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저울 /김채영
휴일을 맞아 한적한 야외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송어 양식장을 겸한 횟집이었는데 음식 맛도 좋았을 뿐 아니라, 넓은 뜰을 활용한 주변의 배경이 마음에 들었다. 울타리를 대신한 꽃나무와 나무탁자는 햇살에 아늑했고, 절구통과 맷돌 핑경 등으로 배치한 고풍스러운 옛날 물건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양식장의 송어를 구경하고 나오니 정원의 연못에 한가롭게 놀고 있는 비단잉어가 눈길을 끌었다. 칙칙한 빛깔의 송어에 비해 비단잉어는 그야말로 이름 값을 해냈다. 하얀 바탕에 큼직큼직한 빨간 단풍무늬나 잔잔한 꽃무늬가 새겨진 비단 잉어는 비단 옷을 입은 왕족처럼 우아하기까지 했다. 분수의 물보라가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연못 위로 작은 다리가 나 있어 비단 잉어의 연못이 더욱 호화스럽게 느껴졌다. 집에서 기르는 개만하더라도 서글프게 식용견과 애완견으로 분리되듯이 같은 집에서 살고있는 비단잉어와 송어는 지극히 상반된 삶을 공존하고 있다.
연못을 소풍하는 것이 소일거리인 비단 잉어의 휴식 같은 삶을 송어 양식장에서는 찾을수가 없었다. 물속의 작은 파동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나는 절대로 너희들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아' 송어는 그렇게 말해줄 것 같았다. 자신들의 운명을 아는 듯, 양어장 밑바닥에 시커멓게 납작 엎드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송어들, 그들 중 누가 뜰채에 건져져 도마 위로 뉘여 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저 뜰 채가 던져지는 공간 속에 갇힌 물고기가 그의 제삿날이라는 것. 송어는 잡아먹힐 위험이나 먹이 걱정 없는 앞날이 탄탄하게 보장된 귀족 물고기가 지척에 있는지도 짐작도 못할 것이다. 양식장도 송어를 키워 운영을 하니 잉어도 알고 보면 결국은 송어가 키워내는 것 아닌가.
연못 위 돌다리를 건너가며 비단잉어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사람이든 동물이든 잘나고 봐야해, 하며 그들의 평화로움에 왠지 돌을 던지고 싶었다. 비단 잉어야 말로 팔자 좋은 한량 아닌가. 그 순간 단골인 일행에게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그 잘난 비단 잉어들은 그 집의 짐스러운 천덕꾸러기라는 말.
비단잉어가 있는 정원 속의 연못은 처음에는 그들의 의도대로 손님을 끄는 촉매가 되었단다. 야외의 멋진 식탁에서 송어회를 먹으며 비단잉어를 감상하는 멋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먹성 좋은 비단잉어들은 풍선처럼 덩치들이 커가더라는 것이다. 경기가 좋지 않으니 식욕이 왕성한 잉어의 사료 값을 감당하기조차 힘든 현실이라고 주인이 푸념을 하더라고 한다. 연못에는 물보다 고기가 더 많은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영양실조 현상인지 잉어의 몸이 기형적으로 일그러진 것도 보였고 제들끼리 살을 뜯어먹어 몸체가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교통 체증으로 몸살을 앓는 도시거리처럼 연못 속은 차고 넘치는 잉어들로 충돌하여 산소부족까지 우려되었다.
다음 얘기는 나를 더욱 쓸쓸하게 했다. 주인은 잉어들에게 먹이를 죽지 않을 만큼 준다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생명, 죽일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었다. 달리 처분할 방법도 없으니 그저 방치해 두는 듯 했다. 그나마 치열한 먹이 싸움에 배분의 몫을 빼앗김으로 약자의 죽음이 종종 물위로 떠오른다고 한다. 비단잉어에겐 사람들이 지날 때마다 몰려 다니 는 것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눈물겨운 동작이지만 구경꾼들은 그 마음을 알 리가 없다. 그저 사람들을 살갑게 따르려니 하며 먹다 남은 과자를 던져주곤 했을 것이다.
오래전, 빛 바랜 신문에서 보았던 황량한 사진 한 컷이 기억난다. 식량난에 허덕이는 옛 소련 사람들이 커다란 스푼을 들고 끝없이 줄을 서서 배급을 기다리는 장면을 포착한 것인데, 고급스러운 모피로 휘감은 차림새가 절박한 상황과 묘한 대비를 주었다.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고, 상점에서는 빵이나 밀가루가 동이 났다며 난감해 하는 노인의 표정에 대한 설명이 사진 아래 곁들어 있었다.
그 윤기 흐르던 모피를 감고 굶주린 사림들의 모습이 허울 좋은 비단잉어의 무리에 오버랩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굶주림 앞에서는 옛 영화는 또한 얼마나 부질없는 환상이었을까.
먹이 걱정 안하고 살지만 결국 도마 위에 올라야하는 송어의 운명과 겉만 번지르 하며 굶기를 밥먹듯 하는 비단 잉어. 과연 어떤 삶이 더 행복할까는 단정짓기 매우 어렵다.
갇힌 물고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이보다 삶의 애착이라고 한다. 전어들만 넣어둔 수족관보다 전어의 무리 속에 숭어를 한 마리 넣은 수족관의 물고기들이 더욱 싱싱한 활기로 오래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바다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던 전어들은 좁은 수족관에서 갇혀 죽음의 공포나 나태에 빠져 살게 된다. 그때 숭어 한 마리를 놓아줌으로서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니며 살아갈 희망을 갖는 다는 것이다.
비단잉어에게는 먹이가 없을 뿐 아니라 숭어같은 천적이 없다. 오직 긴 굶주림과 나른한 평화만이 있을 뿐이었다. 양어장의 송어 또한 뜰채의 긴장이 공포로 작용하겠지만 그것은 살기 위해 출구를 찾는 과정일 뿐 행복은 그들에게 엄연히 거리가 먼 것이리라.
잉어와 송어, 어쩌면 그들은 천칭저울처럼 공평하게 분배된 불행을 떠 안고 사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어쩌면 희망은 있을 것이다. 비단 잉어는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어디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송어는 살아있는 생명은 언젠가는 죽을 것 부당한 대우는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나. 잉어와 송어 중 어떤 것이 조금이라도 행복한 삶이냐고 누구도 물을 자격은 없다. 삶의 저울에 자신의 알몸을 잴 수 있는 눈금의 잣대는 자신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공중목욕탕에서 체중계에 오르내리는 타인들이 비밀스럽게 자신의 중량을 간직하고 떠나듯 송어와 잉어는 쓸데없는 화두 속에 침묵을 지킨체 내 시야를 스쳐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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