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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그대/고경서(경숙)

에세이향기 2025. 11. 15. 05:45
동백꽃, 그대/고경서(경숙)
 
섬 안의 섬.
  뭍에서 보면 기다림으로 뒤척이는 처녀 같고, 섬에 오르면 처녀를 연모하는 혈기 방장한 총각이다. 아니다. 갯바위를 움켜쥔 파도 소리에 머리채 뜯긴 채 뭉개진 잇몸으로 외로움을 삭이는 노모다. 앳된 처녀의 꽃다운 청춘이 물거품 게워내듯 옛정을 품었는가. 뜨거운 피를 토하지 못해 시퍼런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검버섯 핀 세월에서야 뒤돌아보는 먹먹한 그리움. 바람의 헛기침에도 하얗게 부서진 몸을 깎고 또 깎아낸다.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바람기로 훌쩍 떠나버린 해풍을 기다리다 지친 가슴이 동백꽃을 피워 올린다. 활활 타오르는 꽃의 심장들.


  동백꽃.
  가히 절정이다. 나뭇가지 층층마다 수만 송이 꽃이 피고 진다. 풍향을 알 수 없는 꽃샘바람이 기별도 없이 찾아든다. 밀밀한 숲은 이들이 전하는 안부로 수런거린다. 까칠한 볕살도 내려선다. 침침한 꽃그늘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목곽분의 내부처럼 음산한 기운이 목덜미를 낚아챈다. 예전엔 동백꽃만 보였는데 오늘은 꽃그늘도 흐벅지다. 가풀막에서 자란 나무일수록 밑둥치가 굵고 옹이도 많다. 울끈불끈한 옹이는 풍상을 견뎌낸 상흔이다. 식물도 고단하고 억척스러우면 꽃과 열매가 더 많이 맺히나 보다. 붉디붉은 나무의 상처들.
  꽃의 바다로 첨벙, 뛰어든다. 꽃불을 켜든 채 그늘을 밝히는 꽃송이들. 햇살 한 켜, 바람 한 켜씩 차례로 껴입은 선홍빛 치마 한가운데 돌기인 양 솟은 샛노란 암술이 뇌쇄적이다. 활짝 핀 꽃보다 봉곳이 말린 꽃송이일수록 눈을 뗄 수가 없다. 진녹색 두터운 이파리도 바다 물빛으로 유약을 덧바른 듯 윤기로 번들거린다. 빨갛고 파란 원색의 숲과 갯바위에 흩어지는 흰 포말이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바람이 조심스레 열어젖힌 꽃봉오리에서 살내가 후끈 끼친다. 합일의 순간이다.
  동백꽃은 필 때보다 뭉텅뭉텅 질 때가 더 아름답다. 이는 잠시 후나 며칠 뒤에 땅 위로 자진(自盡)하듯 몸을 던지는 후일을 몰라서이기도 하다. 열정을 지속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애상이랄까. 제 모가지 꺾는 데도 추호의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다. 지축이 잠시 흔들리면서 허공은 빗금을 긋는다. 발밑에 꽃그늘만 움푹움푹 파였을 뿐이다. 즐겨 입던 옷을 벗어두고, 제 스스로 화관을 만드는 꽃들은 나무로서도 속수무책이다.
  벚꽃은 살점을 잘게 찢어 흩뿌리고, 목련은 제자리서 물기를 말리며 시든다. 그런데 동백은 통째로 떨어져 눈을 감지 못한 채 한 번 더 생명의 불꽃을 피운다. 처절한 비장감마저 감돈다. 입 밖으로 발설하지 못하는 이별일수록 속울음이 짙다. 엽맥에 새긴 못다 한 말과 하지 못한 말 사이에서 숨겨둔 마음이 자주 들킨다. 이때 감정 정리가 빠르면 냉정하고 야멸치나 그렇다고 늦어도 미련이나 애착으로 보이진 않는다. 배롱나무의 활활 타는 불길에 비하면 속절없이 짧아서다. 생명이 소진한 꽃을 손으로 집어 들자 미세한 통증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짧아서 아름다웠던 생.
  동백꽃을 음표로 삼은 동박새의 노래가 들린다. 숨어 있어 신비롭다. 연가인지 비가(悲歌)인지 노랫말은 알 수 없으나 탁음이다. 노래가 아니라 숫제 우짖는 소리다. 선홍빛 울음이 꽃그늘을 누른다. 땅 위로 흘린 구멍을 끌어안은 나무는 목관악기인가.
  빨강은 감정 소모가 많은 격정적인 사랑이나 광기로 파국에 이르는 예술가의 생으로 회자되는 색이다. 배 한 척 없는 바다와 동백 숲을 번갈아 보는 홍채 속에 한 여인의 실루엣이 겹쳐진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바다에 투신한 연인들.
  수평선 너머가 현해탄이라고 했다. “마냥 소리쳐도 말이 안 되는 바다/마냥 부대껴도 춤이 안 되는 바다.”라고 읊은 이성복 시인의 바다도 이랬을까. 칠흑 같은 밤, 일본을 항해하던 관부연락선에서 낙화하듯 바다로 몸을 던진 한 성악가의 못다 피운 정념의 불꽃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당대의 인습과 제도에 묶여 침몰할 수밖에 없었던 비련의 주인공들이다. 죽음을 암시한 듯 불렀던 <사의 찬미>는 영원히 가질 수 없었던 생명의 소네트이다. 비탄의 노래일수록 구성진 음색이 입술에 착착 감기지만 박자나 음정을 조금만 놓쳐도 아릿한 통증에 휘말려들 수밖에 없다. 산산이 깨지고 싶은 파도가 내 안의 바위섬을 때리고 또 때린다.
  동백꽃은 심해에 수장된 이들의 화신인가. 바다가 잠잠하다가도 수시로 바람기를 드러내는 건 불온한 사랑을 애도하는 몸짓일까. 철썩, 철썩, 쏴아 쏴…. 해안을 후려친 하얀 물보라가 진혼굿을 펼치는 무녀가 손에 쥐고 흔드는 희디흰 명주 수건 같다. 그녀의 춤사위로 해안선이 살아 꿈틀거린다.
  해가 울컥울컥 바다로 떨어진다. 바다와 하늘이 질펀하게 몸을 섞는다. 역광으로 비친 낙조가 수평선을 밀어낸다. 낭자한 핏빛이 농담으로 번져가는 모양새가 사랑을 속삭이는 처녀의 홍조 띤 낯빛 같고,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노모의 설움 같기도 하다. 마지막 열기를 식히던 볕뉘가 물러가면서 자맥질하던 물살을 거둬갔는지 사위가 조용하다. 하늘과 바다가 서로의 상처를 어둠살로 봉합하고 있다.


  지심도.
  극진한 마음이다. 가슴속 뜨거운 응어리가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그리움이다. 낙하하는 동백꽃도, 일몰에 선 태양도, 우는 동박새도 다정했던 바람과 결별할 때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이곳의 불문율이다. 지고지순한 노모가 피워 올린 정념의 불꽃들. 한 송이 한 송이가 단심이다. 눈물조차 말라버린 격정과 회한으로 생모가지 꺾는 이별도 모자라서 고샅길에 나앉아 바다를 에둘러 울타리까지 쳤을까.
  긴 해식의 세월에 수없이 피고 졌을 꽃들이 열매를 맺는다. 가없는 눈빛이 익힌 열매로 꾹꾹 눌러 짠 기름을 백발에 바르면 젊은 날의 윤기 흐르던 봄날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뼛속까지 찬 정한을 밀어낼 수 있을까. 울어라, 실컷 울어라. 이 절해고도에서.
바람아!
  여기저기 함부로 뛰어내리는 저 꽃들, 어쩌자고 애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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