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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내력벽 / 윤이나

에세이향기 2025. 11. 9. 10:30

내력벽 / 윤이나

 

부엌으로 들어갈 때 툭, 거실로 나올 때 탁, 몇 번이고 몸을 막고 갈개꾼처럼 훼방을 놓는다. 액자를 걸고 화분으로 막아도 헛일이다. 부딪힐 때마다 눈을 흘기고 발로 걷어차 본다. 언젠가는 저 벽을 없애리라 다짐하고 내내 날을 별렀다.

날을 잡아 철거 회사에 전화한다. 업체 직원이 집안에 들어서며 벽에 부딪혔다. 이건가요? 내력벽이라 안 됩니다. 내가 미주알고주알 이르기도 전에 나온 답은 벽만큼 단호하다. 내력벽은 신고나 허가가 있어야 철거할 수 있단다. 잘못 건드려 집이 무너지면…. 뒤탈이 무서워 작심을 눌러 앉힌다. 예상했던 일이 빗나가 한껏 부풀었던 기대가 실망감으로 변한다.

차 한 잔으로 울적함을 달랜다. 탁 트여 널따란 거실을 상상한다. 거실이 한눈에 펼쳐지며 아침 햇살이 막힘없이 들어와 길게 눕는다. 부엌까지 바짝 다가와 속살거린다. 볕살에 노랗게 익은 부엌에서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밥을 짓는다. 싱그러운 바람이 곧장 달려와 간지럼을 태우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천장을 휘돌아 가라앉는다. 차 한 모금을 머금다가 가만히 삼킨다.

결혼생활은 서로를 알아 가는 과정이다. 남편은 듬직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평이 났다. 처음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좋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속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에 몹시 답답했다. 표현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 꼭 말로 해야 하냐면서 대신했다. 그러면서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며 투덜거렸다. 성격 다른 둘이 부딪히며 이해도 양보도 비껴갔다. 장단이 맞지 않아 불협화음도 났다.

호흡을 길게 하고 말을 조심했다. 작은 샘은 고요했다. 이따금 잔잔한 물결이 일고 그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비치었다. 매일이 즐거워 평안한 기운이 가정에 오래 깃들기를 바랐다. 누구의 시샘일까, 잔잔하던 물결이 넘칠 듯이 출렁이고 감정을 참지 못해 가슴이 뒤놀았다. 속을 드러내기 싫은 남자와 속을 감추지 못하는 여자 사이에 답답한 벽이 가로막았다.

내게 남편은 장벽이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았다. 한 번 아닌 것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아닐 것처럼 단단히 벽을 쳤다. 매번 내가 흔들고 내가 흔들렸다. 그의 내면에는 요즘과 맞지 않는 낡은 사고가 노박혀 있었다. 행동과 예절이 원리원칙을 따랐다. 유림의 자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사에 체면과 격식을 차렸다.

그런 그가 때로 나를 일깨웠다. 나는 감성이 이성보다 앞섰다. 울고 싶을 때 울고, 하고 싶은 일은 해 봐야 직성이 풀렸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열 가지 이유 앞에서 무너지기 일쑤였다. 무조건 참고 오래 생각하는 남편은 달랐다. 세상에는 참을 일도, 생각할 일도 많다는 걸 묵묵히 보여 주었다. 서서히 남편의 지원에 익숙해지고 가끔은 든든한 그 등 뒤에 숨어서 안정을 찾았다.

사춘기 아들이 아빠를 찾을 무렵이었다. 남편이 취미로 시작한 골프에 재미를 붙이더니 쉬는 날이면 필드에 나가고, 짬만 나면 실내골프장에 갔다. 손이 필요한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내아이 둘 사춘기를 감당하기 어려워 도움을 청해도 미루기 바빴다. 아이들에게는 아빠가 내게는 옆자리가 텅 비었다.

몇 해를 그렇게 보내니 미운 구석만 눈에 띄었다. 얼굴이 사방으로 뻗친 햇살에 그을려 구릿빛으로 변했다. 평소와 다른 행색이 낯설고 밥도 못 먹은 사람처럼 맥없는 모습에 화가 났다. 부부 사이의 정도 메말라 스치기만 해도 서걱거렸다. 내 눈치를 살피며 나갈 궁리를 하는 남편을 보면서 든든함이 사라졌다. 한 지붕 아래 살아야 한다는 형식을 깨고 싶었다. 그러나 자식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눈에 보이면 보이는 대로 안 보이면 또 그대로 속이 들끓었다.

지인을 만나 위로를 구했다. 외려 남편을 이해하란다. 남편은 가족을 위해 진학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직장을 선택했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하고 싶은 것을 못 했으니 내가 봐주라는 것인가. 괜한 심술을 내고 돌아왔다. 하긴 남편도 쉬고 싶었을 것이다. 이쪽 어깨에는 가장 저쪽 어깨에는 직급, 두 무게를 감당하려고 얼마나 용을 쓰며 버텼을까.

남편은 의지가 강했다. 자신은 꿈을 포기했으나 지식의 미래는 달라야 한다고 결심한 사람이었다. 한눈팔지 않고 한 직장에서 사십 년을 견뎠다. 한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부모님과 동생들, 우리 네 식구까지 아홉 명이나 되었다. 가족의 무게가 상사의 말에 몸을 낮추고 언걸에도 대꾸하지 못하게 짓눌렀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양어깨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문득문득 앞이 깜깜해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짐을 벗어놓고 자유로운 곳으로 도망도 가고 싶었다. 내게서라도 위로받고 싶었을 테다. 그 속을 알 리 없는 나는 말끝마다 날을 세웠다.

제자리를 지키는 남편을 본다. 세월 이길 장사 없다더니, 힘에 부친 기색이 역력하다. 요즘 들어 쉽게 지치고 자주 탈이 난다. 스스로 채근하며 달려온 몸, 중력을 버틴 꼿꼿한 허리는 고장이 나고 어깨는 기울었다. 탄틴하던 무릎은 닳아 삐걱대고 피부는 푸석해졌다. 이따금 남편의 등에 찜질팩이 올라가고 어깨에 파스가 붙는다. 어디 몸뿐 이랴. 청춘의 끓는 피는 삶에 묻혔고 굳은 심지도 삭아 예전만 못하다.

세상에는 사람들 앞을 가로막는 벽이 많다. 스스로 벽을 치는가 하면 사회나 주변 환경으로 인해 높은 벽에 맞닥뜨린다. 한동안 나는 남편이 내 앞을 가로막는 장벽인 줄 알았다. 그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피하지도 않고 한결같았다. 삼십여 년 살아 보니 막는 벽이 아니라 가정을 지키려고 버티는 벽이었다.

탄탄한 벽도 오래되면 낡아 부서진다. 이리저리 치인 모서리는 깨지고 금이 간다.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버틴 남편의 등 어디쯤 균열이 생겼거나, 다리 어디쯤에선 우둑우둑둑 소리가 들렸겠다.

아침, 남편이 베란다 창문을 연다. 지금, 저기에 어깨가 조금 처진 내력벽 한 사람이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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