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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에는... / 김훈

에세이향기 2024. 1. 6. 04:43
지난 11월에는... / 김훈
 


나는 자연사한 새들의 주검을 본 적이 없다. 숲 속의 그 많은 새들이 어디로 가서 죽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내 창 앞 모과나무 가지에서 우는 새도 내가 모르는 어디론지 가서 죽을 것이다. 겨울 철새들은 11월에 날아온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오는 겨울 철새들이 시베리아로 돌아가서 죽는지, 을숙도에서 죽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을숙도 갈대 숲에 새들의 시체는 없다. 그러므로 시베리아의 전나무 숲속에도 새들의 시체는 없을 것이다. 새들은 올 길 갈 길에 하늘에서 죽어서 바다로 떨어져 내리는 것인가. 새들은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면서 날아오고 또 날아오지만, 새들의 죽음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자연사한 벌레들의 주검을 본 적이 없다. 여름 풀밭의 그 많던 벌레들은 다들 어디로 가서 죽는가. 숲을 다 뒤져도 벌레들의 주검은 보이지 않는다.
그 사소하게 바스락거리던 것들은 다들 어디로 가는가. 11월에는 이런 하찮은 운명의 무거움에 마음을 다치기 십상이다. 봄의 어린 벌레들은 가볍고 명랑하다. 봄의 벌레들은 연두색이다. 봄의 어린 벌레들은 풀잎에서 풀잎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여름의 벌레들은 뒷다리에 힘이 넘쳐서 풀섶으로 마구 뛰어 다닌다. 여름 벌레들은 초록색이다. 가을에 벌레들은 햇빛에 그을려 누래진다. 가을 벌레들의 머리통에는 숲 속에서 이리 저리 긁힌 생채기가 나있다. 가을이 더 깊어져서 11월이 끝나갈 때, 벌레들은 야윈 햇볕 쪽에 몰려 있다.
그것들에게도 생애가 있다. 그 사소한 것들도 생로병사와 산전수전을 통과한다. 연두벌레, 초록벌레, 누런 벌레들은 11월에 모두 사라진다. 그것들은 이슬이 마르듯이 사라지고, 주검의 자취를 이 세상에 남기지 않는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것들의 주변에서는 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11월에 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사라진다. 11월에는 이 하찮음 때문에 마음이 다친다. 11월에 죽는 벌레의 임종을 보려고 들판에 나가 보아도 벌레의 주검은 보이지 않고 마른 풀만 서석거린다. 그것들은 본래 없었던 것처럼 가뭇없이 사라진다. 11월에는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자전거를 타고 임진강 쪽으로 나갔다가, 11월의 마지막 나비를 보았다. 늙고 병든 나비였다. 날개가 부서지고 무늬가 망가진 나비였다. 늙은 나비는 메마른 들꽃을 물고 가을바람에 시달렸다. 바람이 몇 번 더 불어오면 들꽃은 땅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바람이 들판을 스칠 때, 나비는 바람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레기처럼 이리 저리 휩쓸렸다. 아, 저것이 내가 기어이 보려 했던 가을 벌레의 임종이로구나······.
나는 오랫동안 나비를 들여다보았다. 나비는 바람에 날개를 뜯기면서, 애초에 바람이었던 것처럼, 바람에 포개지면서 풍화하고 있었다. 나는 나비들이 바람 속에서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죽어서 바람이 되어, 들판 저쪽으로 불어간다.
11월의 억새밭을 자전거로 달릴 때, 몸은 하찮은 몸이다. 몸은 가루처럼 발람에 날린다. 내 백골이 자전거를 저어간다. 생명은 스스로의 결핍 앞에 가지런하다.
11월은 습기가 빠진 존재의 모습을 가차없이 드러내 보인다. 습기가 빠져서 바스락거리는 것들이 11월의 들판에 가득하다. 벌레들의 죽음에서도 그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11월은 말라가고 바래어간다. 갈대와 억새의 죽음에서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11월의 들판은 조용히 바스락거리면서 죽어가는 것들로 가득하다. 나뭇잎이 죽고 벌레들이 죽고 새들이 또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면서 죽을 것이다.
11월의 추위는 살 속으로 스민다. 11월의 추위는 기어이 살 속으로 파고 들어와 살과 친화를 이룬다. 그래서 11월의 추위에는 저항할 수가 없다. 내 몸은 바람 속에서 풍화된다. 살점들이 바람에 뜯겨 나가서 가루가 되어 산화한다. 내 백골이 자전거를 저어간다. 억새도 바람에 끄달리면서 온 들판에 출렁거리며 풍화되어가고 있다.
억새의 뿌리는 땅에 완강히 들러붙어 있고 줄기는 바람에 끌려간다. 땅과 바람 사이가 억새의 삶의 자리다.
억새는 땅에 못 박힌 운명을 거역하지 못한다. 억새는 다만 바람에 몸을 뜯김으로써 그 운명에 저항한다. 흰 씨앗들을 모두 바람이 훑어가면 억새는 못 박힌 자리에서 죽는다.
11월에 연애를 하고 있는 내 친구는 말했다. “11월에 사랑하는 사람들아, 길에서 떨지 말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살을 부벼라”라고. 나는 그 친구에게 대답해 주었다.
“내가 졌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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