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환의 문장을 본다. 붉음은 거역할 수 없는 어명과도 같은 단호함이다. 광택을 잃은 것들의 반란은 귀환의 문장에 서서히 진압된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스며 있는 오래된 쇠락의 시간을 목도 한다.
막다른 골목 끝에서 두 번째 집. 페인트가 벗겨져 군데군데 녹슨 자국이 얼룩처럼 번진 대문이 주인의 오랜 부재를 말해준다. 여러 번 덧칠한 페인트는 감자껍질처럼 일어나 바스러진다. 어스름 해가 질 무렵이면 취객의 발길에 영문도 모르고 멍들었던 대문이다.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빈집은 폐허처럼 허물어졌다. 철문을 밀고 들어서니 혀 굽은 취객의 황성옛터가 기억 속에 가물거린다.
녹슨 철 대문에서 고난의 역사를 본다.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음을 한탄하며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의 거친 발길을 묵묵하게 견디어 내던 시간이 있다. 속절없이 날아 가버린 문고리는 아침이면 망치 두드리는 소리에 다시 제자리에 매달렸다. 아버지의 연장통 안에 있던 찌그러진 문고리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좌절, 끝내 놓지 못했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연결고리다. 녹이 슬어 바스러지는 문고리가 당신의 절망과 희망 고문이었던 시간을 열어준다. 이제는 닫히지 않는 철 대문의 서사가 서럽다.
오랜 침묵의 끝에서 쌓여왔던 녹이 손에 묻는다. 애먼 발길에 차이기만 했던 쪽문은 움푹 찌그러져 덧칠을 해놓은 듯 녹이 번져있다. 오래됨과 지나간 시간의 낡고 삭아가는 것들을 어떻게 기억할까. 붉은 것들의 사유가 여기저기 얼룩져 있다. 좌절과 분노, 원망과 미움으로 갈등하던 순간에도 서로가 놓지 못했던 마음에 쌓여가던 녹을 본다. 결코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 삶이다. 녹은 붉게 진 얼룩과 함께 존재의 기록으로 남겨져 서로의 역사가 되고 추억이 된다.
붉은 녹은 흘러간 세월의 색이다. 마음 깊은 곳의 애환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느리고 오래된 상처의 흔적이다. 흔적은 시간과 시간이 뒤엉킨 그리움의 색으로 붉게 물든 저녁노을처럼 번진다. 삐걱거리는 오래된 철 대문, 낡은 액자를 겨우 지탱하고 있는 벽의 못, 채울 것도 없는 창고의 문짝에 걸려 있는 녹슨 자물통에서 시간이 만들어 낸 붉은색이 마음을 건드린다.
먼지 내려앉은 연장통 속사정이 아버지를 말해준다. 작은 나사못과 대못, 망치와 가는 철사 뭉치 나부랭이 등이 붉은 녹에 엉켜있다. 뒤적이던 손이 붉게 물이 든다.
숙취가 깬 아침이면 발길에 떨어져 나가버린 민망한 문고리를 달면서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다시 삶을 추슬러야만 하는 못 질의 의미를 나는 이해하려고 노력이나 해 보았을까.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절규 같았던 망치 소리를 마음이 먼저 듣는다. 원망과 서러움의 날도 시간이 흐르면 퇴색되어 녹이 슬고 산화되어 삭아 내린다.
당신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이 집을 허물고 나면 그 시간의 형체마저도 자연으로 돌아간다. 폐허에 달빛만 고고했던 허무한 노래는 더 이상 취객의 위로가 되지 못해 허공에서 맴돈다. 푸른색 페인트가 드문드문 남아 있는 철 대문의 고난도 붉음 속에 본연으로 돌아가고 치열했던 삶마저 붉은 흔적을 남기며 흙으로 귀환한다. 함께 했던 모든 존재의 무한하지 않음이 세월과 함께 풍화되고 붉게 녹슬어 소멸하면서 유한성을 일러준다.
녹을 보면 쇠락해 가는 아쉬움과 동시에 묘한 안도를 느낀다. 바스러지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철의 단단함도 흙으로 회귀하는 인간과의 동질감에서 평온을 얻는다. 사명을 다한 녹슨 문고리는 더 이상 단절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빛나던 삶의 정점도 강인한 철의 속성도 자연의 변화와 함께 처음으로 회귀한다. 퇴색하고 변형되어 가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질서의 순리가 녹슨 마음을 연다.
붉은 녹은 단호하고 아름답다. 쇠락하여 무너짐이 아닌 모든 것을 삭인 압도적인 본능의 색이다. 임종을 앞둔 수도자의 모습처럼 안식에서 오는 순종으로 고요하면서 평화롭다.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자연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시간임을 보여준다.
자연이 인간의 창조물 위에 물들이는 귀환의 색이 경이롭다.
녹 앞에 서면 겸허해진다. 조금씩 내려놓고 삭아지면서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수용하는 시간의 흐름이다. 지나간 시간과 지금 그리고 다시 자연으로 회귀하는 시간에 숙연해진다. 귀환의 시간인 저녁노을은 서서히 저물어가던 오늘 하루해의 녹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고단한 몸이 붉음에 물들며 하루를 놓는다. 하루의 끝은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쇠락의 시간인 붉은 녹은 끝이 되고 처음이 된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무엇을 담을 수 있을까 / 김수우 (1) | 2025.12.19 |
|---|---|
| 수각화水刻畵1.2.3 / 이산 (1) | 2025.12.17 |
| 맷돌 / 류영택 (1) | 2025.12.11 |
| 디딤돌/김*이 (0) | 2025.12.08 |
| 마른 빵 한 조각과 죽 한 그릇 / 설성제 (0) | 2025.12.03 |