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 / 지속적으로 다시 짜여 지는 시공간
이선영
지속적으로 다시 짜여 지는 시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홍범의 전시가 열린 성북동의 ‘오래된 집’은 삶의 무늬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작가는 이 장소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작품과 공간이 서로 스며드는 듯한 전시를 진행했다. 그 오래된 한옥은 작품만이 두드러질 것을 목적으로 하는 중성적 공간이 아니라, 작품과 상호작용하는 공간이다. 기계적 상호작용이 아니라, 바람결 따라 함께 호흡하는 공간이며, 관객이 현을 건드리면 음악도 연주되는 살아있는 공명의 공간이다. 작가는 삶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터 무늬들을 작품에 끌어들여 작품의 내재적 요소로 만들고, 작품이 아니었으며 더러움이나 잡음으로 남아있을 것들을 심미적 차원으로 변형시켰다. 여러 자리들과 긴밀하게 접속하기 위해 작품에 빈 구석을 남겨두었으며, 그렇게 합체되어 형성된 중층적 표면을 강조한다. 액자 안에 이미지가 그려진 평면은 투명하여 얼룩덜룩한 집의 바탕 면과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실재와 환영의 만남은 상충되지 않고 서로 증폭된다. 현실은 환상적인 것으로 변형되며, 액자 안의 환영은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 실재감을 가진다. 보통, 장소특정적인 작업은 설치라는 무대적 연출 방식에 치중하는데, 홍범의 전시에서는 빈 의자나 수수께끼같은 짐 꾸러미를 활용한 무대적 연출 외에도 유난히 많은 액자작품들이 눈에 띈다. 벽에 걸리거나 공중에 매달린 액자는 바탕 면과 공간을 끌어들이는 장치이자, 또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시키는 문턱이다. 그래서 그 ‘오래된 집’은 집이자 유적지이자, 폐허이자, 축소된 도시 같은 느낌을 준다. 분위기 있는 실제 공간을 넘어서, 그 안에서 또 다른 시공간으로 떠날 수 있는 인터페이스나 플랫폼같은 장소가 된다. 작은 액자들은 그 너머의 공간들로 연결되는 구식 한옥은 좁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오래된 건축에서 시작되며, 작품을 이루는 요소 또한 건축적인 것이 많다.
그것은 어떤 건축이 때때로 그러하듯이 ‘역동적인 사건 공간’(베르나르 추미)으로 고양된다. 대부분 마당이 없는 현대의 주거방식과 달리 옛집에는 작은 안마당이 있는데, 작가는 그곳에 복잡한 문양으로 오려진 아크릴 하프미러를 설치하고, 대형파리(파리대왕)를 지붕에 매달아 놓아 반사 빛이 어른거리게 한다. 밝은 반사면들은 공중과 바닥에서 햇빛과 바람에 기대어 춤을 춘다. 안마당에 접한 공간에는 창, 문, 벽, 기둥, 계단 같은 건축적 이미지가 새겨진 투명패널들이 풍경처럼 매달려 있다. 공기와 빛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다양한 각도의 조합은 현실, 그리고 가상공간 속에서 복잡한 시각적 메아리를 만든다. 패널 안의 이미지는 건축적 요소들이기에 빛은 물론 그림자까지 가세한 공간의 산란효과는 위상학적 변환의 장이 된다. 그것들은 또한 공간적으로 시연되는 영화 같다. 각각의 단면들을 넘어서 지속의 체험을 야기하는 그것들은 영화처럼 운동을 통해서 이미지를 파생시킨다.


홍범의 작품에서 공간에 모빌처럼 매달린 시공간 블록을 ‘변화하는 전체, 즉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단면’(들뢰즈)처럼 제시된다.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이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지속의 체험에 대해 분석하듯이, 여기서 시간은 현재의 현재, 과거의 현재, 미래의 현재로 동시에 파편화된다. 이 층들은 비연대기적이고 불연속적인 질서를 갖지만, 서로 공존한다. 시간은 지나가는 현재와 보존되는 과거와 비결정적 미래로 끊임없이 나뉜다. 홍범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도입되는 시간성은 또한 불확실성을 높인다. 공간적으로 지평이나 중심이 불확실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의 작품에 내재한 지속, 그것이 주는 시점과 지점의 유희는 도시 계획에서도 활용되는 현란한 가상공간에서의 기술이 아니라, 집을 통과하는 햇빛과 바람에 반응하는 변화무쌍한 체험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실내에 걸린 벽면이 비치는 유리 액자의 경우, 드로잉에서 떨어지는 그림자도 가세하여 분리된 차원들의 간섭 효과가 있다.
홍범의 작품에서 프레임은 연결을 위한 단절이다. 연결을 통해 생성되는 맥락은 역동적이다. 얼룩 진 벽에 투사되는 동영상은 선재하는 터 무늬를 더욱 다채로운 질감으로 변주한다. 액자 안의 이미지에는 어디론가 뚫린 구멍들이 있는데, 그것은 나무 액자를 또 다른 공간을 위한 문턱임을 알려준다. 가령 삼단으로 나뉜 공간 이미지가 있는 작품에서, 가림 막의 옆, 아래, 위에 뚫린 구멍들은 머무름보다는 통과에 목적을 둔다. 공간은 시간과 긴밀하다. 공간은 지각의 장소일 뿐 아니라, 기억의 시간과 연결된다. 가령 그는 동영상을 투사하여 관객이 마주한 벽면 전체를 무한히 멀어지는 또 다른 통로로 뚫는다. 그 뒤로 무엇이 이어질지는 바닥없는 심연처럼 예측 불가능이다. 그 어두운 깊이는 시점과 종점을 알 수 없는 시간여행을 이끈다. 끝없이 이동하는 시점, 지점을 암시하는 홍범의 작품은 미로 같다. 자크 아탈리는 [미로]에서 유목민은 표지라든가 또는 안내를 필요로 하지만, 그가 마법의 실이나 화살, 자갈표지, 안내판 등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기억력을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정착민이 되어버린 과거의 유목민은 기억 속에 우글거렸던 모든 것을 치워버렸다. 건망증은 자본주의 경제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기억력은 창조를 위한 기본적인 도구이며 서로 관련 없는 사물들 사이에 새로운 다리를 가설하는 방법이다. 자크 아탈리는 따라가야 할 길의 이미지인 미로는 광명으로 향함과 동시에, 의식 깊숙이 숨겨져 있는 지역을 향해 다가가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미로나 유목은 동시에 현대를 설명하는 또 다른 키워드인 리좀을 말하게 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유목적 주체]에서 유목민은 목적 없이 이행들을 활성화한다고 하면서, 들뢰즈가 강조한 리좀적 사유방식은 서구의 지식나무가 가시적이고 수직적으로 뻗어나가는 것과 대립되게, 비밀스럽고 옆으로 뻗으며 펼쳐나간다고 말한다. 홍범의 이전 작품에는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복잡한 미로-리좀같은 공간이 다수 발견된다.
3D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그림의 공간을 입체화한 비디오 작품들은 그림과 달리 빛의 움직임이 있어서 공간에 음영이 맺힌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타는 기억과 공간적 체험인 지각을 동시에 활성화한다. 구식 책상 위에 구식 모니터를 피라미드처럼 쌓아놓은 작품 [다섯개의 방]은 화면 하나하나가 각각의 방처럼 간주된다. 벽 또는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동영상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빛과 그림자에 대해 작가는 ‘빛은 나의 인식이고, 그림자는 그 공간에 맺혀 있는 봉인된 기억’이라고 말한다. 동영상 속 빛이 표현되는 방식은 특이하다. 작품 속 사물들은 그것을 조명하는 어떤 다른 것 없이 스스로 빛을 발한다. 조명되는 사물은 없다. 베르그송이 말하듯이 의식은 그 사물들, 즉 빛의 이미지와 구별할 수 없다.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이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해설하듯이, 사물들을 비추는(조명하는) 광선으로서의 의식은 없으며, 단지 주체에게로 범람하는 발광이 있다.

뇌를 스크린이라고 간주하는 들뢰즈는 ‘의식이 주체로부터 사물로 나아가는 빛이 되는 대신, 하나의 사물에서 주체에게 나아가는 발광성이 있다’고 강조한다. 순차적으로 방을 돌아다니는 이의 지각은 어떤 기억을 불러낸다. 서로 거리와 위치에 있지만 관찰자에 의해 하나의 의미 있는 형태가 되는 별자리처럼, 서로 다른 차원의 것들을 융합시키는 장치들은 소박하면서도 절묘하다. 전시에는 축소모델이 아니라, 실제 크기의 사물 또한 동원하기도 하다. 낡은 의자 앞 낡은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은 부재하면서도 현존하는 시공간을 일깨운다. 그 곳, 또는 그 때는 이제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다. 부재하면서도 새롭게 재창조되는 장소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슬슬 움직이는 짐 꾸러미는 그곳에 그렇게 놓여있었음을 기억하는 관객을 놀래 키고,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관객에게는 왠지 이상하다는 느낌을 남긴다. 그 옆에 박스 안에서 아직 안 꺼내진 액자들은 누군가에게 의해 펼쳐질 또 다른 시공간들로 접혀있다.
집이라는 가장 친숙한 공간을 알 수 없는 곳으로 이리저리 뚫린 기괴한 구멍 같은 것으로 변형시킨 홍법의 작품은, 익숙함과 기괴함이 한 몸의 이면이며, 그것이 집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유난히 많은 이사를 다녀야 했던 어린 시절, 새로운 집과의 낯선 만남은 기억의 저장고에 쌓여 있다가, 전시를 비롯한 여러 기회를 통해 만나게 된 새로운 공간 속에서 활성화되고 기억(시간)과 지각(공간)이 복합된 산물을 만들며, 관객 또한 그러한 과정을 되풀이하게 한다. 물론 여기에서 되풀이란, 재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은 아무리 강력해도 정확히 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기억’이라는 전시부제는 작가가 기억의 정확한 재현이 아니라, 미지의 생성을 강조함을 알려준다. 기억은 어떤 계기를 통해 촉발되고 활성화된다. 그렇게 생성된 것은 끝없는 연결망을 이루며, 연결망을 통한 공명은 작가 스스로에게도 관객에게도 일어난다.

처음 봤지만 기시감을 주는 것들은 새로우면서도 오래된, 미지의 것이면서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체험을 야기한다. 2007년 사루비아 다방에서의 전시도 그렇고 이번 전시도 그렇고, 작가에게는 개인사와 무관치 않은 특정 공간에 대한 이끌림이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과거가 좋다, 그리로 돌아가자, 그래서 그때를 복원하는데 전력을 다하자에 있지 않다. 생물학자나 고고학자, 또는 정신분석학자와 검(형)사는 지금 여기의 작은 단서들을 가지고 최초의 사실, 현실, 진실 등을 재현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과학적 기법들을 발전시켰지만, 예술가의 경우는 그 방식도 목적도 다르다. 홍범에게 기억을 촉발시키는 지각, 지각을 활성화시키는 기억은 변형, 즉 미지의 것으로 줄줄이 연결되는 생성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러나 아무 바탕이 없는 공상은 아니다. 최초의 실마리는 필요하다. 삶의 다양한 터 무늬가 있는 장소는 특정 기억의 촉발과 전이를 꾀하는 작가에게 그만큼 중요하다.
재현이란 최초, 또는 최후의 지점으로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생성이란 정처 없는 이동과 밀접하다. 너무 잦은 이사에 대한 어린 아들의 불평에, ‘이사가 아니라 여행 다니는 것’이라 대답했던 어머니의 말처럼 말이다. 이러한 이동은 자유로운 유목의 체험이기도 하지만,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악무한의 체험을 야기한다. 이러한 체험은 사루비아 다방에서의 전시 ‘잃어버린 숲’과 미국의 한 숲에서 보냈던 레지던시에서도 반향 된다. 이 자유롭고도 불안한 여행을 합쳐서 미로에서의 유목이라고 해두자. 그의 작품이 주는 체험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건축이나 도시의 축소판 같은 공간 뿐 아니라, 평면작품에서도 미로 속 유목의 특성은 분명하다. 평면과 입체를 불문하고 그의 작품들은 연결 관계가 모호한 형태로 가득하다. 지금은 없거나 알 수 없는 것을 찾고자하는 작가가 선택한 방식은 더듬으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에게 또 다른 프로젝트로 계획되어 있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탐사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오래된 방식이다.

시제의 혼란을 야기하는 부제를 가진 ‘미래의 기억’ 전에서, 기억은 무의식처럼 심층에 내재해 있으며 자아와 초자아의 억압을 뚫고 불현 듯 떠오를 수 있는 무엇이고, 이데아의 세계를 상기하는 영혼처럼 선험성을 가지며, 불교의 세계관처럼 진정한 나는 이전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기억은 과거에만 한정되지 않고 미래로, 미지의 곳으로 뻗어있으며, 증식의 방향은 미로나 뿌리줄기처럼 예측 불가능하다. 전시가 열린 곳이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작가는 접면들을 2차원, 3차원적으로 확장하고, 시간의 차원까지 덧붙여지면서 미지의 장소에 내재된 알레고리적 충동을 활성화한다. 이 모두는 현대도시나 주거공간에서 은폐되어 있거나 억압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꿈이나 고고학처럼 발굴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물론 발굴될 실재 또한 명확한 것이 아니다. 상징(초자아)과 상상(자아)의 세계를 뚫고서 분출되는 실재(무의식)은 언어적인데, 언어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실재와 언어의 관계는 실재를 언어화하려는 작가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언어란 다른 기표와의 차이를 통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기표들이다. 그런데 기표와 대상/기의의 관계는 불확정적이다. 중층적 표면으로 이루어진 홍범의 작품처럼, 기표들은 서로 미끄러지는 관계에 놓여있다. 그것들은 기표에 의해 잡히지 않는 기의가 있음을 예시한다. 언어학과 밀접한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실재계란 기표에 의해 잡히지 않는 기의를 말한다. 홍범의 작품에서 기억이 잠재해 있는 곳은 실재계, 즉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다. 후발자본주의 국가에서 발전에의 욕망은 기억을 억압하곤 한다. 과거는 현재를 선점하고 있는 미래의 가치에 의해 재빨리 지워져야하는 압축성장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에게 지난 시간과 타자의 흔적들은 불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황당한 ‘터 무늬 없는’ 공간에 남겨졌다. 그러나 작가 홍범을 비롯한 어떤 소수는 변화를 위한 변화를 거부하고, 느릿하게 시간이 흐르는 곳을 주목한다.


성장이 유토피아를 추구한다면 그 반대는 헤테로피아를 추구한다. 헤테로피아는 그리드 구조로 대변될 수 있는 근대의 유토피아적 공간과 달리, 얽히고 설켜 있는 세밀하게 분화된 곳, 확립된 시간과 공간 범주들이 탈중심화 된 곳을 말한다. 작가는 현대사회의 뜨거운 핵심이 아닌, 썰렁한 변두리를 찾아다닌다. 스크린처럼 변화하는 도시의 표면을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할 소비 촉진이 아닌, 우리를 되찾는 작업에 활용한다. 시공간을 폭력적으로 압축하는 삶 대신에, 그 과정에서 배제된 균열과 간극을 찾으려 한다. 무의미한 꼴라주가 아닌, 의미 있는 연결망을 만들려한다. 닫힌 총체성이 아니라 열린 총체성을 구축하려 한다. 꽉 채워놓기 보다는 장차 올 것을 위해 비워 두려 한다. 미리 짜여 진 구조와 체계 보다는 과정과 생성을 중시한다. 지금 여기의 지배적 동질성을 파열시켜 이질성으로 흐트려 놓는다. 기원에서 목적을 향하는 단축 코스 보다는, 여러 우회로를 통해 더 풍부한 가치를 일구는 미로 속 유목을 택한다.
홍범의 작품이 걸쳐 있는 이 모든 과정에 핵심적인 것은 기억이다. 특히 그는 첫인상을 중시한다.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벤야민이 낯선 도시에서 어린아이의 첫인상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설명한다. 기억에서 중요한 것은 순진무구의 시절로 간주되는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서 마주친 공간이나 사물들과 독특한 관계를 갖는 어린아이의 방식이다. 아이는 환경과 기능적이 아닌 유희적인 상호관계를 맺는다. 어린아이의 시점이란 동시에 이방인의 시점이다. 이방인은 친숙함과 습관에 방해받지 않고 첫인상을 기록할 수 있다. 특정 개인의 특정 과거를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닌, 미지의 시공간으로 뻗어나가길 바라는 ‘미래의 기억’전은 벤야민처럼 어린이나 이방인, 즉 타자의 시점을 취한다. 그가 이 공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낯선 공간으로 이사 오던 어린 시절의 첫날들을 떠올려야 했으리라.

전시가 열린 오래된 집은 그러한 기억들이 다양한 공간적 흔적들로 남아 있는 곳이다. 뉴욕을 기반으로 작업 활동을 해온 작가에게는 ‘오래된 집’은 어린 시절의 어떤 집들을 연상시키면서도 미지의 장소로서 다가온다. 그곳은 작가에게나 얼마 전까지 그곳에 살던 이에게나 단절의 공간이지만, 이제 작업을 통해 무언가 재생된다. 축축한 곰팡내가 나는 그 장소는 기억과 지각을 동시에 활성화시키는 줄기 세포 같은 것이 증식하고 있다.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에 의하면, 장소란 사람들이 그 곳에서 찾고자 하는 것, 그곳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그리고 그곳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말한다. 어떤 장소가 촉발, 또는 활성화하는 기억은 신축적이고 유동적이다. 벤야민의 방식과 비슷하게, 알라이다 알스만은 기억이 가장 가까운 것을 아득히 먼 곳으로, 그리고 먼 것을 아주 가까운 곳으로 가지고 올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가깝고도 먼 것의 독특한 결합은 아우라가 있는 장소로 만든다. 아우라란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수한 직조물로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지만 먼 곳에서 온 일회적 현상’(벤야민)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아우라 현상은 친숙한 직접성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 다가갈 수 없는 것에서 생긴다. 아우라 속에 내재된 신성은 벤야민에게는 가깝게 느껴지는 느낌이 아니라, 멀고도 낯선 느낌에 기초한다. 다가갈 수 없는 먼 곳과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감각적으로 인지하게 하는 어떤 장소, 즉 회상의 장소는 사실상 현재를 부재와 감각적 현재를 역사적 과거와 서로 얽어 짜는,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수한 직조물’(벤야민)이다. 아우라란 기계복제시대에 사라진 것이기도 해서, 아우라의 사라짐은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에도 큰 변화를 야기했다. 그래서 현대미술은 예술적 체험에 필연적인 아우라를 복구하기 위해 다양한 장소에서 수많은 시도를 해왔다. ‘오래된 집’은 삶의 흔적이 살아있는 장소, 즉 아우라가 있는 장소이고, 작가와 관객은 아우라 속에 감기면서 어떤 기억과 지각이 활성화된다. 그러나 기억과 지각이 어느 순간 어느 강도로 촉발, 유지되는 지는 명확치 않다.

그램 질로크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유년 시절 기억의 복잡한 그물망, 특히 무의지적 기억(순간적인, 무의식적인 기억) 개념은 벤야민의 자전적 저작에 영감을 주었다고 지적한다. 프루스트에게 무의지적 기억은 조정되고 통제되는 정신활동의 의도된 결과가 아니다. 그 기억들은 현재의 감각이 잊고 있던 과거의 경험을 갑작스러운 연상 작용과 인상을 통해 상기시키는 깨달음의 순간에서 흘러나온다. 그래서 프루스트와 벤야민, 그리고 홍범이 찾으려는 ‘잃어버린 시간’은 미래를 향하며 미래로까지 연장된다. 그들은 출현할 사물들을 위해 과거를 회복한다. 회상은 미래를 지향하기에 완성되지 않는다. 그램 질로크가 인용하듯이, ‘기억은 끝나지 않은 순간들에 대한 회상’(스튀시)이다. 과거 또는 미래의 시점이 별자리처럼, 미지의 먼 곳을 향하는 ‘미래의 기억’ 전은 반복적 일상 속에서 새롭고 예측 불가능한 것들의 출현을 유도한다.
'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명멸해가거나 변이를 거듭하는 존재들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0) | 2025.10.29 |
|---|---|
| 유영하는 세계/박영택 (0) | 2025.10.29 |
| 작은 물건의 의미/박영택 (1) | 2025.09.14 |
| 불가능의 가능성 (1) | 2025.09.10 |
| 비린내의 시학 -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2003) (3) | 2025.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