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바람이 불었다 / 장미숙

에세이향기 2025. 11. 9. 10:25

바람이 불었다 / 장미숙

 

 

서서히 바람이 일어났다. 숲의 나무들이 일제히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가지들이 몰려왔다 몰려갔다. 도드라진 가지 하나가 창문 쪽을 향해 있었다. 끝에 타원형의 이파리가 달렸는데 다른 잎과 달랐다. 유독 크고 무늬가 선명했다. 아직 초록에 이르지 못한 연둣빛이었다. 잎맥이 빗금처럼 새겨진 게 또렷했다. 잎자루 끝에 매달려서 대롱거렸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흔들리는 이파리를 가까이 보려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곳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근처에 숲이 있고 숲에 속한 나무라는 것밖에 알 수 없었다. 그 공간에서 나는 무언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을 맞고 있었다.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함 앞에서 골몰하다가 창문을 연 것이었다.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 이파리 하나가 유독 크게 흔들리는 걸 발견했다.

서로를 의지하는 다른 잎과 달랐다. 이파리를 바라보다가, 아니 의미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혼은 육으로 돌아왔다. 눈을 떠보니 새벽 세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늘 깨어나는 시간이지만 생소했다. 어딘가를 혼자 헤매다 돌아온 듯 아득하고 몽롱했다.

밖에서 들어온 인공 빛으로 거실이 희붐했다. 창가에 놓인 화분에도 희미한 빛이 닿았다. 거실 바닥에 금전수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초록 물이 한껏 올라 손으로 누르면 터질 듯 생기로웠다. 이상했다. 이렇게 절정에 이른 이파리가 왜 떨어졌을까. 한창 피어올라 빛을 발해야 할 때 오히려 생을 버린 이파리가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창밖을 보았다. 그믐달이 사각의 아파트 모서리에 걸려 있었다. 도시의 새벽이 밝다 보니 오히려 가로등이 달을 도드라지게 했다. 달은 선명한 무늬가 되어 하늘에 그림인 듯 떠 있었다. 한 사람의 얼굴이 희미한 빛 사이로 떠올랐다. 간밤 잠들기 전, 어떤 생각 속에 사로잡혔는데 생각이 나를 이끈 건지 내가 생각을 붙잡았는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모두 잊어버렸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아니다. 한 번쯤은 다시 맞닥뜨릴 안타까움이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아들이 내게 결혼 의사를 밝힌 게 며칠 전이었다. 그동안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결혼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해 보였다. 아들의 상대가 맘에 들었던 나는 내심 기다리고 있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더 마음이 달떴는지도 모르겠다. 아들이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룬다는 게 뭐 그리 대수이랴만 결국 내 마음은 한 사람에게로 가 닿았다.

그가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지 35년이 지났다.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싸하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체온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주검이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을 이기지 못하고 차갑게 식어버린 육체였다. 영원히 감겨버린 눈, 다시는 숨이 나오지 않을 입, 세상의 냄새를 맡지 못할 코, 그의 얼굴은 돌덩이처럼 차가웠다. 따뜻했던 팔은 기능을 잃어버리고 뻣뻣했다. 숨을 놓아버린 지 하루가 지났으니 당연했다.

한창 초록으로 치달아야 할 목숨이 연두에서 그만 멈춰버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가 끝내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툭 떨어져 버린 걸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를 땅속으로 보내고 난 뒤 정신을 잃고 풀밭에 쓰러졌다. 그때 아들은 언니 품에 안겨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아들은 그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안겨보기는커녕 그의 존재조차 모른 채 살았다. 홀로 된 큰아버지를 아버지로 알고 산 아들은 부모가 이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아무도 아들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이미 다른 삶으로 떠밀려버린 나는 이방인과 같았다. 그게 아들에게 이로울 거라고 최초로 생각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나에게는 어떤 권리도 허용되지 않았다. 모든 걸 담담히 받아들였다. 세월이 흐른 뒤 아들은 자신을 돌보지 못한 나를 조금은 이해하는 듯했다. 억지로 가까워지려 애태우지 않았다. 강요 같은 건 더더욱 할 수 없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맡기고자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아들은 반듯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 했다. 여자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신뢰가 담겨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나의 의사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모든 걸 그들에게 맡겼다. 두 사람의 선택을 믿고 존중했다.

결혼 날짜를 말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전해주던 날, 종일 그를 생각했다. 짧은 기간을 함께했지만, 그는 내게 자신이 살지 못한 삶까지 맡기고 떠났다. 감당할 수 없는 날들이었다. 혼미한 상태로 며칠을 지냈다. 눈을 뜨면 그의 모습을 찾아 헤매고 눈을 감으면 심연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일 년 동안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안고 누워지냈다. 눈자위는 시커멓게 변하고 볼은 꺼지고 피부는 거칠어졌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는 할머니 손에서 순수한 눈망울을 굴리고 있었다.

달동네 꼭대기에 있던 낡은 집, 바람이 문짝을 물어뜯고 허름한 담벼락에 부서지던 달빛을 기억한다.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이십여 분 올라야 당도하던 가난한 동네였다. 바람에 겨우 버티던 집에서 아이는 할머니와 살았다. 아이를 보고 온 날은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한 사람은 점점 현실의 삶에서 멀어졌다.

그러다가도 한 번씩 신열을 앓았다. 아들이 커갈수록 더했다. 그는 언제나 내게 젊은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이제 막 삶의 물이 오르기 시작하던 서른한 살, 연두에서 초록으로 가던 시기였다. 젊음이 가장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영원히 가지를 놓아 버렸다.

늘 비슷한 꿈을 꾸곤 했다. 그의 형체가 아닌 전혀 다른 형상 속에서 그를 느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바람을 타던 나뭇잎도 그랬다. 어쩌면 그게 마지막 인사였는지도 모르겠다. 떨어질 듯 말 듯 매달려 있던, 유독 도드라진 잎이었다. 이젠 안심하라고 손이라도 흔들어 줄 걸, 깨고 난 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꿈은 지나고 나면 더 생생해진다. 한참 동안 커다란 이파리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거실에 떨어진 잎을 주워 화분의 흙을 파고 묻는다. 그 사이 어둠이 걷히고 멀리 산등성이가 여명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백꽃, 그대/고경서(경숙)  (0) 2025.11.15
내력벽 / 윤이나  (1) 2025.11.09
다랑논/ 목성균  (0) 2025.11.09
흑적/ 송명화  (1) 2025.11.07
간이역 그 여정旅程/정태헌  (0) 2025.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