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카테고리 없음

비밀 있어요/김산옥

에세이향기 2024. 1. 9. 03:13

 

 

비밀 있어요/김산옥


  나는 누군가의 왼쪽이 그리운 여자에요.
  해서 그대가 언제나 내 오른쪽에 있어주길 바란답니다. 식사를 할 때, 함께 걸을 때,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탈 때도 언제나 그대가 내 오른쪽에 있어주기를 바라지요. 어쩌다 기회를 놓쳐서 그대 오른쪽에 있는 날에는 너무 슬프답니다. 네, 이런 날은 얼굴을 붉히며 그대 입만 쳐다봐요. 수줍어서 말도 못하죠. 대부분 내가 알아서 그대 왼쪽으로 가지만요,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거든요. 그런 날은 그대에게 오해로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더욱 마음이 쓰인답니다. 
  언제가 문인협회십포지엄에 다녀오던 날이었어요. 버스 안에서 어느 멋진 시인과 함께 앉게 되었죠. 난 그의 왼쪽이 그리운데 오른쪽에 앉는 불운을 맞았지 뭡니까. 버스 안이라 너무 시끄러웠어요. 이야기를 하려면 귓속말이 필요했겠죠. 해서 얼굴을 붉히며 고백을 했답니다. 내 자존심에 치명적 손상이라는 것도 무릅쓰고 나는 당신의 왼쪽이 그립다고 고백했지요. 그러나 그는 간절한 내 마음을 외면하더군요. 왜 그의 왼쪽을 원했는지를 알면서도 끝내 왼쪽 자리를 양보하지 않지 뭡니까. 서러웠죠. 더구나 고개를 창가를 돌리고 더 이상 말을 걸지 않더군요. 더 서글픈 것은 어쩌다 묻는 말에 큰 소리로 대답을 하는 것이었어요. 네, 바로 내가 우려했던 대로 나를 장애인 취급을 하더란 말이죠. 작은 속삭임으로 많은 대화를 하고 싶었던 내 엉큼한 속내가 싫었나 봅니다. 그에겐 보낸 프러포즈에 보기 좋게 딱지를 맞는 셈이죠. 네, 그럴 수도 있죠 워.
  나에겐 늘 살갑게 지내는 지인이 있죠. 우리는 늘 함께 있는 시간이 많답니다. 크고 작은 행사에 늘 함께 있다 보니 더욱 그의 왼쪽이 그리웠어요. 어느 날, 고백을 했지요. 그대의 왼쪽이 그립다고 - 그 후, 고맙게도 그는 늘 내 오른쪽에 있어주지 뭡니까. 돌아보면 항상 내 오른쪽에서 웃는 거 있죠. 정말 멋져요. 네, 너무 행복했어요. 고맙기도 하고요. 내 오른팔에 팔짱을 껴주고, 오른쪽에서 귓속말도 해주고,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며 수호신처럼 내 오른쪽에서 지켜주는 거 있죠. 무심코 왼쪽에 있다가도 배시시 웃으며 내가 미안하지 않게 얼른 내 오른쪽에 있어준답니다. 왜 있잖아요, 프랑스 작가이자 비평가인 주베르(J.Joubert)가 '친구가 애꾸눈이라면 나는 그 친구를 옆에서 바라본다.'라고 한 것처럼, 그는 늘 내 오른쪽에 있어줘요. 정말 기분 좋은 거 있죠. 
  뭐라고요, 내 취미가 참 고양하다고요?
  맞아요, 나는 어릴 때 중이염을 앓아 왼쪽 고막을 잃었답니다. 이런 결점을 누가 알까봐 꼭꼭 숨겨왔지요. 조금 불편하더라도 내가 알아서 그대 왼쪽을 택하면 되니까, 큰 문제점은 못 느끼며 살았지요. 이 비밀을 오랜 세월 숨겨온 이유는 누가 알면 장애인 취급 받을까봐 두려워 입 꼭 다물고 살았죠 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앞에서 고백한 그 시인처럼 내 고백에 등 돌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늘 오른쪽을 찾아주는 내 지인처럼 살뜰한 배려로 마음 다독여 주는 사람도 있겠지요.
  언제나 그대 왼쪽이 그립냐고요?
  아니에요, 그건.
  한쪽 청력을 잃었다고 해서 불편하거나 힘든 것은 없어요. 조용한 일상에서 생활할 때는 전혀 불편함을 못 느끼죠. 오히려 오랫동안 한쪽 귀만 사용하다 보니까 청각이 발달되어 멀리서도 들을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영화 속의 주인공 '소머즈'처럼 작은 소리도 예민하게 들린답니다. 다만 시끄러운 곳에서 작은 소리로 속삭이면 잘 들리지 않을 뿐이죠.
  한쪽 귀의 청력을 잃은 덕분에 더 발달 된 것이 눈이죠. 맞아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입만 보고도, 표정만 보고도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앞으로 제 앞에서 조심하세요. 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이 있으니, 함부로 마음 내보이지 마세요.
  이렇게 말을 꺼내놓고 나니 마음이 쓰이네요. 혹여 내가 못 알아들을까봐 큰소리로 말을 한다거나, 애써 마음써준다면 나는 그대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대해주면 좋겠어요. 다만 시끄러운 장소에서만 그대 왼쪽을 살짝 양보해주면 돼요. 아주 조금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요.
  살아오는 동안 내 왼쪽에 앉았다가 상처받거나 오해하신 분들도 참 많으리라 여겨요. 이제 아셨죠? 그것은 고의가 아니었으므로 선택한 실수도 있겠지만, 한 움큼도 안 되는 내 자존심 때문에 빚어진 결과지요. 네, 미안해요.
  이제 고백할게요.
  "나 비밀 있어요. 그대 왼쪽이 그리운 반쪽 여자에요. 나를 위해 그대 왼쪽을 비워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