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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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다듬이 소리/최윤정

에세이향기 2024. 1. 12. 03:15

다듬이 소리 
 
                                                                                                                                   최윤정


 슬하에 육 형제를 둔 시어머님께서는 그 엄청난 빨래감을 혼자서 해내셨다. 내게 힘든 일은 안 시켰지만 푸새질만은 반드시 내가 시어머님 옆에 있어야 했다. 이불 홑니는 흰 옥양목이 으뜸이다. 봄 풀은 누그럼해야 되고, 여름 풀은 세어야 하고, 가을 풀은 개가 핥기만 해도 빳빳해진다고 한다. 푸새질 날은 앞줄 뒷줄 흰 흩니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알맞게 마른 빨래를 넓은 대청으로 걷어 와, 빨래보를 깔고 잔손질을 한다. 솔기를 펴고, 실밥을 뜯어내고, 네귀를 맞춰 둘로 접는다. 그것을 다시 접어 들고 어머니와 나는 줄어든 홑니를 양쪽에서 잡아 당긴다.  

 살짝 살짝, 뒤로 넘어지듯 잡아야지 내 손에서 빨래를 놓치면 어머니가 뒤로 넘어지시고, 너무 세게 잡아 당기면 앞으로 넘어진다. 그 알맞은 당김은 균형을 맞추는 하나의 탄력있는 멋이다.  


 그런 후, 어머니의 눈 짐작으로 팔을 벌려 등분을 하신다. 귀가 딱 맞게 되면 '아들 낳겠다'면서 보에 싸서 밟으라고 하신다. 빨래를 딛고 서면 단숨에 부쩍 키가 커진 듯 높던 천장이 얕아진다. 그때 시어머니를 내려다 보고 이야기를 하자니 건방져서 죄스런 마음이 들기도 한다. 자근자근 십리 길을 갈 정도로 제자리 걸음으로 빨래를 밟아야 된다. 

 
 깨끗이 닦여진 다듬이에 빨래를 올려 놓고 어머니와 마주 앉으면 내 손에 붙는 박달나무 방망이를 주신다. 

  
 또닥 또닥 또닥······딱딱딱, 따다닥, 따다닥 맞다듬이질이 시작된다. 어머니의 손이 높아지면 나도 따라 올라가고 어머니가 빨라지면 나도 빨라지고.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가 높아져야 나도 높인다. 그런데 이것은 다듬이질이 아니라 하나의 가락이었다. 시어머니에게 저런 멋스러운 가락이 어디 있었을까? 한판 가락이 흘러 나오고, 자진머리에서 휘모리로 넘어간다.  


 마치 흥부내외가 박을 타듯 흥겨운 가락과 춤을 덩실덩실 휘젓고 나면 손바닥이 얼얼하다.  


 다듬이 소리는 질감에 따라 다르다. 명주나 양단은 카랑카랑한데 낭랑한 소리가 나고, 뉴동은 포근포근한데, 자근자근 두들기면 구름무늬가 보클보클 살아난다. 명주나 비단은 둥글고 긴 박달나무 홍두깨에 감아 올린다. 딱딱, 빙글빙글 돌아가며 고루고루 두들겨져 구김살이 펴진다.  


 홍두깨살이 오른 비단을 풀어 내리면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부드러운 감촉에 손대기조차 조심스럽다. 

 
 옷감에 정이 묻어 있어 새 것보다 더 정겹다. 이렇게 오지게 다듬고 나면 내 마음은 친정 어머니 생각이 떠오른다. 친정집은 사대가 함께 살았는데 할아버지의 나들이 치장으로 할머니와 어머니의 고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푸새질 때 일손이 딸려 고모나 내 힘까지 필요했지만 본척만척이다. 할머니는 여름이면 빨래줄 곁에서 살다시피 하신다. 

 
 모시 손질은 촉촉할 때부터 올을 골라, 긴 간지대에 꿰어 널어 놓는다. 두루마기는 할머니의 솜씨로 다듬어져서 줄에서도 발을 쳐 놓은 듯 아른거린다. 모시옷이 곱게 다듬어지게 되면 할머니의 얼굴은 햇볕에 벌겋게 타있었다.   


 개어놓은 다듬잇감이 마르니 다리 힘이 센 고모에게 밟으라고 하면 내게 미룬다. 나는 뛰다시피 백번 셀 때까지만 밟고는 내려온다. 다듬이 앞에 고모와 마주 앉으면 어머니를 도와주지 않는 고모가 밉다. 또닥 또닥 딱딱딱...... 힘자랑이나 하듯 두들겨 팬다. 따다닥, 방망이와 방망이가 부딪혀 투단한 소리를 낼 때면 할머니가 달려 오신다.  


 차분하게 마음을 맞춰 조심 조심, 행여 돌 맞힐세라 기쁜 마음으로 두드려야 한다고 타이르신다. 박자가 맞지 않으면 한쪽 방망이를 약하게 두 번 굴려 박자를 맞춘다.  


 다듬이질은 근심이 있을 때나 화나는 일이 있을 때는 어울리지 않는다. 마음이 평온했을 때 차분히 하는 일이다. 청아한 다듬이 소리는 설레임, 기다림, 부풀음, 그리움이 깃들어 있는 듯 하다. 

 
 어릴 적 나는 연년생인 때문에 젖먹이 시절부터 국민학교 입학 전까지 줄곧 외가에서 자랐다. 그때 잠결에 소피가 마려워 마루로 나갔더니, 가을인가? 달빛이 밝아 밤이 파란 색깔이었다. 

  
 멀리서 다듬이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들려오는데 개가 멍멍 짖고 있었다. 불현 듯 어머니와 동생이 그리워 잠을 못이루던 일이 있었다. 낡은 사진을 쳐다보듯 새삼스레 어릴 적의 밤을 떠올린다.  


 하도 다듬이질이 하고 싶어 동생과 빈 다듬잇돌을 두드린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어머니 젖 앓는다"고 하신다. 그때 동생과 나는 어머니 젖 앓을까봐 무척 걱정했던 일이 있었다. 

  
 규방 문화는 다듬이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흥과 가락과 색감이 곁들여진 생활 예술이다.  


 흐리고 얼룩지고 응어리진 감정을 물감으로 순화시키고 숨겨진 예술성, 순수하고 아름다운 끼를, 곧 색채로 표현되기도 한다.   


 낡은 천도 물감을 들이면 새것이 되고 입다 싫증이 나면 다른 색으로 바꾼다. 그리고 거기에 마음의 물감을 함께 들인다.  


 다듬이 소리는 곧 한국의 소리다. 어른을 공경하고 남편을 사랑하는 소리며, 구김살을 펴고 바른 마음을 갖게 하는 소리다. 거친 마음을 부드럽게 순화시킨다. 아마 달님과 별님도 귀를 기울이게 하는 소리일 것이다.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을 몰아내는 기쁨의 소리, 아름다움에 내 마음을 순화시키는 소리다. 구겨진 내 마음도 다듬이 소리에 펴지는 것이다.   


 내게 자랑할 만한 솜씨라면 다듬이질 하나 있을까? 예쁜 며늘아이 맞거든 정서적이고 아름다운 마음이 깃든 내 다듬이질 솜씨나 물려주고 싶다.  


 지금도 잠자리만은 고실고실한 그맛을 잊지 못해서 천연 섬유를 사용한다. 여름이면 삼베, 모시 이부자리는 선풍기, 에어콘 바람보다 더 시원하다. 

 
 고실고실한 그 시원함, 모시는 풀기가 빳빳하고 구김살이 없을 때 날아갈 듯 시원해 보이고 청량감을 준다.  


 또닥 또닥, 하루종일 정성들인 보람으로 광이 나는 흰 옥양목 홑니를 꾸민 이불을 차곡차곡 쌓아 놓으니 부러울게 없다. 

 
 꽃 구름 같은 잠자리에 몸을 눕히니 풋풋한 풀냄새가 매화향기에 취한 듯 황홀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