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라 말하고 몽(夢)이라 쓴다 / 장미숙
며칠 사이 무르익은 봄이 팡팡 터지더니 집 주위가 꽃 빛으로 찬연하다. 꽃향기가 무연히 퍼지는 오후, 거실 소파에 앉아 두꺼운 책을 펼친다. 햇볕이 숨은 감각을 건드리는가 싶더니 이내 몸이 나른하다. 세상의 소리가 아득해지며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담벼락에 어리는 그림자가 풍성하다. 계절이 바뀌고 있음은 그림자만 봐도 알 수 있다. 은행나무는 허공으로 손을 뻗고 감나무는 밑으로 가지를 늘어뜨린다. 연둣빛 이파리에 살이 오르면서 바람 색깔도 달라졌다. 머잖아 그림자도 짙어지겠다. 자그마한 항아리 서너 개가 허리를 맞댄 장독대 위로 여린 햇살이 가지런하다. 키 작은 꽃들도 물이 오르는지 꽃대가 투명하다.
삽상한 공기가 주위를 맴돈다. 건너편 산을 바라본다. 산등성이 아래 골짜기마다 뽀얀 안개가 차란차란하다. 초여름의 시골 풍경은 물기 머금은 촉촉한 옷감 같다. 도시든 시골이든 아침은 기가 용솟음치는 시간이다. 생각이 돌고 머릿속이 환해지며 무뎌진 감각이 예민해진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버릇은 환경이 바뀌었지만 여전하다.
스트레칭을 한다. 편안한 색의 데크가 놓인 마당 한쪽은 맨손체조 하기에는 그만이다. 팔다리를 쭉쭉 늘여 지난밤의 피로를 털어낸다. 댄스곡이 팔랑팔랑 바람을 타고 담을 넘어간다. 꿈에 그리던 아침 풍경이다.
음악 소리에 잠이 깬 S가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이내 옷을 추슬러 입고 나온다. 그녀의 얼굴에 지난밤 꿈이 매달려 있다. 그녀도 고개를 돌리고 팔을 늘이며 다리를 구부린다. 입에서는 에구구, 소리가 후렴처럼 터진다. 요사이 조금 후덕해진 몸이 보기 좋다.
시골로 내려오니 밥맛이 돈다며 입이 터지도록 상추쌈을 먹는 그녀다. 꽉 짜인 생활에서 풀려나자 게으름을 피우기도, 늑장을 부리기도 한다. 운동을 하다말고 그녀가 장독대 밑으로 달려간다. “세상에, 이것 좀 봐. 어쩜 색깔이 이럴까. 예쁘다.” 그녀답다. 보라색의 낭창한 겉꽃잎 안에 하얀 속꽃잎이 단정한 매발톱꽃이다. 지난해부터 자생하더니 세력을 넓혀 어느새 주위에 군락을 이뤘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 한참 꽃과 눈을 맞추고는 생각난 듯 외벽에 걸린 훌라후프를 든다. 훌라후프를 돌리는 그녀의 얼굴이 점차 발갛게 물들어간다. 허리를 감싸고 도는 동그란 운동기구가 가라앉은 공기를 탁탁, 쳐올린다. 고양이 한 마리가 열린 대문으로 들어오더니 담 쪽에 웅크려 앉아 눈치를 살핀다. 생선 찌꺼기를 몇 번 얻어먹은 녀석이다.
K가 잠든 방은 아직도 조용하다. 창문을 두드리자 그녀가 “끙” 하고 돌아눕는다. 지난밤에도 손뜨개를 했는지 방 한편에 실보무라지가 소복하다. 책상 위는 올망졸망한 뜨개 인형 집합소다. 온갖 동물과 캐릭터, 공주와 왕자 인형도 있다.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잘하는 그녀 방은 소품 가게 같다. 인형들이 사는 나라에서 그녀만 인간 거인이다. 방귀 한 방을 오지게 날린 그녀가 신발을 끌며 나온다. “왜 이리 빨리 일어나냐고. 좀 편하게 살자고.” 늘어지게 하품하는 그녀도 이제 나이가 보인다. 우리는 깜냥껏 자유로운 공간에서 몸의 언어를 풀어낸다.
동쪽 하늘이 발갛게 물드는 걸 보니 해가 곧 뜰 모양이다. 갑자기 K가 흥이 났는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스텝을 밟는다. 엉망진창 막춤에 S가 배를 잡는다. 웃음소리가 소녀 같다. 고양이가 놀랐는지 담벼락을 타고 줄행랑 친다.
한결 몸이 가뿐해진 우리는 곧 부엌으로 향한다. 부엌 중앙을 차지한 동그란 식탁 주위로 세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아침 준비를 시작한다. 야채를 씻는 S, 국물을 준비하는 K, 나는 밑반찬을 접시에 담고 밥을 푼다. 이제는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동선을 파악한다.
아침에 유난히 밥맛이 도는 나에 비해 그녀들의 아침은 간단하다. K가 가게에서 먹을 간식을 준비한다. 그러는 사이 S와 나는 주변을 정리한다. 한 시간 정도 출근 준비가 끝나면 우리는 작은 경차를 타고 시내로 나간다. S가 운전하고 K는 시종일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조그마한 카페다. 세 개의 테이블이 있고 주방 한편에는 작은 휴게공간도 있다. 커피와 각종 차, 샌드위치를 만들어 판다. 샌드위치는 주로 내가 만들고 S와 K는 차와 서빙 담당이다. 처음에 가게를 시작했을 때는 우왕좌왕했다. 경험이 없는 데다 나이 들어서 다시 일한다는 게 쉽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난 지금은 자리가 잡혔다.
평균 나이 예순다섯인 우리는 오랜 친구이고 한동네에서 삼십 년을 살았다. 노후에는 한집에서 지내자며 막연하나마 꿈을 키운 게 시작이었다. 셋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카페를 차렸다. 서로 뜻이 같았으므로 홀가분하게 도시를 떠나 시골에 정착할 수 있었다.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살 집을 마련했다. 원래 있던 시골집을 개조해 방 세 개와 부엌, 화장실, 거실을 들였다. 셋이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마당이 넓어서 텃밭도 만들었다.
처음부터 쉬운 건 아니었다. 성격이며 취향을 잘 아는 사이지만, 한집에서 사는 건 다른 문제였다. 몇 번 와해 될 위기도 넘겼다. 하지만 서로를 필요로 했기에 다시 마음을 모을 수 있었다. 우리는 장사보다 삶의 질을 우선했다. 낮에만 장사하게 된 이유였다. 노후의 취미생활도 놓치지 않았다. K는 그림을 그리고, S는 라인댄스를 즐겼다. 나는 틈틈이 글쓰기에 몰입했다.
일이 끝나면 우리는 함께 경차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변화보다는 주어진 삶에 감사하는 날들이다. 오늘도 가게 문을 닫고 막 출발하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뒤에서 요란한 경적이 울렸다.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나는 거실 소파에 반쯤 기대 있었다. 몽롱한 상태가 한참 이어졌다. 자동차 경적은 계속 울려댔다. 정신을 차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파트 주차장 앞에서 택시가 길을 가로막은 자동차를 향해 빵빵거리는 중이었다. 화단 옆 나무 우듬지에서 일제히 새들이 날아올랐다. 동시에 벚나무에서는 꽃잎이 흩날렸다. 달보드레한 햇빛 아래 꿈꾸기 좋은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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