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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유영하는 세계/박영택

에세이향기 2025. 10. 29. 17:04

유영하는 세계
 
박영택 |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
 
 
“예술가가 된다는 건 상처를 황금 양털로 바꾸는 일과 같다.”- 이시 우드 1)
 
 
1. 우리는 모두 일시적이고 임의적인 삶을 사는 존재들이다. 먼지와도 같이 부유하다가 이내 사라진다. 이 비극적인 수사는 너무나 진실이어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세상은 먼지로 이루어졌다”고 인도의 오랜 속담은 말한다. 무에서 유로 태어났다가 다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유한한 생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무를 향해, 종말을 향해 열심히 살아간다. 죽어간다. 산다는 것은 동시에 죽어가는 것이고 죽음은 한 생명체의 최종 귀착지가 되어 남은 이들에게 부고를 발송하고는 마침내 종적을 지운다. 그렇게 생명체는 사라진다. 사라지기 직전까지의 얼굴이 살아있는 이들의 얼굴이고 자기 존재의 마지막 표상이다. 아니 모든 얼굴은 항상 최후의 얼굴 같다. 지금 내가 바라보는 저이의 얼굴이 이제 내가 보는 그의 마지막 얼굴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들은 얼굴은 마치 밀랍으로 봉인된 미라 같은 얼굴이 되어 있다. 어느 특정 시간과 공간 속에 박혀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시간에 함몰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은, 본다는 것은 오로지 특정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가능하다.
미술은 사라지려는 이들의 얼굴을 재현하고 기억하면서 시간에 저항하고 소멸에 반항한다. 이미지는 결국 귀신들이고 유령 같은 존재로 떠돈다. 그것은 여기에 없는 것을, 이미 사라진 것을 부질없이 남겨서 그 아득한 시간을 지금 현재의 시간으로 불러들이는 매개다. 미술은 사라진 것과 현재 그것을 목도하는 시간의 사이에서, 그 틈에서 존재한다. 그러한 시간은 애매하고 모호하다. 아울러 그것이 존재하는 공간 역시 혼란스럽다.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속하지 않는 것들, 지금의 시간에서 바라보고 있지만 이미 과거의 시간들인 것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역설적인 것이다.
 
2. 우리는 모두 특정한 시공간에 갇힌 이들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생의 조건이고 의식의 한계일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은 인간의 인식 형식에 해당한다.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 필수 불가결하다면서 인간이 없다면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피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한정된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기를 늘상 꿈꾸기도 한다. 그것은 이곳에 없는 곳에 대한 희구 아래 상상된다. 이른바 유토피아가 그것이고 아울러 꿈이나 판타지, 몽상과 가상의 영역을 헤매는 의식들은 주어진 시공간의 한계를 돌파해 내는, 다른 시간과 공간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일이다. 공간을 초월한 삶은 가능한가?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 이상향을 말한다. 그것은 비현실적이지만 인간의 상상력과 노력의 원동력이 된다. 니체는 진정한 예술은 공간의 제약을 넘는 것이라고 말하고 공간을 초월한 삶을 말한다. 일상의 규율과 압력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시공간을 모색하는 일은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을 질문하는 일이자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다른 공간에 대한 이의 제기이자 기존의 공간을 전도시키는 일, 낯섦을 통해 우리의 일상성을 들여다보려는 해체적 관점을 수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푸코는 이를 축적되지 않는 시간, 역사에서 배제된 시간의 공간(헤테로토피아)과 일상의 시간 흐름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시간(헤테로크로니아)으로 설명한다.
 
3. 세화미술관은 ‘유영하는 세계’라는 제목의 기획전을 마련했다. 부제는 ‘침대, 욕조, 버스’다. 이 세 가지는 우리를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다른 어떤 곳으로 인도하는 매개의 공간에 해당한다. 현실과 어긋나는 장소로 이동시키는 곳이자 이질적인 것들의 순환이 일어나는 곳이다. 이른바 헤테로토피아에 해당하는 어느 공간에 대한 감각을 지닌 이들의 작품을 선별한 것 같다. 부제가 흥미롭다. 예를 들어 침대는 모든 의무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몸을 죽음과 같은 자세로 돌려보내는 공간이다. 침대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일들이 벌어지며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순간을 보내려는 의지가 펼쳐진다. 그것은 낮에 이루어진 모든 일상과 의무, 노동과 피로에서 벗어나 일시적인 해방구가 된다. 지치고 아픈 몸을 누이고 육체를 잠재우며 사회적 관습의 눈을 의식해 자신을 감추었던, 가리고 있던 모든 상징들을 내려놓는 일이다. 절대적인 휴식과 욕망, 꿈꾸기를 도모하는 침대는 더 이상 한 사회와 체제의 압력, 권력이나 의무가 자리하기 어려운 공간을 제공해 준다. 
동일한 맥락에서 욕조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대신한다고 믿는, 타자들의 시선에 의해 줄곧 주시 되던 상징 체계인 옷을 벗어내고 나체를, 피부를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이를 이완시키거나 씻는 공간과 시간을 제공한다. 욕조에 잠긴 자신의 무방비한 알몸은 타자의 시선에서 완전히 풀려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 벌거벗은 몸과 드러난 피부는 모든 사회적 압력과 무게가 사라진 순간을 기념하며 빛난다. 뜨거운 목욕물 안에 몸을 담그며 하루 동안의 피로와 근심과 상처를 잠시나마 망각하는 시간은 그만큼 치유적이다. 온전히 자신만이 자리하는, 이 세상에 나 홀로 존재하고 있다는 환상, 현실 세계를 망각하도록 잠시나마 유예의 시간을 안겨주는 침대와 욕조라는 공간과 그곳에서 시간은 일종의 헤테로토피아와 헤테로크로니아에 해당한다. 
버스 또한 특정한 목적지로 가기 위해 사람들을 태우고 운행한다. 이 이동 수단은 출발지와 종착지 사이에서 승객들을 잠시 외부와 차단한다. 버스 좌석에 앉아 창밖을 보는 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목적지에서의 일과 의무를 잠시 망각하게 한다. 일정한 시간 동안 우리는 버스를 이용해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이동한다. 익숙한 공간과 이별하고 낯선 공간으로 갔다가 다시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온다. 이 반복 안에서 잠시나마 현실 세계에서 풀려난 느낌을 부여받는다. 버스가 침대나 욕조만큼 자신의 사적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자주 버스를 이용해 유랑적인 삶을 도모한다. 버스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이동 수단은 노마드적인 삶을 제공해 주는 적극적인 수단이 된다. 공항 라운지는 가장 흥미로운 장소가 된다. 잠시 머물기만 할 뿐인 임시적이고 찰나적인 공간이고 다들 어디론가 가기 위한 목적지를 갖고 떠나기를 기다리는 이들을 잠시나마 주저앉히는 곳이다. 동시대는 시공간이 빠르게 단축되고 압축되면서 인간의 이동 거리가 확장되고 낯선 삶과 공간과 접촉하면서 익숙한 자신의 영역에서 빠져나오는 게 가능해졌다. 오늘날은 그러한 시공간의 압축이 너무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어서 인간의 모든 일은 인터넷상에서, 온라인 안에서 진행된다. 저마다 컴퓨터 화면 안에서, 핸드폰의 그 작은 사각형 액정 화면 속에서 부유한다. 모든 정보의 공유와 소통의 자유로움이 이루어지고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공간을 제공해 준다. 시공간이 압축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 가상과 현실, 실재와 허구의 착종으로 인해 야기되는 새로운 감각이 지금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4. ‘침대, 욕조, 버스’라는 서브 타이틀은 이 전시의 성격을 조심스레 가리킨다. 미술관 측은 우리 몸이 딛고 살아가는 세계의 다양한 면모에 주목하고자 한다. 여러 가지가 겹쳐 있는 눈 앞에 펼쳐진 세계는 현실적인 장면과 비현실적인 장면, 혼합 현실적인 장면이 혼재된 지극히 모호해서 그 분절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상태를 그려보는 것이 전시 기획 의도라고 말한다. 그래서 현실과 비현실의 혼재와 현실의 모호함을 상상력으로 혼성하는 동시대 작가 10명을 모았다. 김명범, 심래정, 안지산, 이빈소연, 장성은, 천경우, 한선우, 이시 우드, 로르 프루보, 파이퍼 뱅스가 그들이다. 한국과 서양 작가들이 함께했으며 페인팅과 사진, 영상, 설치 작업이 골고루 포진했다. 개별 작가들의 작업은 서로 다른 방법론과 어법을 지니며 자신이 바라보는 현실의 시공간을 연출한다. 나로서는 이들 작가의 작업이 인상적으로 몽환적이고 환상에 가까운 부분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초현실주의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일한 하나로 묶이기에는 모호하고 이질적이다. 미술관 측에 의하면 일상과 현실 너머 ‘유영하는 세계’를 보여준다고 여겨지는 작가들의 작업을 선별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다시 네 가지로 구분해서 환상과 비전, 리얼리티· 원초적 심연, 혼성 교차 세계, 영감·원천으로 이름을 붙였다. 참여 작가들을 묶어 내는 주제가 느슨하고 설득력이 약화 되는 편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뭇 다른 저마다의 작업에 내재 된 모종의 공유성을 ‘유영하는 세계’로 삼은 의미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게 한다.
 
5. 사실 모든 이미지는 일상과 현실에서 출발하면서도 이를 색다른 시선으로, 낯선 감각으로 다시 보여주는 일을 해왔다. 미술은 지금의 현실과는 무관해 보이는 다른 현실을 도모하는 일이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작가에 의해 가상으로 만들어진 현실, 이른바 유사 현실 내지 가짜 현실이거나 혹은 몽상이자 환상 또는 환영에 해당한다. 몽상가들이자 새로운 환영을 창조하는 이들 작가들은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보여주고 관습적인 것에서 이탈해 경험한 것을 호출하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술작품을 보는 일은 적극적인 꿈 꾸기이며 환상을 통해 이 현실을 빠져나가는 출구를 만들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주어진 삶과 일상의 풍경과 낯익은 사물들과 잠시 결별하면서 이런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새로운 얼굴과 마주하게 되고 익숙한 감각에서 벗어나 다른 감각과 감수성의 발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세우는 일이기도 하고 어제와 이별하고 지금의 나로부터 새로운 나로 나아가게 해준다. 예술가들은 각자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보인다. 그러니 모든 작가들이 거의 몽상가들이고 비현실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자 그들이 보여주는 현실이란 것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일 수가 없다. 미술은 현실과 비현실, 실재와 가상, 구체적인 일상과 몽상,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에서 진행된다. 
동시대를 사는 우리들 모두는 이전과는 다른 급격한 이주와 이동의 자유를 만끽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가상의 공간이 지배적으로 되면서 자신이 딛고 있는 현실계의 체험이, 시공간에 대한 인식이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오늘날 적지 않은 작가들의 작업은 급속히 달라지는 시각 환경 속에서 미술작품이 이해·경험되고, 소통·전시되는 방식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첨단 기술 매체에 의해 급변하는 시각문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바로 미술가일 것이다. 현재 우리의 일상은 이미지를 통한 시각적 경험 방식으로 최적화되어 버렸다.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의 대부분은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것이다. 시뮬라크르와 하이퍼리얼리티가 현실을, 실재 작품을 대신한다는 말이다. 비물질적 이미지 체험이 확장되면서 변화된 사람들의 감각은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관람하는 방식에도, 시공간에 대한 체험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오늘날 ‘유동하는 액체’로서의 문화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감각 경험에 대한 의문과 현존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현실 속에서 낯선 공간을, 주어진 현실계에서 헤테로토피아와 헤테로크로니아를 도모하고 있다. 
 
유영하는 세계:Bed, Bath, Bus
2025.4.17 - 6.29
세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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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시우드, 『퀸 베이비』, 일민미술관, 2023, 327-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