 등장하여 원하는 스타일을 살려내고, 다양한 컬러링과 파마가 가능한 남성 전용 고급 헤어숍이다. 과거 영국의 이발사가 외과의를 겸업했듯이 날 선 면도기를 든 현대 바버들의 모습에서 그때와 같은 결기가 담긴 듯 숭고해 보인다.
남성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자가 이발사일 것이다. 삶에 지친 가장을 등받이 의자에 뉘어주고, 손톱을 자르고, 귀지를 파주며, 꽃청년들의 얼굴 마사지는 물론 구레나룻까지 다듬어주는 정중한 우대로 남자의 자존심을 지켜내려 한다. 그러므로 동네 이발소의 장인匠人들은 도심에 젊은 바버들이 몰려와도 주눅 들지 않는다. 진정한 이발사는 손에 이발 가위를 들 수 있는 날까지 연통에 거품 솔을 데우고 말가죽 끈에 면도날을 세우는 일을 멈추지 않을 테니까.
하늘을 올려다본다. 철거촌 이발소의 낡은 삼색등이 모래바람에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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