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바리, 천 년을 잇는다
주초에 압착되어 간다. 균형을 잡아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짓누르는 무게에 굴복하고 마는 두리기둥. 사지의 힘줄은 이미 터져버렸고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다. 한 치 오차 없이 결구해야 한다. 어긋나면 천 년이 위태하다.
보경사寶鏡寺 대웅전이 푸른 하늘아래 시대의 미감을 드러낸다.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인 사찰은 대덕 지명법사가 팔면경을 묻고 금당을 건립한 천년고찰이다. 팔작지붕의 기와와 외부 하중을 직접 받는 선자연의 날렵한 끝선이 받침목인 갈모산방(散防)에서 멎는다. 작도와 치목이 까다로워서 우리나라 전통건축에서만 볼 수 있다는 선자연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한다.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려면 희생이 뒤따른다. 대웅전 네 칸 기둥의 밑동이 세월의 격랑에 결이 갈라지고 패여 드러난 속살이 벌겋다. 지붕을 무던히 지탱해 왔으니 시나브로 속에서 좀이 퍼지면서 천천히 썩어 들어가는 목재의 한계다. 지붕의 하중을 감당하는 추녀가 내려앉을까 대비하여 귀솟음기둥을 임시 방편으로 세워두었으나 얼마나 버틸 수 있을는지. 내연산 삼지봉에서 미끄러져 내린 막새바람도, 12폭포의 물살도 중생의 발걸음마저 진동이 일까 숨죽여할 위기상황이다. 숱한 국난을 겪어 중건을 거듭했으나 세월 앞에 무력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법당 뒤편 기둥은 주춧돌과 맞닿은 밑동을 덧댄 흔적이 역력하다. 사람의 척추처럼 중심을 잡아줄 동바리로 교체한 것이다. 건물 기초를 세우는 곳에서는 박힌 철골이 움직이지 않게 하고, 굴을 팔 때는 무너지지 않도록 지지하거나. 붕괴를 막기 위해 설치하여 대들보나 다름없는 동바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제 가치를 보여주는 숨은 행자를 만난 듯 의미롭다. 법복을 입지 않았으나 공력을 쌓아가는 젊은 수행자임이 분명하다.
목조 건축의 자존감은 기둥이다. 한옥에서 집채를 온전히 떠받치도록 온 힘을 실어주는 것이 기둥이거니와, 사찰에서는 잘 다듬은 숙석이 아닌 주변의 자연석을 구해 와서 공력으로 놓는 덤벙 주초가 제격이다. 자연 그대로를 중시한 큰스님의 정신이 무위자연에 있음을 암시한다. 문득, 기둥의 소임이 비희라 불리는 귀부龜趺와도 화응한다는 생각이 스친다. 땅에 쿡 박힌 미물이 운명에 순응하며 눈에 띄지 않게 역할을 다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먹먹하고 뭉클하다.
두리기둥이 위태로우니 동바리가 몸을 부린다. 기둥의 교체시기를 나무의 색과 갈라진 틈새의 간격으로 간파해 내는 대목장의 노련한 솜씨를 엿본다. 썩어가는 기둥의 일부를 잘라내고 복된 기운을 이어갈 새 소나무로 동바리를 만들어 결구했다. 그가 대들보가 될 나무를 만났을 때 삼배하고, 치목治木한 나무로 첫 기둥을 박기 전에 대들보와 한 몸이 되도록 매끈하게 대패질을 하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손끝으로 옹이진 무늿결에 음각과 양각으로 연꽃을 새기며 무한 안전과 믿음으로 침묵의 기도를 올리던 모습은, 절 마당을 지긋이 굽어보던 노승의 혜안에 비견할 만하다. 그가 노송을 만나 드리는 삼배로, 자귀질하는 노련함으로, 목조건축은 엄숙한 기운을 품는다.
사람도 동바리 교체 시기가 있다. 팔순 노모는 몇 년 전 걷기가 불편해지자 양 무릎을 인공관절 시술을 받았다. 서른 중반부터 삼십 여 년 동안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느라 쉴새없이 일만했다. 아버지가 하다만 쌀가게를 열었지만 장사가 처음이라 힘든 일은 고사하고 여섯 자식의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으니 고생담은 이루말로 다할 수 없다. 쌀 배달을 하느라 30도를 웃도는 여름이나 찬바람이 피부를 파고드는 겨울에도 어머니의 이마에는 땀이 마를 새가 없었으니 무릎은 더욱이 성할 리가 없었다.
갑자기 한 집안의 가장이 된 어머니, 한 여인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시간. 쌀 포대를 이고 지고 계단을 종종걸음으로 다녔으니 탄탄했던 무릎관절이 그 무렵 다 닳아 없어진 것이다. 집안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가장의 책임감을 어린 자식들은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자식이 저마다 제 역할을 하도록 부끄럽지 않게 키워야 한다는 부모의 역할이, 단단했던 어머니의 무릎에 금이 가게 한 것이다.
목조건축에서 대들보가 금이 가고 패이면 시간을 지연할 수 없듯이,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다. 장성한 자식들이 노모를 대신해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때가 온다. 듬직한 장손이 동바리가 되어 노모의 근심걱정은 사라졌으나 육신은 연일 병원신세다.
사찰이든 사람이든 제구실을 하려면 동바리 교체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사람도 후대를 이어 나갈 자손을 키우고 돌보는데 소홀히 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두리기둥은 지탱해 줄 동바리 덕분에 남은 세월도 흔들림 없는 부동자세로 나약한 인간의 기도를 부처님께 전할 것이다. 노장다운 혜안과 뚝심을 배워 처마가 기울지 않도록 힘쓰는 동바리가 묻는 듯하다. 자신을 갈고 다듬어 쓰임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속俗과 성聖의 분명한 경계선에서 머뭇대는 중생의 의지를 되묻고 일깨운다.
천년고찰의 유유한 자태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전란의 역사가 새겨진 주초에 몸을 밀착하여 한 치 오차가 벌어질까 노심초사하는 자, 큰스님의 불경에 귀를 열어 우주의 이치에 대하여 귀동냥하는 자. 기둥의 고단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꼿꼿이 설 수 있도록 힘의 균형을 잡아주는 소임을 결코 잊지 않는 자. 쉽지 않은 정서적 교감이다. 새로운 천 년을 이어갈 동바리의 책임이 막중하다. 기둥과의 합合을 묵묵히 이루어 낼 것이다.
숙명을 알고 따르는 것은 남다른 고행苦行이다. 해를 묵어갈수록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본분을 행하는 묵시적 깨우침을 새기며 일주문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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