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마루 / 마경덕
마루는 나이를 많이 잡수신 모양입니다
뭉툭 귀가 닳은 허름한 마루
이 집의 내력을 알고 있을 겁니다
봄볕이 따신 궁둥이를 디밀면
늘어진 젖가슴을 내놓고, 마루귀에서
이를 잡던 쪼그랑 할멈을 기억할 겁니다
입이 댓발이나 나온 며느리가 아침저녁
런닝구 쪼가리로 박박 마루를 닦던
그 마음도 읽었을 겁니다
볕을 따라 꼬들꼬들 물고추가 마르던 쪽마루
달포에 한 번, 건미역과 멸치를 이고 와
하룻밤 묵던 입담 좋은 돌산댁이 떠나면
고 여편네, 과부 십 년에 이만 서 말이여
궁시렁궁시렁 마루에 앉아 참빗으로 머릴 훑던
호랑이 시어매도 떠오를 겁니다
어쩌면 노망난 할망구처럼 나이를 자신 마루는
오래전, 까막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눈물 많고 간지럼을 잘 타던 꽃각시
곰살맞은 우리 영자고모를 잊었을지 모르지만,
걸터앉기 좋은 쪽마루는
지금도 볕이 잘 듭니다
마루 밑에 누구의 것인지 찌든 고무신 한 짝 보입니다
조용한 오후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마루에 봄이 슬쩍 댕겨 갑니다
<수필가가 본 시의 세상>
24행의 시어 속에 어쩌면 백 년도 넘었을 세월의 긴 서사를 다 담았다. ‘시골집 마루’를 빌었을 뿐인데 그 긴 인생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눈에 환히 보이듯 그 마루를 거쳐 간 숱한 사람들의 삶이 펼쳐진다. 마루는 여인네들의 삶과 밀접한 탓일 게다. ‘쪼그랑 할멈’이 그렇고 ‘입이 댓발이나 나온 며느리’도 그렇지만 ‘돌산댁, 호랑이 시어매, 영자고모’의 등장에다 마루를 노망난 할망구쯤으로 정(情)스럽게 표현한 것이 그렇다.
그 마루를 들락거리는 것도 그 집안의 여자들이 남정네보다 더 많았을 것이고 마루에 앉아, 바깥만 도는 남편들의 속 썩인 이야기며 속상함도 그 마루에서 풀었을 터였다. ‘시골집 마루’는 볕이 들면 대자로 퍼질러 낮잠 자는 곳이고 어른들 출타 중엔 아이들의 놀이터였으며 모두가 잠든 후면 가슴앓이하는 처녀가 달을 보며 가슴 속 말을 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런 서사를 품고 있는 시골집 마루에 매년 봄이 슬쩍 댕겨간다.
그 마루의 봄을 ‘고무신 한 짝’이 지켜보고 있다. 이렇듯 시를 수채화 한 폭에 요약해서 보여준 시인의 내공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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