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경이 웃다 / 송혜영
질경이 웃다/송혜영
반나절의 햇볕에 완강하게 버티던 겨울이 줄줄 녹아내린다. 슬금슬금 눈을 밀어낸 땅에 납작 엎드려있는 어린 질경이와 눈을 맞춘다. 질경이가 돌아왔으니 이제 봄이다.
하늘에서 얼음물 세례가 호되게 내렸던 날. 몇 차례의 무서리에도 꿋꿋하던 보랏빛 국화가 제 색을 잃었다. 시들시들하던 끝물 고추도 맥을 놓아 버렸다. 기가 죽은 풀마저 스러져 평평해진 겨울 마당. 그 스산한 땅위에서 낮은 자세로 늦게까지 땅을 지켰던 놈이 질경이다.
밤에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도 질경이는 쉬 잎을 포기하지 않는다. 밤새 뻐덕뻐덕 얼었던 잎이 옹색한 햇볕이라도 쬐면 시나브로 풀려 다시 생생해진다. 끈질기게 마당 구석을 지키던 질경이가 흙빛으로 돌아가야 제대로 된 겨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낯빛이 검다고 질경이가 온전히 겨울잠에 든 건 아니다. 아직 동장군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 하늘이 내린 마지막 은전처럼 햇볕이 포근한 날이 있기 마련이다. 모처럼 해바라기하기 좋은 그런 날이면 죽은 듯 엎드려있던 질경이의 잎사귀에 잠시 푸른 기운이 어린다.
벌써 봄이 왔나? 바깥 동정을 살피는 듯 살짝 고개를 내민다. 그러다 난폭한 계절의 채찍을 맞고 화들짝 놀라 초록을 냉큼 거두어들인다. 눈이 쌓이면 질경이는 뿌리에 힘을 집중시키고 최소한의 에너지로 겨울을 견딘다. 기어이 눈이 녹고 땅이 풀리면 질경이는 마당의 그 어느 풀보다 빨리 봄을 맞을 채비를 한다.
질경이는 차전자車前子, 또는 차과로초車過路草라고도 부른다. 이름에 수레가 들어가 있는 이유는 생태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의 왕래가 잦은 길에는 풀이 잘 자라지 못한다. 그래도 발길로 다져진 맨땅 사이사이에 왜소한 쑥과 질경이가 땅을 그러잡고 있다. 바퀴 달린 물건이 자주 다니면 쑥이 먼저 보따리를 싼다. 결국 수레의 바퀴도 아랑곳하지 않는 질경이만 남는다. 식물에게 가장 혹독한 생존 환경에서도 잘 견디는 건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다. 망치로 내려쳐도 깨지지 않는 광물질 알갱이 같은 씨로 미루어보아도 그렇고.
오래 방치된 뜰에 나무처럼 자란 망초와 쑥을 말끔히 걷어내니 바닥에 오로지 질경이만 살고 있었다. 망초와 쑥이 만든 촘촘한 그늘 밑에서 키 작은 풀은 견딜 수 없건만…. 질경이가 참으로 독하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의 손길이 간 훤한 마당, 모든 식물에게 유리한 환경이 되었을 때의 질경이는 강인하지도 독하지도 않았다.
질경이가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는 강한 풀이라면 몇 삽 떠다놓은 잔디쯤은 단박에 몰아내야했다. 질경이는 잔디에게 자리를 내주고 결국 차가 들어오는 길까지 밀려났다. 그러고 보니 볕 좋고 땅이 부드러운 곳보다 척박한 땅에 질경이가 있었다. 푸석푸석 물기 없거나, 남들이 거들떠도 안보는 버려진 땅이 질경이 차지였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양지 바른, 비옥한 토양에 자리 잡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다. 자리다툼이 치열한 좋은 땅에서는 경쟁력이 뛰어나야 살 수 있다. 백합처럼 성스럽거나 수선화나 헬리오트로프같이 사랑스럽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면 햇볕을 당당히 차지할 수 있다. 인간의 혀를 만족시키거나 배를 불려줄 수 있어도 좋은 땅을 차지할 수 있다.
볕 좋고, 거름 좋은 양질의 땅이 존재 기반이라면 더 할 수 없이 좋겠지. 하지만 몸 가진 것들의 삶이란 게 모두 생존의 충분한 조건을 다 갖출 수는 없지 않은가. 햇빛 가득한 정원에서 잘 살다 어느 날 거짓말처럼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거친 땅으로 밀려날 수도 있다. 잎이 누렇게 변하는 건 음지로 내몰려서다. 온몸이 시들시들 마르는 건 사막으로 내쳐져서다. 길바닥에 나앉은 쪽은 수레에 짓눌려 신음을 토할 밖에. 일조량이 모자라거나 물을 끌어올릴 수 없거나 수레바퀴의 회전에 휩쓸려 망가지는 쪽도 있지만 절망적 상황이라고 모두 비탄에 잠겨 절멸만을 희망 삼지는 않는다. 그래도 생을 지속시켜야하는 생명체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고자 하는 부류는 살 길을 적응에서 찾는다.
질경이는 독해서, 강해서 수레가 다니는 환경에서 버티는 게 아니다. 그저 주어진 수레의 무게를 받아들인 거다. 그런데 이왕 수용할 작정이면 마지못한, 시시한 순응이 아니라 유쾌한 적응이다! 한 걸은 더 나아가 질경이는 자기가 해결하기 힘든 결핍을 아예 신념으로 승화시켜 버렸다. 신념이 된 결핍은 자신을 긍정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질경이는 열악한 환경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도 터득했다. 불편과 고립을 감수하면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스스로 족하면 그런대로 싱싱하게 살만하다는 걸.
수레바퀴 아래에서 질경이가 웃는다.
나를 밟고 수레, 아니 전차여 지나가라. 나는 어떤 바퀴 아래서도 웃을 수 있도다. 모래밭도, 산비탈도 좋다. 진창이면 또 어떤가. 나는 어떤 땅과도 기쁘게 상관하여 내 영혼의 살을 찌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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