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말하다 / 최재영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다
봄 그늘에 앉아
무심한 바람이 둥글 퍼지고
향기로운 햇살 몇 줌 도르르 구르는 것을 지켜보다
그 아득한 멀미 속을 헤매다가
끓어오르는 절정들을 그만, 복사하다
꽃의 이마는 늘 신열에 휩싸였으므로
뜨거움 속에서 종종 길을 잃다
매번 허탕만 치고 돌아오는 길은
무수한 통점이었느니,
돌아보니 폭풍처럼 지나왔노라고
지나온 길은 단숨에 지워졌노라고
꽃이 닫히는 시점 또한 눈멀고 말아
모든 찰나는 숨 가쁜 적요에 들다
하여 천 년을 피어 있어도 순간이라 기록하다
한나절 봄볕이 붉게붉게 소멸해 가다
그리고 진실에 눈뜬 자들은 이윽고 말하다
봄은, 오늘 또 몇 번의 허구를 재촉하였는가
꽃들이 기울어가는 봄날을 탁본하여 후일을 도모하다
다시 처음인 듯,
파미르 한 줄기 / 최재영
총총 파를 썰다가 도마 위로 번지는
맵고 아린 파문을 본다
파의 원산지는 총령, 파미르 고원이라는데
후생의 늑골까지 두고두고 시려오는
까마득한 설산을 일러 무엇하겠는가마는
오래전 만년설을 뒤덮고 숨차게 파들거렸을
참 멀리서 온 식물의 내막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산맥을 넘고 사막을 건너 서역을 오가는 관문
흰 파꽃의 눈 시린 물결이
지구의 가장 높은 지평선을 그었을 것이다
푸른 대궁을 가르자
팽팽하게 부풀어 있던 파미르 한 줄기
쉭, 바람 소리로 가라앉고
짐작도 못할 높이까지 이르러서야
실하게 속을 채운 것인지
능선의 결마다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아, 저도 모르게 제 근원을 기웃거리며
파랗게 매운 물이 도는 납작하고 평평한 파미르
이 도마 위로 수많은 저녁이 건너가고
파꽃들이 아득한 지평선을 넘어와
익명의 하루에 스며들고 있으니
씁쓸하고 시원하고 짜고 아린 맛이란
빛깔과 형태가 다른 세상의 기복임을 알겠다
골목길 / 최재영
연두 빛 내력들이 제 몫의 봄을 키우느라
햇살을 끌어 모으는 중이다
허공 한구석 팽팽해지고
골목에 나앉은 늙은 여자들
볼우물 가득 생의 이력을 오물거리는지
골목은 하루 종일 분주하다
봄의 한 복판에서 출렁이는
저 환한 푸념들
가지마다 탱탱하게 들어차는 수런거림
한 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
지상과 허공 그 짧은 간극으로
물오른 생의 주름들이 펼쳐지고
음탕한 농담 한 두 마디 건넬 때마다
자지러지게 흩어지는 쭈글쭈글한 웃음소리
잠시 생을 붉게 물들이는
봄날 눈(眼)빛 환한 기억들이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다
담장에 기대앉은 봄 꽃들
한동안 그들이 피워 올린 검버섯을 따라 올라가고
여기 짧은 환희, 봄은 덫이었나.
-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붉은 섬 / 최재영
여자의 하문에 아기가 결려 있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계엄령이 내려졌다
화산섬은 곧 붉게 타올랐고
나는 어떤 언어로도 섬을 읽어낼 수 없었다
여자의 가슴을 철창이 뚫고 지나갔다
중세의 기사가 창검 연습을 하듯이,
한 치의 오차 없이 과녁을 꿰뚫듯이,
지켜보던 나무는 눈과 귀를 닫아걸고 폐문을 작심하였다
철창이 뚫고 간 자리마다 별빛이 들어와 흐느낀다
하얗게 빛나는 뼈들
동백이 울컥, 붉은 문장을 토해내자
걸려 있던 아기가 애벌레처럼 꿈틀거린다
툭, 세상을 뚫고 나오는 소리 없는 울음
섬은
울어보지 못한 울음을 밤새 운다
온몸이 통점일 수밖에 없는 붉은 섬
*
1948년 12월 28일 안인순 할머니의 동서 문씨는 남편 홍씨가
입산하였다는 이유로 출산 도중 하귀특공대에 의해 학살.
가슴 여덟 군데 등 모두 열세 군데를 철창에 찔려 숨을 거둠.
(제주 4․3사건, 시사저널 1998년 4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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