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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流謫과 회상-이성복론

에세이향기 2025. 8. 20. 15:01

 

流謫과 회상
- 이성복론







1. 들어가는 말


동시대의 숨가쁜 삶에 비해 시가 너무나 작다는 느낌은 종종 시인을 절망시킨다. 이 절망은 서정시 장르의 본질적인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서정시란 우리를 위로할 수는 있으되 당대의 고통을 총체적으로 드러내어 우리를 도울 수는 없는 물건이 아닐까. 우리의 순간적. 주관적 체험을 반영하는 서정시가 과연 이 고통스런 삶을 얼마나 총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80년 5월로 표상되는 <역사>의 의미가 우리의 은밀한 부채로 남아 있는 오늘, 시의 장르적 한계에 대한 회의와 가능한 한 우리 시대의 가장 아픈 부분을 말하고 싶은 욕망이 이런 질문들 속에 교차한다.


이런 질문들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면 우리는「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남해 금산」(1986)으로 상재된 이성복의 시세계에서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예감하게 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시세계는 우리의 거짓된 삶이 안겨 주는 슬픔과 그리움, 헤매임의 서정적 시편들이 모여 한 권의 시집 전체가 우리 시대의 집단적 삶을 이야기하는 서사적 구조를 띠고 있다. 때문에 그의 시집을 읽어가는 독자들은 서정시 특유의 <감동의 엄습>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동시에 한 시대의 이야기들이 껴안고 있는 <전체의 조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이성복 시의 이같은 특징은 그의 시집 전체가 <하나의 통일적인 유기체>를 이루고 있으며, 치밀한 계획하에 <잘 계산되고 제어된 풍경>을 보여준다는 김현의 지적과 그 치밀한 서사적 구조는 바로 <치욕의 과정을 통과하여 사랑에 도달해 가는 과정>의 이야기 라는 홍정선의 설명들에서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기존의 이러한 논의들은 이성복의 시 하나하나를 이른바 시집 전체의 통일성 속에 유기적으로 결합하게 하는 요인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간과하고 있다. 오히려 이 두 분을 비롯하여 이성복의 시를 다룬 많은 논자들은 그의 시가 보여준 새로운 가능성의 불빛에 압도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서정시 하나하나의 텍스트들이 모여 이루는 서사적 구조, 이성복 시의 어떤 의미요소가 이런 현상을 가능케 하는가. 이러한 논의는 이성복의 서정시 하나하나를 통일된 서사적 구조로 이끌어 가는 주제적 요소(thematic conpdnent)를 밝히고 그 당대적 의미를 반성해 보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당겨 말하자면 서정시 하나하나가 모여 서사적 구조를 이루는 이성복의 시세계는 간텍스트적 의미요소로서의 流謫과 텍스트내적 의미요소로서의 回想에 의해 성립한다. 한 시집 전체의 간텍스트적 차원에서 시인의 치욕스런 체험을 시간적 거리 속에서 노래할 수 있게 하는 회상의 형식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


우리는 그의 시세계를 형성하는 이 두 의미요소들의 역학관계가 제 1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와 제 2시집「남해 금산」(1986) 사이의 변모를 결정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이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게 될 것이다. 유적의 이야기 속에 발견되는 시인의 자기반성은 건강한 것인가. 그의 고통스런 체험들이 시간적 거리에 의지하여 드러난다고 할 때 그의 시는 현실의 문제의식을 과거의, 이미 완결된 상황처럼 해결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그의 아름다운 시는 정녕 아름다워도 되는 것일까. 이같은 의문들이 이 글의 궁극적인 문제의식이 될 것이다. 우선 제 1시집에 나타난 이 두 요소들의 관계를 검토하면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이성복 시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가 이미 충분히 행해진 이상 작품 하나하나의 친절한 설명보다는 그의 시세계를 관류하는 핵심적인 요소들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둔다.

 

2. 악마적 세계로의 유적과 시인의 자의식


43편의 시들로 이루어진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좀처럼 구성하기 힘든 요소들의 종합이다. 이 시집이 던져주는 최초의 인상은 <현란함> 그 자체이다. 여기에는 고통에 대한 편집광적인 집착과 냉소적인 무기력, 초현실주의 시를 보는 듯한 기괴한 오브제들과 빠르게 이어지는 자유연상의 이미지 등이 한데 어울려 자서전적인 작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들이 바로 <자서전>적임을 감지하면서 독자들은 시집 전체의 짜임새를 이해하고 이 전체구조 속에 각각의 시를 다시 읽게 된다.


이 자서전 같은 시집은 거시적으로 <1959년 유년시절을 벗어나 세상에 눈뜬 한 아이가 병과 아픔의 악마적인 세계를 유적하며 괴로워하다가, 다시 인생을 긍정하며 세상에 대한 때묻은 사랑을 시작한다>는 이야기구조를 이루고 있다. 일견 성장소설을 보는 듯한 이 시집은「1959년」「정든 유곽에서」로 시작하여「다시, 정든 유곽에서」「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늦은 사랑에 관하여」로 끝나는 바, 시의 목차들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가운데 놓인 <병과 아픔의 악마적인 세계를 유적하며 괴로워하는>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 악마적인 세계로의 유적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시집의 첫머리로 들어가 보자.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無氣力과 不感症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修飾했을 뿐 아무 것도 追憶되지 않았다
(중략)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倫理와 사이비 學說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監獄으로 자진해 갔다


-「1959년」


1959년은 4.19혁명의 전 해다. 그러나 이 시는 사회적 동요, 불안과 기대 등 혁명을 향해가는 일말의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를 지배하고 있는 정조는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불러내지 못>하는 <무기력과 불감증>이다. 이것은 물론 먼 훗날 다시 과거를 추체험한 회상에 의해 이 시가 씌어졌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바, 이 회상의 형식이야말로 시인의 체험을 하나의 텍스트로 성립시키는 구성원리가 된다.


현재 속에 체험되는 고통이 너무나 아프고 복합적인 것이어서 매우 불투명한 의미를 갖는다면 이성복은 그 애매몽롱함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간적 거리에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그 고통을 하나의 텍스트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성복의 시가 대부분 과거시제로 나타난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이 고통과 환멸로 점철되는 현재의 체험을 과거로 돌려놓음으로써 이를 하나의 주제, 하나의 정조, 하나의 비전 속에 통일시키는 그의 핵심적인 방법론이란 사실 등은 뒤에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난 <무기력과 불감증> 역시 1959년의 사실에 대한 단순한 기억(erinnerrung)이 아니라 현재의 체험을 과거로 돌려놓음으로써 과거를 창조적으로 재구성한 회상(eingedenken)이다. 이 회상의 눈을 따라 시인의 자서전적인 성장사를 재구성했을 때 1959년은 봄이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던 암울한 시절로 각인된다. 봄이라는 자유와 생명의 시간이 <오지 않아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간다.


1959년 다음에 오는 시편들은 이 오지 않는 봄과 대립되는 보이지 않는 감옥의 처절하고도 악마적인 모습이 생생하게 이어진다. 실상 우리 시대의 고통스런 삶을 이런 생생한 치욕과 수모와 악몽들로 형상화시켜내는 이 체험의 치열성과 복합성이야말로 이성복 시의 가장 빛나는 부분인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숱한 평자들이 펜을 대고 있다.


이 보이지 않는 감옥에는 제국주의 외세에 의한 고통이 <고통이라 불리는 도시>에서 본 <임신부와 총을 멘 흑인 병사> <튀기아이>로 형상화 되며(「소풍」), 여기에 기생하는 매판재벌과 군부의 억압적인 양상이 <53면, 닭의 내장 속으로 54번, 텍스/ 속으로 55번, 槍끝으로 당장 떠나라/이 땅은 어제 재벌급 인사가 買占했다>는 <草食民族 사내들의 이동>에서 절창을 이룬다(「移動」). 이렇게 식민지화된 땅을 살아가는 우리 어머니와 누이들의 근원적인 체험은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몇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동생을 돌보았다>는 보편적인 창녀화의 체험이다(「그 날」).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아버지의 실직과 어머니의 탄식 (「꽃피는 아버지」),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휘둘러......>과 같은 끔찍스러운 부자간의 싸움으로 이어지는 가족들 사이의 불화(「어떤 싸움의 記錄」), 프랑스 유학을 떠나는 여자 대문에 상처받는 자존심(「여름산」), 사랑했던 여자와의 이별(「연애에 대하여」) 등 다양한 개인적 상처들이 투영되어 있다.


이렇듯 이성복이 보여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는 엄청나게 복합적인 고통의 체험들이 밀도있게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여러 작품들을 서로 겹쳐 <포개어> 보면 우리는 이들 작품들 사이에 관류하는 흥미로운 주제적 모티브를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이런 <보이지 않는 감옥> 속의 체험들이 하나의 귀양살이, 유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이렇게 썩고 병든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시인 자신이 여전히 고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이 악마적인 세상의 체험들에 함몰되지 않고 그것을 시간적 거리 속에 회상할 수 있는 비밀이기도 하다.


이성복에 의하면 그의 주위에 소용돌이치는 사건들은 모두 완벽하게 거짓된 상황, 즉 유적지의 삶들이다. 여기에는 구원을 기대하게 하는 일말의 불빛도 없다. 이 <埃及> 같은 환란의 땅을 떠나봐야 <집이 없는 사람은 天國에 셋방을 얻어야 하고/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아직 欲情에 떠는 늙은 子宮으로 돌아가야>한다. (「出埃及」). 기독교적 구원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에 존재하는 어떠한 위안의 말도 진실이 아닌 것이다. 이런 귀양살이가 아닌 진정한 삶은 그저 막연히 <별>(「정든 유곽에서」) <먼 나라>(「口話」)로 상정될 뿐이다.


이같은 인식 위에 <고독한 시인>으로서의 자의식, 이 타락한 악마적인 세계로의 매몰됨에 대한 내밀한 공포와 선민의식이 드러난다.


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의 잠, 한반도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伐木
당한 여자의 반복되는 臨終, 病을 돌보던
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정든 유곽에서」


미치기 위해 나는 굶었지
순박한 사람들이 나는 나를 돌로 후려치고
그래 나는 돌과 함께 떨어졌고 그래 나는
汽車에 뛰어올랐지 그래, 나는 고향을 떠났어


-「口話」


「정든 유곽에서」에는 한반도 전체의 공간이 겉만 화사하고 안은 병든 유곽으로 표상된다. 중국(牧丹)의 세력이 시드는 근대사 이후 창녀화된 한반도가 벌목당해 거듭 죽어도 시인의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할 수 있었다. 화자인 <나>가 시인 자신에 다름 아님은 인용문 전후의 문맥에서 드러나는데, 시인의 이처럼 철저한 자기세계는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口話」는 그것을 발생시키는 시인으로서의 근원적인 자의식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시다. 여기서는 시인과 무지몽매한 세계 사이의 대립이 <날으는 나/순박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변주된다. 보들레르의 시집「악의 꽃」첫머리처럼 <땅으로 폐적당한 시인>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날으는 나>는 <미치기 위해> 밥을 굶는 사람이다. 여기에는 타락한 일상으로의 매몰됨에 대한 시인의 내밀한 공포가 투영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시인이 알바트로스처럼 <순박한 사람들>의 돌에 맞아 땅으로 떨어지면서 시인과 세계 사이의 대립이 표출된다.


이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땅에 떨어진 시인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의 관심사인 터이다. 떨어진 시인은 다시 <기차>에 뛰어 오른다. 그는 자기를 몰라주는 무지몽매한 세계와 어떤 관계도 거부하는 것이다. 그는 대결도 순응도 원치 않고 고향을 떠나는 바, 그 기차가 데려다 주는 다른 세계가 고결한 시인의 자의식에 보다 합당한 곳임은 <뛰어오른다>는 상승의 이미지가 암시하고 있다.


무지몽매한 세계와의 어떤 대결 순응도 거부하는 이 시인으로서의 자의식, 의미있는 삶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는 타락한 세상과 화해할 수 없는 일종의 선민의식이 바로 이 땅의 현실을 하나의 귀양살이로 느끼게 되는 유적의 모티브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그 날」)고 하면서 자기만이 아파하는 까닭이며, 앞의 시에서 <병을 돌보던 청춘>이 흔들어 깨워도 그때마다 <죽은 체>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여러 번 흔들어도 깨지 않는 잠, 나는 잠이었다
자면서 고통과 불행의 正當性을 밝혀냈고 反復法과
기다림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했다 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
끊임없이 왜 사는지 물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접어 날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러한 진술들은 시인의 자기반성을 위한 역설인가. 그렇다, 그렇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기도 하다. <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는 진술 속에 담긴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은 <끊임없이 왜 사는지>를 묻고 <끊임없이 희망을 접어 날>리는 삶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잠>으로 표상되는 현실적인 무기력과 불감증은 이같은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뒤흔들지 못한다.


이 땅의 현실은 진실한 삶과는 완벽하게 변별되는 거짓된 상황, 유적지의 삶이라는 것, 그 속에서 시인인 <나>는 현실적인 대응을 모색하기보다 <반복법과 기다림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하며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발견하는 구원의 불빛은 이 귀양살이의 삶을 형성하는 어떤 과거도 현재도 아닌 부재하는 미래에 있다. 시인은 <아들>이 상징하는 이 부재의 시간에 기대어 세상에 대한 때늦은 사랑을 시작한다.


다알리아 球根같은
내 아들아 네가 내 말을 믿으면 다알리아 꽃이 될 것이다
틀림없이 된다 믿음으로 세운 天國을 믿음으로 부술 수도 있다
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을 만끽하였다
詩로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
사랑은 응시하는 것이다 빈말이라도 따뜻이 말해주는 것이다 아들아


-「아들에게」


이 <아들>의 존재를 상정하면서 시인의 자의식은 현저히 유토피아적인 성향을 띤다. 아들이 <다알리아 꽃이 될 것>이라는 믿음, 이 아직은 아닌 것에 대한 믿음이 시인을 지탱하면서 그는 이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발하기 시작한다. 아들은 다알리아 꽃처럼 가을에나 꽃필 것이며 지금은 <구근>이 얼어죽지 않게 간직해야 하는 겨울이다. 시인이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으로 형상화된 현재의 고통을 응시하고 <빈말이라도 따뜻이> 말해주는 것은 바로 이 <다알리아 구근 같은 내 아들> 때문이다.


아들로 상정된 부재하는 미래에서 구원의 불빛을 발견하면서 시인은 <그리고 어느 날 첫사랑이 불어닥친다/그리고 어느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온다> (「다시, 정든 유곽에서」)는 행복을 꿈꾸게 된다. 하여 유적한 이 악마적인 세상에서 일말의 위안도 얻지 못하던 시인은 간신히 다음과 같은 화해의 <빈말이라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누이들과 처제들의 꿈꾸는, 물 같은 목소리에 취하여
버려진 조개껍질의 보라색 무늬와 길바닥에 쓰러진
까치의 암록색 꼬리에 취하여 노래하리라 정든 유곽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늦은 사랑에 관하여」




3. 회상의 여로-시인과 세계의 숙명적 거리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의 성장소설과도 같이 통일적인 서사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성복의 제 1시집을 살펴 보면서, 그 서사적 구조가 참담하게 썩고 병든 세계에 대해 어떤 형태의 관계도 거부하고 싶은 시인의 자의식을 내포하는, 유적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견 모더니즘문학 특유의 정신적 고립주의를 상기시키는 이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에 의지하여 이성복은 자신의 고독한 존재근거를 확인하고 타락한 일상으로의 매몰됨을 벗어난다. 이때 그에게 다가오는 숱한 치욕과 수모와 악몽과 아픔은 하나의 완벽하게 거짓된 상황, 유적의 삶으로 다가오며 그는 여기에 대해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으로 이성복 시의 입지점들이 충분히 규명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시 하나하나에 등장하는 다양한 시적 장치들은 이런 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앞서 언급했듯이 이성복의 시는 체험의 복함성을 드러내는 자유연상의 숱한 고리들, 고통의 처절함을 생생히 전달해 주는 오브제들의 뒤틀림, 이 악마적 세계의 타락한 세력들을 가리키는 풍부한 알레고리, 때때로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잠언적 어법 등 다양한 시적 장치들을 내포한다. 시 하나하나에서 찾아지는 이러한 시적 장치들을 우리의 문제의식과 관련시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성복 시의 텍스트내적 차원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성복 시 속에서 저마다 강력한 의미작용을 행하는 제반 시적 장치들이 하나의 주제, 하나의 정조, 하나의 비전으로 통일되는 계기는 이미 말한 회상의 형식에 있다. 그의 시는 이 악마적인 세상에서의 유적을 과거시제, 완료상의 상황으로 형상화한다. 일반적인 서정시로서는 다소 특이한 이 회상의 형식은 세계에 대한 시인의 태도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 문제는 시적 형식과 시인의 세계관과의 관계망을 묻는 일인만큼 단선적으로 논의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우리는 이 회상의 형식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악마적인 세계의 모든 고통들을 유적의 삶으로 치부하고 거리를 유지하려는 시인의 자의식과 긴밀히 맞물려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서정시는 화자의 정조를 순간적인 체험의 인상과 감정에 일치시키기 위해 말하는 내용의 시간적 거리에 관계없이 현재시제를 갖게 된다고들 한다. 흔히 <거리의 서정적 결핍>이라고 하는 이 일반론이 이성복의 시에는 거의 적용될 수 없음은 무엇 때문인가. 가령 다음과 같은 이성복의 평문은 그의 시에 나타나는 회상의 형식이 인간과 세계 사이의 거리에 대한 시인의 원초적인 입장과 결부됨을 시사한다.


인간과 세계 사이의 필연적, 혹은 숙명적인 거리에 대한 고찰 없이는 어떤 미학적 논의도 예술의 황폐화를 조장할 뿐이다.(......)오늘 우리들의 사회가 유례를 찾기 힘든 비도덕적 사회임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리고 비인간적인 폭력 아래 학대받는 사람들의 편에서 그들의 고통을 증언하고 치유하려는 노력을 누가 사소로운 것이라고 하겠는가. 문제는 흔히들 현실에 대한 관심과 미학적 거리가 불가양립의 것으로 상극한다고 믿는 데 있다.


우리는 지극히 보편타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이 평문이 실상 서로 층위가 다른 두 가지 개념을 <거리>라는 용어로 교묘히 얽어매고 있음을 본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상식적인 의미에서 <미학적 거리>란 시의 창작과 비평에서 예술성 자체의 보존을 위해 표현하려는 대상 혹은 표현된 작품에 요구되는 거리를 말한다. 시를 비롯한 예술 일반에 이런 방법론적 거리가 온당히 요구됨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문제는 이런 방법론적 거리가 <인간과 세계 사이의 필연적, 혹은 숙명적인 거리>와 연결된다고 믿는 데 있다.


이성복 자신의 시에서 이같은 <미학적 거리>가 저 회상의 형식으로 확보된다고 볼 때 이런 믿음은 곧 인간과 세계 사이의 숙명적인 거리를 규정하고 싶은 시인 자신의 입장을 진술하는 것이다.


시인과 세계 사이의 거리가 숙명적인 것으로 파악될 때, 시인에게 고통을 안겨주던 악마적인 세계는 진정한 생활이 아닌 풍경의 차원에 위치하며 그 세계에서의 귀양살이는 하나의 기억으로 완결될 수 있다. 회상의 여로가 주제적 요소로 부각되는 그의 제 2시집 「남해 금산」은 바로 이성복의 이러한 숙명론적 세계인식에 기초한다. 제 1시집이 1959년부터 1980년 현재까지 이 악마적인 세상의 귀양살이를 순차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면 「남해 금산」의 서사구조는 치욕스런 과거의 회상을 가운데 두고 <현재-과거-현재>의 스토리 전개를 밟고 있다. 이런 서사적 구조 속에 화자는 과거의 회상 속을 정처없이 걷고 있는 나그네로 나타난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 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序詩」


정적 하나가 내 가는 길과 들판을 몰아 옵니다 나직하던 발걸음 소리가 나동그라지며 패랭이꽃이 피어납니다 당신을 찾아가는 곳 어디에나 붉은 班點이 돋지요


-「정적 하나가」


「남해 금산」의 첫머리에 나오는 두 시에서도 보듯이 <가다> <찾다> <걷다> 등의 동사들로 짜여지는 여로의 모티브는 중요한 외적 구조를 이룬다. 이 여로는 분명 <정처>가 없지만 도달점을 찾아 헤매는 방항은 아니다. 그것은 순례와도 같은 <정적> 속에 <당신>을 찾아가는 현재에서 과거로의 여행인 것이다.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기억의 카타콤에는 공기가 더럽고 아픈 기억의 아픈, 국수 빼는 기계처럼 튼튼한 기억의 막국수, 기억의 원형 경기장에는 혀 떨어진 입과 꼭지 떨어진 젖과......찢긴 기억의 天幕에는 흰 피가 눈 내림, 내리다 그침. 기억의 따스한 카타콤으로 갈까요, 갑시다, 가자니까, 기억의 눅눅한 카타콤으로!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과거로 가는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 시는 제 1시집에서 유적했던 악마적인 세상에 대해 이제는 시인이 얼마만한 거리를 두고 있는가를 암시한다. 과거는 기억 속에 <흰 피가 눈 내>리던 젊음의 순교자적 고통, 세상의 무지막지한 발톱에 <혀 떨어진 입> <꼭지 떨어진 젖>의 상처들로 떠오르지만 이미 수십 세기 전 기독교박해의 상징들로 연결될 만큼 아득한 거리에 위치한다. 이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고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지금은 세월의 습곡이 그 젊은 열정의 불길을 다 거둬가버린 <사랑스런 재의 날들>로 추억된다(「나는 식당 주인이」).


제 1시집에 비해 제 2시집에 나타난 악마적 세계에의 유적이 현저히 조화로운 모습을 띠는 것은 이처럼 세계와의 시간적 거리를 전제하는 회상이 여로의 구조와 맞물리면서 서사구조에까지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기억의 눅눅한 카타콤>으로 지칭된 그 악마적 세계에는 <고통>보다도 <치욕>이 강조된다.


「치욕에 대하여」에서 시작하여 「치욕의 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편들은 세계에 대한 시인의 관찰자적 위치를 그대로 대변한다. 치욕이란 치욕스런 일들을 <치욕>이라고 느낄 수 있는 선험적인 가치체계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 가치체계가 상처받았기에 우리는 치욕을 <치욕>이라고 느낀다. 이성복에게 있어서 그 가치체계는 나그네와도 같은 관찰자, 제 1시집에서도 보았던 <고독한 시인의 자의식> 속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만나 개울음 소리를> 지르고(「그리고 다시 안개가 내렸다」) <벼들은 자라 한꺼번에 베어>지는(「자고 나면 龜甲 같은 치욕이」) 치욕스런 사건들을 시인은 그저 스쳐갈 수 있다.


그래 나도 간다 몸져 누운 사람들 손발을 밟고
머리 타넘어 나도 간다 반지처럼 빛나는 치욕의
긴 긴 사슬 끄을며


-「아득한 것이 빗방울로」


<몸져 누운 사람들의 손발을> 밟으며 가는 그 <치욕의 긴 긴 사슬>이 반지처럼 빛난다. 하나의 아름다운 장식으로서 우월성, 순결, 혼인 같은 신성한 결연 등을 상징하는 반지가 어떻게 치욕의 의미영역을 수식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것이 바로 <시인의 치욕>이기 때문이다. 그 치욕은 언어의 연금술사인 시인에 의해 반지처럼 빛나는 시로 바뀌게 될 치욕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제 1시집의 <고통>과는 달리 시인의 존재 자체와 철저히 결부된다. <모락모락 김 나는/한 그릇 쌀밥> 같은 치욕이 있기에 시인의 <꿈꾸는 일>이 있는 것이다(「치욕의 끝」).
「남해 금산」에서도 화자는 악마적 세상의 숱한 귀양살이들을 스쳐가지만 그저 스쳐갈 뿐, 그것은 숙명론적 세계인식을 가진 시인에게 필요한 풍경 같은 것이다. 이 풍경은 시인에게 어떤 구속이나 제약을 가하지 않으며, 시인이 상호작용 없이도 관찰할 수 있는 대상처럼 나타난다. 시인이 형상화하는 <우리들 삶>은 항상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 (「다시 봄이 왔다」) 이다.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금빛 거미> 같은 자본가(「금빛 거미 앞에서」), <털 난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먹을 것 없는 여인들>(「봄날 아침」), <아파트의 기저귀가 壽表처럼 바람에 날>리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로 형상화되는 악마적인 세계. 그는 가끔 이 속에서 <이젠 내보내 주세요, 가야겠습니다/보내주세요, 풀어 주세요, 소리치겠어요, 악쓰겠습니다> 하며 절규하기도 하지만(「이젠 내보내 주세요」) 세계에 대한 숙명적인 거리를 전제한 그에게는 한갓 <포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절규는 항상 시인의 냉소적인 자세를 상정하고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곳에 와서 많이 즐거웠습니다 갖은 즐거움 다 겪었습니다 민짜의 술집 여자들의 퉁퉁 부은 몸은 너무 즐거워 오래 보기 괴로왔습니다 하얗게 면도한 돼지가 하늘을 향해 흥흥, 냄새 맡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젠 내보내 주세요」


지금까지의 평자들은 「푸른 풀이여」에서 「머잖아 이 욕망도」(38-41면)까지 나타나는 <죽고 싶음>의 포즈 역시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있다. 이런 포즈를 두고 이 악마적인 세상에 더 이상 살 이유가 없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면 이는 제 1시집과 제 2시집 사이의 현격한 낙차를 간과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평자들이 이 두 시집을 동일한 시각에서 논했던바, 제 1시집에서 고통주의(dolorism)라고까지 할 수 있는 아픔에 대한 편집광적인 집착과 이 유적의 삶이 갖는 선험적인 무의미성 등의 요소들이 다시 환기되면서 제 2시집에 나타난 <죽고 싶음>의 포즈를 당연시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 유적의 삶을 고통이 아닌 치욕으로 받아들이며, 그것과의 숙명적인 거리를 규정하는 이성복에게 <죽고 싶음>이란 한갓 수사학적 선택에 불과하다.


머잖아 근질거리는 혀에 곰팡이 슬고 異物 같은 죽음이 흰피톨 곁에 다가 올 것이다


-「머잖아 이 욕망도」


오, 해가 지면 거기 누워 죽을 수도 있으리라
이 몸, 거친 몸, 이 어이 거친 몸


-「불현 그리움이 물밀어」


「남해 금산」에서 나타나는 죽음은 한결같이 미래시제의 사건이다. 이미 숙명론적 세계인식을 갖고 회상의 여로를 걷고 있는 시인에게 미래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異物같은> 것이다. <해가 지면 거기 누워 죽을 수도> 있겠지만, 이 회상의 여로 위에서 <熱덩어리 해는> 끝까지 <지지 않을> 것이다(「어머니 2」). 왜냐하면 그의 치욕을 대신 앓으며 견디는 구원의 불빛이 미래가 아닌 과거 속에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제 1시집과 제 2시집의 차이는 이 구원의 계기들 사이의 낙차에서도 비롯된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시인으로 하여금 삶에 일말의 희망을 느끼고 <때 늦은 사랑>을 시작하게 한 구원의 계기가 미래에 있을 <아들의 꽃핌>이었다면, 「남해 금산」에서 그것은 악마적인 세상이 안겨주는 온갖 고통과 수모와 치욕을 한몸에 받으며 살아오신 <어머니의 생애>이다. 앞에서 부재하는 미래를 향했던 구원의 계기는 여기서 과거의 회상 속에 찾아지는 어머니로 전환된다. <촛불과 안개꽃 사이로 올라오는 온갖 하소연을 한쪽 귀로 흘리시면서, 오늘도 화장지 행상에 지친 아들의 손발에, 가슴에 깊이 박힌 못을 뽑으시는>(「어머니 1」) 어머니의 이미지는 이 악마 같은 세계의 삶이 더 이상 고통이거나 치욕일 수 없다는 인식을 낳는다.


그리하여 시인과 세계 사이의 갈등들이 화해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깨달으면서(「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회상을 더듬어가던 시인의 여로는 이제 다시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이런 시집 뒷부분은 그렇듯 참담한 유적 속에서도 고결하게 죽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천사적 자살(suicide angeliste)을 넘어선 듯한 시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펼쳐진다. 그동안의 <모든 몸부림>은 이런 안온한 화해와 같이 <빛나는 靜止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으며(「상류를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떼처럼」), <우리가 저무는 풍경 한가운데서/오후의 햇빛처럼 머무는 법>을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붉은 열매들이 소리 없이」)고 한다.


그렇다면 시집「남해 금산」을 완성하기까지 세계의 숱한 악마적 형상들을 목격하며 괴로운 유적지의 삶을 지나온 시인에게 어떤 인식의 진전이 있었단 말인가. 없다. 애초에 <회상 속으로의 여로>라는 서사적 구조 자체가 전제하고 있던 인간과 세계의 숙명적인 거리에 대한 시인의 믿음이 악마적 세계 속에 살아 견디는 일에 대한 숙명론적 달관으로 나타날 뿐이다. 제 1시집이 보여주었던 김수영적인 아름다움, 즉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다>(김수영,「이혼 취소」)처럼 이 악마적인 세상을 형성한 기존의 모든 상황은 거짓이며 구원을 바랄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는 단호한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은, 여기서 현격히 약화된다. 제 1시집에서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을 참으며 <아들>이라는 부재하는 미래를 향해 사랑의 빈말을 건네던 시인의 유토피아의식은 이제 <어머니>라는 매개를 통해 기존의 세계를 숙명적인 것으로 인정하려는 화해의 의식으로 변모한다. <이제 막 날개 펴는 괴로움 하나도/오래 전에 예정된 것이었다> (「밤이 오면 길이」)란 진술이야말로 화해의 이러한 숙명론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남해 금산」에서 이성복의 시에 치열한 의미망을 맺어주던 악마적인 세계는 시인이 지나온 하나의 풍경으로 대상화되며 시인의 존재 밖으로 응고된다. 그 결과 하나하나의 서정시들은 난해한 이미지도, 기괴한 오브제도 없는 매우 아름다운 시편을 이루지만, 그 아름다움은 시인과 세계 사이의 심연과도 같은 단절을 보여준다. 세계와의 모순적 긴장과 대결의식이 상쇄된 아름다움, 그것은 더 이상 구체적인 현실에 의해 내용적으로 결정되는 아름다움일 수 없으며,「남해 금산」이후의 이성복 시가 노정하는 동어반복적 추상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4. 서사적 공간의 소멸과 사랑의 추상화-맺는 말


지금까지 이성복의 두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남해 금산」을 중심으로 그의 시를 관류하는 유적과 회상의 두 의미요소들을 추적하면서, 그것의 양상과 변모에 의해 확인되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세계인식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우리는 동시대의 삶을 악마적 세계의 유적으로 파악하려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깔고 있는 제 1시집으로부터, 이같은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미학적 거리와 인간과 세계의 숙명적 거리를 동일시하고 회상의 여로를 통해 이러한 세계인식을 하나의 서사적 구조로 표출하게 되는 제 2시집까지의 변모과정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미 곳곳에서 시사했듯이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없는 이같은 변모는「남해 금산」이후의 시작들에서 그 한계와 퇴행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성복은 분명 자신의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가 80년대 초 그토록 휘황한 빛을 발하며 만인의 심금을 울렸던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음에 틀림이 없다. 이성복의 시가 갖는 가장 감동적인 영역은 바로 그의 시가 先詩적으로 머금고 있던 커다란 내부공간, 우리가 <악마적 세계>라 규정했던 그 서사적 공간에 있다. 숱한 고통과 수모와 악몽과 치욕을 존재하게 했던 이성복 시의 그 지옥 같은 서사적 공간이 80년 5월과 함께 다가온 동시대의 지옥 같음을 환기시킬 때, <정든 유곽>의 체험들에 괴로워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시인 자신의 심혼의 울림이자 한 시대의 울림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서사적 공간이 모성원리에 기댄 화해와 인간과 세계 사이의 숙명적인 거리에 대한 달관에 의해 하나의 풍경으로 응고될 때, 그의 시가 갖는 깊이는 단숨에 現詩적인 층위로 표피화되며 한갓된 기교시의 차원에 떨어지는 것이다.


최근「어두워질 때까지」「이별」(「문학과 사회」1988 봄), 「만남」(「실천문학」1988 여름)에서도 찾아지듯이, 자신의 시에서 창조한 <당신>을 만해의 <님>과 같은 경지로 밀어 올릴려는 이성복의 안간힘이 근원적인 한계에 부딪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해의 <님>이 상실된 조국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거니와, 무엇보다도 그것은 이성복의 <당신>이 갖지 못한 어두운 식민지의 서사적 공간과 그런 어두운 세계에 대한 치열한 대결의식을 머금고 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치지 마세요. 무덤 위에 피묻은 깃대를 세우세요>(한용운「타고르의 시를 읽고」)에서도 보이듯이 타고르의 시「園丁」이 노래하는 조화로운 화해를 비판하고, 님이 죽은 고통스런 세계로부터 <피묻은 깃대>를 가져와 세우려는 만해의 의지에 비해 이성복이 노래하는 <당신>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現詩적인 것인가는 명약관화하다.


노을빛에 타오르는 나무처럼 그렇게 있었습니다 해가 져도 나의 사랑은 저물지 않고 나로 하여 언덕은 불 붙었습니다 바람에 불리는 풀잎 하나도 괴로움이었습니다
나의 괴로움을 밟고 오소서, 밤이 오면 내 사랑은 한갓 잠자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두워질 때까지」


시인은 지금 대낮과 밤의 경계선에 서서 어두워지기 전까지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해가 져도 나의 사랑은 저물지 않고> <나로 하여 언덕은 불>붙는 아름다운 파노라마는, 그러나 한낱 주관적 관념의 세계로서, 노을빛에 휩싸여 느끼는 일종의 <비극적 황홀>이다. 실상 당신의 부재 앞에는 <바람에 불리는 풀잎 하나도 괴로움>이며, 밤이라는 객관적 현실이 진행될 때 나의 사랑은 <한갓 잠자는 나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당신>에 대한 이처럼 무력한 사랑은 세계의 악마적인 현실에 대한 시인의 숙명론과 표리의 관계를 이룬다. 만해의 사랑이 그 서사적 공간의 무게로 인해 죽음마저도 넘어서는 의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면 이성복의 사랑이 갖는 상대적인 한계가 분명해질 것이다. 상실된 조국과 식민지의 현실을 함축한 만해의 사랑이 물러설 수 없는 심혼의 울림으로까지 육박해 간다면 이성복의 現詩的 사랑은 감성의 감미로운 동어반복에 그치는 것이다.


시는 항상 세계의 악마성에 반대하지만 결코 그 악마성의 피안에 위치할 수는 없다. 악마적인 세계와 시인의 존재 사이에 변증법적 긴장과 대립이 상쇄되고, <인간과 세계 사이의 숙명적인 거리>라는 이름으로 간과될 때, 이성복의 시는 더 이상 <이성복적>이기를 멈추고 추상화된다. 우리는 반성없는 세상에 대해 <슬픔으로 윽박지르던> 이성복의 초기시들을 가장 그다운 모습으로 기억한다. 김수영을 다시 보는 듯한 그의 울음과 윽박지름과 떼씀을 우리는 얼마나 좋아했고 인상깊게 경청했던가. <사랑스런 재의 날들>을 노래하는 지금의 이성복이 다시 <한 줌의 재가 어찌/살아있는 바이러스만 할까> 하는 인식으로 나아가길 진심으로 바라며 글을 맺는다.




http://www.yiinhwa.com/criticism/03.htm
(자료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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