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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날의 평범한 이야기/허창옥

에세이향기 2024. 1. 9. 03:27

평범한 날의 평범한 이야기

 

                                                                                                                                    허창옥

 

  친구는 지금 한 시간째 이야기를 하는데 끊어지는가 하면 이어진다. 나란히 앉아 있으므로 나의 시선은 그의 옆얼굴에 머물러 있다. 그의 얼굴은 단아하지만 좀 지쳐 보인다. 그는 갈색 주름스커트에 아이보리색 반소매 니트를 입고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있다. 검소하나 세련되어 보인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척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몇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범어로터리의 횡단보도는 길다. 따라서 신호등이 바뀌는 시간도 길다. 인도의 횡단보도 사이에는 그래서인지 조그만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은행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백 년 수령, 수피는 거의 다 벗겨졌고 세월만큼 옹이도 깊게 패였다. 하지만 잎사귀들은 싱싱한 초록이다. 돌에 새겨진 나무의 내력을 읽다보니 신호등은 다시 빨간색이다. 등나무 그늘로 들어가려다가 거기 놓인 통나무의자에 앉아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잠시 수다스럽게 인사를 나누었다. 왜 여기 앉아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냥 앉아 있다고 했다. 찻집에 가지 않겠냐는 나의 말에 ‘여기도 좋은데 뭘’ 그가 대답했다.

 

  그날 일을 잊을 수 없어. 오늘처럼 이렇게 하늘이 흐린 오후였어. 아버지가, 어디선가에서 갑자기 나타나더니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았어. 어찌어찌해서 아버지를 밀치고 도망을 치는데, 엄마가 그렇게 잘 달리는 줄 몰랐어. 그렇지만 아버지가 더 빨랐어. 대문을 나선 엄마는 논두렁을 달리다가 미끄러졌고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논배미에다 처박았어.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가면서 머리카락을 몇 올을 건드린다. 목소리들이 지나가고, 파란 플라스틱 슬리퍼도 찌이익찌이익 소리를 내면서 내 구두코 앞을 지나간다. 문득 ≪인생은 지나간다≫란 구효서의 산문집 제목이 생각난다. 그렇지, 인생은 지나가는 것이지. 그것이 아무리 신산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지나가게 마련이지.

 

  아버지는 노름 밑천이 떨어지면 들어와서 엄마를 두들겨 팼고 그게 무서워서 엄마는 되는 대로 돈을 마련해 주는 생활이 계속된 거야. 더 이상 엄마도 돈을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단을 내려야했던 게지. 그날 밤, 고래고래 고함치던 아버지가 잠들었을 때, 엄마가 젖먹이를 업더니 살며시 방문을 열고 나가는 거야. 바로 그전에 엄마는 나와 동생들- 여동생이 둘 더 있었잖아- 을 번갈아 가며 뺨을 어루만지고 머리를 뒤로 쓸어주었어. 그때 엄마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았거든. 그 때문에 이상한 낌새를 알아챌 수 있었지.

 

  일터로 돌아가야 했기에 나도 모르게 시계를 만지작거린 모양이다. 그가 너 가야하는 거 아니야고 묻는다. 아니라고, 괜찮다고 나는 시치미를 뗀다.

 

 엄마가 대문까지 가기를 기다렸다가 나도 고양이처럼 소리내지 않고 일어났어. 하늘에는 달무리가 떠 있었고 별은 보이지 않았어. 동구 밖을 지나면 커다란 못이 있었거든. 엄마가 거기로 가는 거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 거기까지 꽤 먼데 그 캄캄한 길을 어떻게 따라갔는지……. 아마 나도 제 정신이 아니었을 거야. 못가에 주저앉아 있는 엄마를 숨도 안 쉬고 지켜보았어.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한참 만에 엄마가 못 둑의 경사면으로 느리게 내려가는 것 같았어. 엄마! 세상에 태어나서 그만큼 크게 엄마를 불러보긴 처음이었어. 내 목소리가 하도 커서 나도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거든.

 

 그만 일어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꼼짝 않고 앉아 있다. 그의 야윈 손에 가 있던 시선을 거두어 위를 쳐다본다. 짙푸르게 우거진 잎사귀들 사이로 군데군데 동전만 하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잔뜩 흐린 날인데 작은 틈으로 난 하늘은 맑은 것처럼 보인다. 동전만 한 하늘 몇 조각을 보면서 생각한다. 희망은 저렇듯 작은 틈으로 쏘아주는 빛살 같은 것일 거라고.

 

  엄마는 화들짝 놀라더니 일어나서 나를 껴안았어. 내가 큰 소리로 우는 바람에 업혀있던 동생이 깨서 막 울었어. ‘야들아 와 이래 우노!’ 그러면서 바람 쐬러 나왔다고 집에 가자고 하더라. 엄마 손을 꼭 잡고 집으로 가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입술만 떨리고 말이 나오지 않았어. 그날 밤부터 며칠 동안 나는 몹시 아팠어. 내 이마에 물수건을 얹으면서 엄마는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고맙다는 말은 여전히 내 입 속에서 우물대고 있었어. 아홉 살 때였지. 우리 어머니, 정신을 놓았다 잡았다하며 여태 살아 계시거든. 지금은 무엇 때문에 사실까.

 

 

 그가 나를 보고 웃는다. 일상적인 미소다. 마주보고 웃음 지으며 나는 속으로 말한다. 누구든 무엇 때문에 살지는 않아. 그냥 사는 게지. 저 은행나무도 그냥 견디며 살아왔을 거야. 그의 손을 잡는다. 손이 따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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